회당 김기환 선생의 이순신공세가(李舜臣公世家) 제26회

유성룡은 이순신의 위인을 잘 안다. 양인의 사이는 문경지교이며 지기지우였다. 순신이란 사람은 그만한 작위의 진급 여부로 하여서 그 국가에 대한 성충과 창생에 대한 관념이 더하고 덜하고 할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산도 승전이 아니었다면 전라도 이상의 각도 연해안의 제해권을 보유하지 못하여 군량을 대고 연락을 취하여 국가가 다시 중흥될 가능성이 없었으리라고 보았다.

 
좌의정 윤두수가 아뢰되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견내량과 한산도 간 바다에서 적의 병선 70여척을 당파하여서 적의 수군을 9000여인이나 섬멸하였다 합니다” 하고 전라도사 최철견과 안동1)해온 이순신의 군관 송여종宋汝悰을 옥좌 앞으로 인도할 때에 선조는 마치 무서운 꿈이나 깨친 듯이 기뻐하였다. 최철견은 선조의 앞에 엎드려 이순신이 승첩한 장계를 받들어 올렸다.

선조는 순신의 장계를 보매 처음에 대전의 시작할 때로부터 경과하여 오던 전말과 공을 이룬 제장의 성명을 상세히 쓰고 끝에는 “제장과 군졸 등이 분연히 몸을 돌보지 않고 여러 차례 힘써 싸워 승리하였습니다. 그러나 행조行朝가 멀리 떨어져 있고 길이 막혀 있으니 만약 조정의 명령을 기다리다 보면 시일이 늦어져 군사들을 감동시킬 수 없는 고로 우선 공로를 참작하여 1, 2, 3등을 정하였으며 당초 약속에 의하여 비록 적의 목을 베지 못하였더라도 죽기로써 싸운 자들은 신이 직접 본 대로 정하였습니다” 하였다.

선조는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허리를 펴고 소리를 질러 “과연 이순신은 천하 명장이로다. 그 호랑이떼 같은 천하막강지적을 연하여 때려 부수니 참으로 만고에 드문 영웅이로다!” 하고 또 그 문장을 찬양하며 못내 기뻐하여 좌우를 돌아보았다. 영의정 최흥원, 좌의정 윤두수, 우의정 유홍, 영부사 유성룡, 판부사 정철, 좌찬성2) 윤근수, 병조판서 이항복 등이 선조의 좌우에 서 있었다. 그들 중에는 이순신의 대승첩을 기뻐하지 않는 이가 많이 있다. 나라 일은 어찌 되건 말건 이순신은 유성룡이 천거한 사람이어서 동인東人이라고 지목하는 까닭이었다.

선조는 이순신의 군관 송여종이 받들어 올리는 적장의 머리 3과와 왼쪽 귀만 베어 젓 담근 항아리를 손수 열어보고 또 친히 송여종에게 싸움할 때의 광경과 그 웅장한 도략을 말하게 하여 듣고 곧 승지를 불러 이순신을 정일품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의 작위에 올리는 교지를 쓰라 하고 송여종을 전라도 수령 중에 비어 있는 남평南平현감을 시키라고 하였다.

정철이 선조의 앞에 나와 엎드려 “이순신의 공이 적다할 수는 없소만 그만한 공에 정일품을 주신다 하면 더 큰 공을 세울 때에는 무엇으로 갚으려 하시겠습니까? 그러니 작위는 남용하는 것도 장려하는 도리가 아닌가합니다” 하고 정일품 주자는 선조의 말에 반대를 교묘하게 말하였다. 정철과 유홍의 말에 조정에 있는 많은 서인들은 통쾌함을 느꼈다. 선조는 내심에 ‘또 이놈들이 당파싸움을 하는구나!’ 하고 분이 북받쳐 오름을 금할 수 없어서 흥분하여 떨리는 어성으로 “그러면 일품이라는 작록은 당파싸움 잘하는 자들만 가지는 것인가?” 하고 정, 유 양인을 노려보았다. 양인은 선조의 노함을 보고 안색이 붉어졌다. 유성룡은 아무 말 없이 눈을 감고 서서 있었다. 윤두수가 “조정이 모두 이순신에게 정1품을 내리심을 불가라 하오니 정2품으로 하심이 옳을까 합니다” 하고 조정하였다. 그러나 지금도 순신은 정이품이었다.

당파싸움에 묻히는 순신의 성충

▲ 선조는 서인들의 눈치를 보다가 이순신에게 정2품을 하사했다.
심지가 약한 선조는 생각하되 이렇게 된 처지에 도망하지 아니하고 자기를 따르는 것만 해도 고마운데 그 수많은 서인들의 감정을 상하는 것이 미안도 하고 두렵기도 하여 윤두수의 말대로 정2품 정헌대부正憲大夫를 순신에게 주고, 이억기와 원균은 종2품 가의대부嘉義大夫로, 권준 이순신李純信 어영담 등은 가선대부동지嘉善大夫同知로, 이하 제장도 차차 봉작하고 송여종은 순신의 휘하에 더 있어서 전공을 더 세우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순신에게는 특별히 교유서를 내려 그 비상한 공을 장려하였다. 그 교유서는 이러하다.

王若曰 不世之才有不世之遇 …
非常之報待非常之功 …
玆擧褒嘉之典 式酬超異之勞
顧予寡昧之資 守艱大之業
卄五載宵衣食 計雖存於苞桑
二百年文恬武嬉 民不習於戰鬪
何意島人之匪茹 遽乘疆之不虞
彎射日之弧 … 鼓吠堯之吻 …
呼吸而破三都 蹂躪而傾八路
失城郭山河之固 何有於金湯
委兵革倉之多 反資于寇敵
念今乾淨之片地 只餘湖海之一方 …
六萬騎潰於畿甸痛李洸輕敵而敗師
二千兵陷於錦山哀敬命臨危而授命 …
淮西士卒得裵度爲之長城
江左生靈微管仲幾乎左 惟卿 業傳下
才出山西 藏甲兵於心胸
以身爲膽 塡忠義於骨髓 憂國如家
方守魏尙之雲中 遂制韓信之外 …
中流擊士雅之楫 灑泣登太眞之舟
投艦於烈焰 唐項之積屍渾江
斬於驚波 閑山之腥血漲海 …
振王靈於遐荒 … 兇魄於遠邇 …
群將袖手爭先棄甲曳兵
列鎭望風只知開門納敵 念非卿之勇烈
誰與國而存亡 … 玆授卿正憲大夫 …
予之望卿益深… 3)

왕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상에 다시없는 인재는 세상에 다시없는 대우가 있어야 하고… 비상한 보답은 비상한 공을 대접함이니… 이에 표창하는 전거를 들어 뛰어난 노고를 갚고자 한다. 돌아보건대 나는 모자란 자질로 왕위를 지켜왔다.

25년 동안의 소의간식에 계책은 굳건함에 두었다고 하나, 200년 동안의 문념무희에 백성은 전투에 익숙하지 못하였다. 섬나라의 분수 모름을 어찌 알았으랴?

국경의 무방비를 틈타서 해를 향해 활을 당기고… 요임금을 보고 짖는구나.… 호흡하니 삼도가 무너지고 유린하니 팔도가 기울었다.

성곽과 산수를 잃었으니 어디에 금성탕지가 있겠으며 무기와 곡식을 버렸으니 도리어 적을 도운 셈이다. 생각하건대 지금 깨끗한 한 조각 땅이라곤 단지 호남의 바다 한 지역만이 남았는데… 6만 기병이 경기에서 무너졌으니 이광이 적을 가벼이 여겨 패함이 원통하고 2000 병사가 금산에서 함몰되었으니 고경명이 위기에 처해 목숨을 바침이 애석하다.… 회서의 사졸들은 배도裵度를 얻어 그를 만리장성으로 여겼고 강좌의 생령들은 관중管仲이 없었으면 좌임을 할 뻔하였다.

오직 경만이, 업적은 이하4)에서 전해 받았고 재주는 산서5)에서 나왔도다. 계책을 가슴속에 품어 온몸을 쓸개로 삼고, 충의를 뼛속에 채워 나라를 집처럼 걱정하였다. 바야흐로 위상6)이 운중을 지키듯이, 마침내 한신이 곤외를 통제하듯이… 중류에서 사아7)의 노를 두드리고, 눈물을 흘리며 태진8)의 배에 올랐다.… 맹렬한 불꽃 속에 적함을 던져 넣으니 당항포에 쌓인 시체는 강물을 흐렸고, 거센 파도 위에서 적들을 죽이니 한산도의 비린 피는 바다에 넘쳐났다.… 왕의 위엄을 변방에까지 떨치고… 흉한 넋을 주위에서 빼앗았다.… 뭇 장수들은 팔짱만 끼고 있다가 갑옷을 버리고 무기를 끌고 도망가기를 다투었고, 여러 고을은 소문만 듣고서는 단지 문을 열어 적을 들여보낼 줄만 알았다.

생각해보건대 경의 용맹이 아니었다면 그 누가 국가와 더불어 존망을 함께하리요.… 이에 경에게 정헌대부를 제수하노라.… 내가 경에게 기대함이 더욱 깊다.…

유성룡은 이순신의 위인을 잘 안다. 양인의 사이는 문경지교刎頸之交이며 지기지우知己之友였다. 순신이란 사람은 그만한 작위의 진급 여부로 하여서 그 국가에 대한 성충과 창생에 대한 관념이 더하고 덜하고 할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산도 승전이 아니었다면 전라도 이상의 각도 연해안의 제해권을 보유하지 못하여 군량을 대고 연락을 취하여 국가가 다시 중흥될 가능성이 없었으리라고 보았다. 그의 징비록懲毖錄에 한산도 싸움에 관하여 이렇게 기록하였다.

蓋敵本欲 水陸兩路軍 合勢西下 賴此一戰 遂斷敵一臂 行長等雖得平壤 勢孤不敢更進 國家得保湖南湖西 以及海西關西沿海一帶 調度軍食 傳通號令 以濟中興之業 遼東山海關天津山東等地 不被震驚 使明兵從陸路來援 以致却敵於者 皆此一戰之功 嗚呼豈非大哉

적은 본래 수군과 육군이 합세하여 서쪽으로 가려 했으나, 이 한 번의 전투로 인해 적의 한 팔이 끊어지게 되었다. 소서행장이 비록 평양을 얻었으나 그 세력이 고립되어 감히 다시 나아가지 못했다. 국가가 호남과 호서를 보전하니 이로써 황해도와 평안도 연해 일대까지 지키게 되었고, 군량이 조달되고 호령이 통하여 이로써 나라를 회복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요동, 산해관, 천진 등지가 침범을 당하지 않게 되어 명나라 군사로 하여금 육로를 따라 내원하여 적을 물리치게 된 것은 모두 이 한 전투의 공이다. 오호라, 어찌 큰 업적이 아니겠는가.

이순신은 고성 견내량에서 밤을 지내고 이튿날인 7월 9일에 가덕에서 안골포로 향하는 적선 40여척이 있다는 탐망선의 보고가 왔다. 아마 전날 밤에 견내량에서 야습하려고 왔던 적의 함대인 듯하다. 지난달에 구귀가륭 등당고호 등 패전하였던 장수들이 새로 병선과 군사를 얻어 가지고 후진이 되어 협판중서脇坂中書의 뒤를 이어 오던 함대일 것이다. 이 보고를 받고 순신은 곧 이억기와 원균 이하 제장을 불러 군사회의를 열고 이 40여척의 적선을 공격할 계책을 의논하였다. 간신히 배를 몰고 거제 칠천도漆川島 일명 온천도溫川島에 도착하여 밤을 지냈다.

 
7월 10일 새벽녘에 출발하여 칠천도를 떠나면서 순신은 우수사 이억기에게 이곳을 떠나지 말고 가덕도 쪽으로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다가 우리가 먼저 가서 접전이 되거든 숨어서 달려오라고 약속하였다. 이것은 겁내는 적이 우리의 대세력을 보면 필연코 놀라서 나와 싸우지 아니할 것 같으니 미리 세력을 나누어 약한 것처럼 보이자는 유적 도전의 계책이었다. 원균도 그간에 차차로 군비가 갖춰져서 대소 병선이 20척에 달하였다. 이것을 거느린 원균은 순신의 뒤를 따라오라는 명령을 순신에게 받았던 것이었다.

순신은 짐작하되 적이 한산도에서 대패한 뒤라서 응당 우리 함대를 무서워하여 항만 속에 깊이 숨어 나오지 않을 줄 미리 알고, 짐짓 이억기의 병선을 숨겨 적의 눈에 보이지 않게 하고 단약한 형세로 쳐들어가면 적이 혹 나와 싸울지 하는 계산이나, 적은 어떻게 겁을 냈던지 요지부동하였다. 순신이 안골포 밖에 다다라 바라보니 안골포 선창에는 적의 대선 21척 중선 15척 소선 6척 합 42척이 열박하였는데 그 중에 삼층각을 지은 큰 배 1척과 2층각을 지은 큰 배 2척이 있어서 외양을 향하고 포구의 물 깊은 곳에 떠 있고 다른 배들은 비늘 달리듯이 포구 안에 늘어서 있다.

순신은 협판중맹선 몇 척을 보내어 도전하여 적선을 큰 바다로 끌어내려고 몇 번 시도하였으나 그저께 한산도 큰 싸움에 패망한 겁이 기억되었던지 이순신의 병선이라면 천신같이 보여 감히 포구 밖으로 나오려 하지 아니한다. 순신은 어찌 하는 수 없어서 제장으로 하여금 부대를 나누어가지고 번갈아 포구 안에 들어가 치고는 물러나고 치고는 물러나고 하는 전술을 쓰기로 하였다.

위엄 드러내는 거북선

▲ 이순신은 번갈아 포그 안에 들어갔다 치고 빠지는 전술로 안골포 대승을 이끌었다.
혹은 5척씩 혹은 10척씩 경쾌한 배와 거북선을 놓아 3층각선과 2층각선을 공격하여 천지현자 또는 승자 각양 대포와 장편전 유엽전을 빗발같이 퍼부었다. 적도 사력을 다하여 응전하다가 3층각선과 2층각선의 적병이 점점 맞아죽어 거의 다 없어지면 적의 소선들이 다른 배에 있는 적병을 실어다가 보충하고 시체는 싣고 나가고 하여서 이러하기를 몇 차례나 하였다. 접전이 일어난 포성을 듣고 이억기의 함대가 약속한 대로 달려와서 합세하여 삼도 병선이 같은 전법으로 싸움은 더욱 격렬하여졌다. 거북선이 두 척이나 포구 안에 들어가 좌충우돌하는 바람에 적의 중소선은 부딪쳐 깨지고 대선들도 감히 대들지를 못하였다.

오직 3층각선과 2층각선은 피하려 하여도 피할 수가 없이 되어 대항하는 모양이었다. 왜 그런가 하면 배가 무겁고 커서 선창 가까이 들어갈 수도 없고 또 순신의 주사가 포구를 막았으니 바다 밖으로 도망해 나갈 수도 없다. 그러나 이 3층각선과 2층각선은 대단히 견고하여 여간 대포를 맞아도 깨지지를 아니하였다. 그래서 적은 이 3척 층각선을 근거로 하여 항전하였던 것이었다. 또 이편의 전법으로 보더라도 2층각선 삼척을 깨뜨리는 것이 오늘 싸움의 중심적 공격이었다. 이렇게 싸우기를 날이 저물도록 계속하였다.

층각선 3척에 사람을 갈라 실은 것이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이러는 동안에 적의 대선 중선 소선들은 혹은 거북선에 다닥뜨려 깨지고 혹 대포와 화전에 맞아 불이 타 40여척 중에서 남은 것이 3척 층각선과 아울러 10척이 못되고 적군도 반 이상이 전사하고 말았다. 그래도 적군은 마지막 한 사람까지도 죽고야 말라는 듯이 층각선에 번갈아 들어 조총과 시석을 난사하며 악전고투하였다.

마침내 3층각선이 화전에 맞아 불이 댕기고 2층각선도 불이 붙었다. 배 3척이 타는 화광은 석양의 하늘을 더욱 붉게 하였다. 이 모양을 당한 적군은 울고 소리를 지르고 갈팡질팡 급하게 남은 소선을 타고 불을 피하여 육지로 오르려 하였다.

순신은 쇠를 울려 싸움을 거두고 조수가 썰물이 빠지기 전에 함대를 물 깊은 곳으로 옮기기를 명하였다. 원균은 처음부터 끝까지 뒤를 막는다고 칭탁하고 병선도 적다는 핑계로 싸움하는 제일선에는 참가하지 아니하고 멀리 착탄거리 밖에서 뒤떨어져 바라보고 있다가 썰물에 떠내려오는 적의 시체를 건저 머리를 베어 모으기로 일삼았다. 전일 한산도 싸움에도 원균은 멀리 뒤떨어져 있다가 순신의 군사가 이기는 것을 보고야 비로소 서둘러 적이 다 죽고 난 공선을 깨뜨려 불사르고 죽은 적병의 머리를 모으기로 일삼았다. 만일에 순신의 군사가 싸워서 불리할 것 같으면 뒤떨어져 있다가 도망할 것은 사실이었다.

이 안골포의 싸움이 끝나고 날이 저물고야 순신과 이억기의 군사들이 원균의 군사들의 하는 모습을 보고 욕하여 “저놈들은 가만히 굿만 보고 있다가 떡만 먹으려 들어” 하고 분개하기를 마지 아니하였다.

순신은 이 광경을 보고 자기의 휘하장사들을 경계하여 “싸우는 것이 우리의 일이 아니냐. 싸워서 적병을 죽이고 싸움이 이기는 것이 우리의 일이 아니냐. 우리 군인은 신성한 심법心法을 가져야 한다. 너희들의 공은 내가 다 보아서 알았으니 수급을 자랑할 것이 없다” 하여 일군의 분개하는 마음을 위로하고 단속하였다.
순신이 이억기로 더불어 함대를 몰고 포구밖으로 나오는 것을 보고 원균은 분을 내며 “적선을 맞아 없애지 아니하고 왜 퇴각하시오?” 하였다. 순신은 어이없어 대답하기를 “적병이 육지로 올랐으니 수로로 나갈 길을 끊으면 육지에 있는 우리 백성들이 해를 당할 것이니까 일부러 길을 열어 주어 궁구물박9)이란 말을 따른 것이오” 하였다. 원균은 억을 내어 “소인은 이 포구에 떨어져 지키겠소” 하고 자기에게 딸린 경상우도 제선을 거느리고 포구 밖에 남아 있으려 하였다.

군인의 심법 강조하는 순신

 
이억기는 원균에게 핀잔을 주어 “영감은 이 포구에 뒤떨어져 있다가 조수에 떠나오는 적군의 목을 더 베고 또 패전한 적선이 나오거든 최후의 승리를 독점하려고 하는구려. 그것 참 싸우지 않고 공을 이루는 것이니 하염직한 일이오” 하였다. 원균의 안색은 붉어졌다. 순신은 정색하여 “자고로 군제란 일치행동을 주로 하는 것이거늘 자의로 배반하면 군율이 없을 수 없소” 하여 단연히 불허하였다.

순신은 전함대를 몰고 포구 밖 10리쯤에 유진하고 밤을 지냈다. 이튿날 다시 포구를 향하여 적의 종적을 찾았으나 아니나 다를까 남겨둔 적선 5척은 밤사이에 닻줄을 끊고 순신이 예상한 바와 같이 부산 방면으로 달아난 모습이 확실하였다. 이제는 이곳 백성들이 부대낄 염려는 없다고 순신은 근심을 놓고 소선을 타고 전날 싸우던 터를 두루 돌아다니며 전승한 자취를 살펴보았다.

이공이 말한 군인의 심법이란 일본으로 말하면 무사도의 정화요 중국으로 말하면 탕무湯武의 군정이다. 인인군자仁人君子의 한 번 예측이 천만인을 살릴 수 있으니, 그때에 만일에 배를 남겨 두지 아니하였던들 육지로 올라간 적들로 인한 내지의 피해는 말하지 않아도 알 일이다. 이로 보건대 조선 백성에게 그 은덕이 과연 어떠한가. 고로 말하기를 “백암 원수는 인인군자의 마음이 있으며 영웅호걸의 능력이 있으며 충신의사의 절개가 있다” 하니 동양에 있어서 누가 능히 견줄까. 제갈량이나 김유신金庾信 등의 일류 인물일진저.

안골포 연안에 적의 시체를 살아남은 적병들이 도망하기 전에 12 무더기에 모아놓고 화장을 하였는데 아직도 불이 남아서 살과 뼈가 타는 냄새가 하늘로 오르고 팔과 다리와 머리 같은 것이 낭자하게 널려있다. 적군이 얼마나 죽었던지 헤아릴 수가 없으나 열두 무더기에 탄 재와 타다가 남은 수족과 머리를 본다면 3000명은 넘을 것 같았다.

순신은 다시 함대를 몰고 안골포를 떠나 양산군 낙동강 어구의 김해부로 나오는 포구와 명지도10) 감동포11)라는 데를 수색하였으나 적의 그림자도 없었다. 아마 이순신이 또 온다 하여 다들 미리 도망간 모양이었다. 순신은 동래땅 몰운대 앞바다에 함대를 벌여 진을 쳐서 병위를 보이고 사방에 탐망선을 내놓아 적의 형적을 정찰하였다.

이날 술시에 김해 금단곶 봉화대에 파견하였던 탐망군 경상우수영 수군 허수광許水光이 돌아와서 “금단곶 봉화대에 망을 보러 올라가는 길에 봉우리 아래 암자에 있는 노승을 데리고 올라가 연기를 피우면서 바라보니 낙동강 깊은 목에 여기저기 정박한 적함이 백여척이나 되었습니다. 노승의 말을 듣건대 근일 이래로 매일 한 50척씩이나 되는 적선이 몰려나오기를 연해 11일동안이나 나왔는데 안골포에서 접전하는 포성과 소문을 듣고는 간밤에 거의 도망하여 부산방면으로 달아나고 한 100여척만 남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고 고하였다.

이 말을 들은 순신의 제장은 순신에게 강 깊은 목에 정박한 적선을 대번에 때려 부수기를 주장하였다. 순신은 그렇지 않다며 강 깊은 목에 숨어 있는 적함을 토벌하기는 불가능하다고 여러 가지 조목을 들어 말하고 겸하여 육로로 와 치는 육군이 없고는 수군만으로는 더욱 강목에서 싸우는 것은 병가에서 꺼리는 것이라 말하고 함대를 몰고 천성보로 물러왔다. 그 밤으로 회군하여 12일 새벽에 한산도로 돌아왔다.

한산도에는 전번 8일 큰 싸움에 배를 버리고 상륙하였던 적병들이 여러 날 굶어 몸을 기동할 수가 없어서 강변에서 아사한 자도 있고 혼수상태로 조는 자도 있었다. 이렇게 된 적병 400여명은 조롱에 갇힌 새와 같아 도망할 길이 없을 것이라 하여 그 시체의 머리 모으기 좋아하는 원균으로 한산도를 지켜 적을 도망하지 못하게 하고 순신은 이억기 이하 제장을 데리고 본영으로 돌아갔다.
정리 | 이남석 더 스쿠프 대표 cvo@thescoop.co.kr 자료제공 | 교육지대(대표 장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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