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당 김기환 선생의 이순신공세가(李舜臣公世家) 제27회

 
요시라는 조선정부의 동서당쟁 싸움이 있는 것을 이용해 반간계로써 이순신을 참소해 오자서를 몰아내고 범증을 멀리하게 했다. 요시라는 계책에 따라 가등청정과 소서행장에게 밀령했다. 그 당시 일본 제장들이 제일 두려워하고 피하고 싶은 장수는 이순신 한 사람이었다. 이순신만 없다면 나머지는 별 볼일 없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양산 김해의 낙동강중과 부산 소굴의 적을 그냥 두고 회군하는 사정은 이순신의 전략상으로 보아서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한산도와 안골포 싸움에 패하여 예기를 상실한 적의 수군은 구석진 곳에 꾹 틀어박혀서 나와 싸우기를 피하므로 우리나라 육군과 협력이 없고는 단지 수군만 가지고는 어찌 할 도리가 없음이요.

둘째는 많은 군사가 여러 날 싸움에 피곤할 뿐만 아니라 적의 탄환과 화살에 맞아 상한 사람도 많고 죽은 사람도 있으며 또 군량이 장차로 고갈되면 전라도에 돌아가기 전에는 전부 지방이 무인지경인 경상도 연안에서는 군량을 얻을 길이 없음이요.

셋째는 금산을 점령한 적세가 매우 치장하여 전주까지 범하였다는 경보가 왔으니 잘못된다면 전라좌우도 전부가 적의 육군의 말발굽에 짓밟히게 될 것이니 그야말로 조선군의 근거를 잃어버릴 근심이 있음이었다. 만일에 전라도까지 마저 적의 수중에 들어간다고 하면 순신의 수군도 식량을 얻고 발을 붙일 근거를 잃어버려서 조선은 영영 회복할 기회를 얻을 수 없을 것이었다. “무호남無湖南이면 무국가無國家”라는 것은 이순신이 서애 유성룡에게 보낸 서간중의 한 구절이었다. 이러한 세 가지 이유로 순신은 전군을 거느리고 한산도를 떠나 전라좌수영으로 향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순신은 금번 싸움에 사로잡은 우리나라 사람 몇을 다시 신문하여 적정을 철저히 알고자 하였다. 녹도만호 정운이 사로잡은 거제 오량포1) 포작2) 최필은 전일의 대답과 비슷하나 다만 상이한 점은 적군이 전라도로 싸우러 가려고 견내량에 와 유진하였다가 패망한 모양이라고 할 뿐이었다.

순천부사 권준이 사로잡은 한성사람 김덕종은 “소인이 6월경에 서울에 웅거했던 적의 총대장 평수가3)를 따라 수가는 군사를 네 패로 나누어…” 하는 말이 전일의 진술과 비슷하였다.

전라도 패전 치욕 씻으려는 적군

▲ 이순신은 김해의 낙동강과 부산 소굴의 적을 그냥 두고 회군하는 전략을 세웠다.
유군오령장 최도전이 사로잡은 한성 사노 용이와 또 사노 중남이와 경상도 비안 사노 영락의 무리는 “소인 등은 서울로부터 적병을 따라 내려오는 길에 용인 땅에서 올라오는 적병과 합세하여 북두문 산성에 웅거하였는데 우리 조선 군사 몇만명을 만나 접전하다가 우리 군사가 그만 무너져 간 뒤에 김해부로 내려와서 대장이 글을 가지고 각진 제장에게 통문을 하는데 그 모양이 우리나라 장수가 약속하는 것과 흡사하였고 모두 그 글을 보고는 적장들이 손을 들어 서방 전라도쪽을 가리키며 이를 갈고 무슨 장담을 하는데 그러할 때마다 전라도 수군이라고 하며 혹은 칼을 빼어들고 무엇을 치는 형상을 하는 것이 마치 사람을 죽이는 모양을 하는 것과 같아…” 하여 전일의 진술과는 조금 달랐다.

광양현감 어영담이 사로잡은 경상도 인동군 사람 우근신이란 자는 말하기를 “소인이 누이동생과 처자를 데리고 피난하려 산중에 들어가 숨었다가 누이동생과 함께 적병에게 붙들려서 서울로 올라가 동생은 적장에게 겁탈을 당하였소. 어느 날인지 몰라도 그 적장에게 끌려서 다시 영남으로 내려올 때에 우리나라 군병과 서로 만나 접전을 하였는데 첫날은 적병이 이기고 둘째 날은 적병이 패해서 퇴병하고 그 셋째 날에는 우리나라 군사가 다 물러가서 김해강으로 내려왔소. 김해강에서는 배를 탔는데 그 배들은 어디서 온 배인지 알 수 없었는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간다는 말은 알아들을 수가 없으나 다만 손으로 서방을 가리키는 것이 필연코 전라도로 가자는 말인 듯 하였소” 하고, 접전하던 당일의 일에 관하여 우근신은 “그날 소인을 데리고 온 적장이 우리 수군을 많이 쏘아 죽였소. 그러나 다른 적장들은 우리 사람이 가만히 있으면 칼을 두르고 날뛰다가 우리 수군이 이기게 되어 활을 쏘며 돌격을 하면 다들 겁을 내어 머뭇거리고 뒷걸음을 쳤소. 소인을 데리고 온 적장이 용감하게 아무리 호령을 엄히 하여도 모두 조선수군을 무서워하여 나서지를 못하였습니다” 하고 당시 전황을 직고하였다.

순신은 또 “그러면 너를 데리고 온 적장은 어찌 되었나?” 하고 상세히 묻는 바람에 우근신은 “그 장수는 조선 화살에 맞아 죽었소” 하였다. 그리고 우근신은 눈물을 흘리며 “우리나라 수군이 돌격하여 오는 광경을 보고 암만하여도 견디지 못할 줄 알고 그 적장이 허리에 찬 작은 칼을 빼어주며 소인의 누이동생더러 배를 갈라 죽으라고 하였소. 소인의 누이동생은 벌써 잉태한 지 몇 개월이었는데 적장이 주는 칼을 받아서 배를 갈라 죽지 아니하고 목을 찔러서 먼저 자살을 하였소” 하였다.

다음에 웅천현감 허일許鎰이 거느리는 서기관 주귀생朱貴生은 “김해에 사는 내수사內需司 관노 이수금李水今이 7월 2일에 웅천현에 있는 그 부모를 보려고 웅천읍내에 와서 말하기를 김해 불암4) 선창에 와 있는 적의 수군들도 전라도 수군과 접전할 것이라는 말을 하더라고 하며, 배마다 방패 밖에다가 단단한 괴목 판자 쪽을 세 쪽씩이나 덧붙여서 배를 견고하게 만들고 수군을 세 패로 갈라서 김해성 내외에 둔박하게 하였다 하며, 하루 밤에는 바다에 뜬 고기잡이 하는 어선의 불을 보고 전라도 이순신의 수군이 쳐들어온다고 하여 크게 놀라 떠들고 어찌 할 바를 모르고 동분서주하다가 얼마 된 뒤에야 진정이 되더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이 여러 사람의 진술을 다 믿을 수는 없다 하더라도 그 말을 종합해보면 적의 수군이 세 패로 나누어 갈라 가지고 전라도를 침략하여 기왕에 여러 번 패전한 치욕을 씻으려하는 것은 사실이라는 것과, 그 첫 패 73척의 3만인이 한산도에서 부서지고 그 둘째 패 42척의 2만인이 안골포에서 부서진 것은 대강은 상상할 수가 있었다.

백암원수는 매번 포로들을 자기가 직접 문초 받는 마당에 그 자세한 태도와 자애한 동정심과 치밀한 관찰력이 포로들의 속마음을 통찰하며 적의 정세를 파악하여 잿더미와 썩은 흙 속에서 구슬을 취하였다. 아아, 천추 백대 후에 이 책을 읽는 자로 하여금 감탄하고 우러름을 그치지 못할 것이로다.

한산도와 안골포의 두 번 싸움에 적은 새로 조직한 수군의 대세력을 크게 상실하고, 바라던 조선의 제해권을 잡으려는 웅도는 포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 때문에 평양에 웅거한 소서행장의 군사도 더 나아가지 못하게 되어서 이를테면 일본군은 반쪽 어깨의 힘을 잃어버린 셈이었다.

유성룡의 징비록에 “만일에 한산도 승첩이 없었던들 전라 충청도 이북으로부터 경기 황해 평안 제도까지라도 다 적군의 손바닥에 들어갈 것이요, 그뿐만 아니라 나아가 명나라의 요동반도와 천진 산해관 및 산동 등지까지도 일본 수군이 횡행하게 될 것이어서 형세가 매우 위태하게 되리라”는 것은 정확하고 틀림없는 말이라고 아니할 수 없는 사정이었다.

일본의 태합 풍신수길은 육전에서 백전백승하여 무적인 자기 휘하의 군대들이 수전에서는 이순신의 함대와 9번 싸워서 9번 패한 데 대해 수길의 분한 마음은 여간이 아니었다. 그가 일본 수군이 패전하는 이유를 알아 올리라고 엄명하였다.

이에 대하여 수길에게 올린 출정한 수군제장의 보고서에는 “일본 수군은 병선의 다수로 말하면 양적으로 3~4배 이상이 되지만 배가 취약하여 이순신의 철갑귀선에 당한대면 부딪혀 곧 부서지고, 이순신의 사용하는 무기는 견고하고 편리할 뿐 아니라 군사들도 굳세기 짝이 없어 조선의 육군과는 아주 딴판으로 용감히 싸워 물러나지 않고 죽기를 각오하고 있으며 또 이순신은 지리의 험이와 조수의 순역을 잘 알아서 그것을 교묘하게 이용하므로 타국의 객병인 일본수군으로서는 도저히 그 모략을 대항해내기가 어렵다” 하는 것이 그 주된 의견이었다.

수길은 이런 자세한 보고서를 받고는 기가 막혀 이순신을 어찌 처치하나 하여 하릴없어 탄식하기를 마지 아니하였다. 이에 수길은 조선에 건너와 있는 수군제장에게 명하여 “아무리 조선 수군이 싸움을 도발하더라도 결코 응전하지 말고 부산포와 울산 장생포長生浦와 양산 김해 낙동강 입구의 험고한 항만 속에 함대를 감추어 두어 영영 수세를 취하고만 있으라” 하였다.

당쟁싸움이 빈틈으로 작용해

 
그리고 요시라의 헌책을 따라 조선정부의 동서당쟁의 싸움이 있는 것을 이용하여 반간계5)로써 이순신을 참소하여 오자서伍子胥를 몰아내고, 악의樂毅 염파廉頗를 물러나게 하고, 범증范增을 멀리하게 하던 계책을 행할 것을 요시라를 시켜 가등청정과 소서행장에게 밀령하였다.

그 당시에 일본 제장들이 제일 두려워하고 피하려 하는 장수는 이순신 한 사람이었다. 이순신 한 사람만 없고 보면 나머지는 별 볼일 없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부산에 모여 있는 일본 수군은 가끔 가덕 거제 등지에 출몰하여 연해 각 관포와 촌락을 약탈하기를 마지아니하였다.

이때 육지 각처에 있던 일본군들도 한산도 및 안골포의 대패전의 소식을 듣고는 후방이 어찌 되었나 하여 자꾸 뒤가 돌아다 보일뿐 아니라 공포심을 느껴서 대부분이 부산 울산 양산강 등지로 후퇴하여 모여들기를 시작하여 성채를 쌓고 집을 짓고 하여서 오래 웅거하여 요시라의 말과 같이 때를 기다릴 준비를 하였다.

순신은 공대원 등 항왜들을 시켜서 이러한 일본의 정세를 탐문할 때에 분개하기를 마지 아니하고 육지에 장수다운 장수가 없어서 수륙으로 합공을 못하는 것을 심히 한탄하였다. 순신은 전라도 순찰사 이광에게 이 사정을 통지하였으나 이광은 용인에서 실패한 이래로 일본군이 무섭다는 것과 싸움이 겁난다는 것으로 다시 출동할 용기가 좌절되었고, 그뿐만 아니라 이 장수 자격이 없는 이광을 군사와 백성들이 더욱 신용을 하지 아니하여 따라 줄 것 같지도 아니하였다.

이에 대하여 순신은 생각이 초조하고 근심에 마음이 아팠다. 변협, 이제신李濟臣, 신각 같은 명사들은 이미 다 죽었으며, 김시민 박의장 곽재우 선거이 정기룡 김덕령 황진 조경 김면 원호 등 제장은 한 방면을 지키기에는 넉넉하지만 누가 능히 진취적으로 공격하여 부산까지 나아갈 것이며, 이억기 어영담 이순신李純信 이운룡 권준 정운 같은 제장은 이미 수군에 종사하였으니깐 말할 것도 없다 하여 근심이 더하였다.

순신은 하는 수 없어서 조정에 청하였으나 조정에서는 단지 명나라 구원병을 고대하는 것 밖에는 불과 수십명 되는 최흥원 정철 유성룡 윤두수 유홍 김명원 이원익 김응남 이항복 등등의 무리가 서인이니 동인이니 갈라 가지고 당파싸움 밖에는 다른 원대한 생각은 없고 또 설사 생각이 있다 하더라도 대군을 조발하여 육상에 가득한 적세를 반격해낼 힘도 없었던 시대가 되고 말았다.

이에 순신은 최후의 일책으로 경상도관찰사 김수에게 청하여 수군은 순신 본인이 담당하여 해상에 있어서 적의 함대를 격파하고 적의 도망할 길을 막고 적의 책원지가 되는 부산을 무찌를 것이니, 김수는 경상도내에 있는 의병에게라도 호소하여 그들을 지휘하여 수륙이 동시에 호응하여 적을 토멸하도록 협력하자고 하였다.

원래 김수는 지난 4월 중순에 적이 처음 상륙함으로부터 부산과 동래 양산 김해 등 여러 거진을 불과 수일 내에 연해 함락시킬 때에 겁을 집어먹고 진주성을 버리고 합천으로 지례로 달아난 위인이었다. 이번에 이순신의 이러한 청을 받으매 자신은 없다하더라도 못한다고 거절하기는 정말 어려워서 9월 1일을 기약하여 부산의 적의 근거지를 수군과 육군이 서로 호응하여 합력 토벌하기를 굳게 약속하였던 것이었다.

이때 순신은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이억기와 경상우도 수군절도사 원균과 서로 관문을 통하여 제4차로 출전하기로 약속을 정하고 8월 1일에 전라좌우도 병선을 합하여 판옥대맹선이 74척 협판중맹선 92척 기타 포작소맹선은 계산하지 않고도 도합 166척이었다. 이상의 대함대를 거느리고 전라좌수영 앞바다에서 관함식觀艦式을 열고 크게 연습을 거행하여 실전의 경력을 발휘 훈련하였다. 병위는 실로 장관이어서 창칼과 깃발은 일광을 받아 찬란 삼엄하였고 쇠북과 대포 소리는 강산을 진동시켰다.

원균을 믿을 수 없어 고민하는 이순신

보성군수 김득광이 순신의 앞에 나서며 “사또, 이만한 병력을 가졌으니 구태여 동으로 출전하여 사생지간에서 싸울 것이 무엇 있소? 송여종의 말을 듣건대 조정에 충만한 무리들이 우리 수전의 공을 그렇게 대단히 잘 알아주지도 않는다고 하오. 지금 성상이 천리 변방인 의주 국경에서 방황하시와 적막히 계시오니 만일에 평양에 있는 소서행장의 적군이 의주까지 들어 친다 하면 성상의 대가는 장차 어디로 몽진하시겠소? 사또는 이 길로 함대를 몰고 바로 용만6)으로 가서 성상을 모시고 강도7)로 돌아와 팔로의 의병을 불러 모아 중흥의 대업을 회복하도록 하는 것이 상책일까 하오” 하였다.

순신은 노하여 김득광을 책하여 “조정에서 들어와 왕실을 호위하라는 명령이 없이 어찌 대군을 거느리고 행재소를 간단 말이오? 지방의 대장이 되어 전란을 당하여 곧 제일선에 나아가 힘써 적을 토벌하는 것이 나라를 위하는 충의이거늘 군수는 나를 권하여 함부로 행동을 하라는 것이 말이 되오?” 하고 김득광의 헌책을 물리쳤다. 이때 경상도 순찰사 김수로부터 관문이 왔다.

“한성이북으로 갔던 적도들이 낮에는 숨었다가 밤에 행하여 양산 김해 등 강 쪽으로 연속하여 내려오는데 복태8)를 많이 실은 것을 보면 필시 도망하여 돌아오는 모양이다.”

8월 24일에 순신은 우수사 이억기와 전라도 조방장 정걸丁傑과 함께 160여척의 연합대함대를 거느리고 좌수영 앞바다에서 출발하여 위무당당하게 제4차로 원정의 길을 나섰다는 것이었다.[정걸이란 장수는 순신의 휘하에서 신임하기를 제자와 같은 사람이다. 얼마 아니 되어 충청수사가 되어 행주幸州 싸움에 권율을 원조하여 성공하게 한 장수였다. 충청수사가 되기는 조정에서 순신을 따라 부산 싸움에 수전의 실습을 한 장수이라 함이었다.]

그날은 남해도의 관음포9)에 와서 밤을 지내고 이십오일에 경상도 사량 바다에 이르러 경상우수사 원균과 서로 만났는데, 원균은 한산도에 상륙하여 굶어죽게 된 적군 4백여명이나 되는 것을 놓아버린 죄를 지은 사람이다. 그가 한산도를 지키라는 명령을 순신에게 얻어서 그 수급 좋아하는 마음에 몹시 기뻐하여 이 패잔한 궁한 적들을 지키고 있을 때에 누가 말하기를 거제 바다에 적의 함대가 보인다 하였다. 원균은 크게 놀라고 낙담하여 곧 자기의 소속 병선을 몰고 순신의 그늘인 서쪽으로 달아나 사량도로 와버렸다. 이것을 본 살아남은 적병들은 나무를 찍어 떼배를 모아 타고 거제도로 달아난 것이었다.

순신은 원균을 만나는 자리에 경상도 연해에 적의 출몰처를 물었으나 그는 상세한 대답을 못하고 모른다고 할 수도 없어서 심히 궁박하여 어물어물하다가 기침만 자꾸 하며 몇마디 말을 하는 것이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 순신은 짐작하였다. 더구나 그가 소맹선을 바다에 놓아 조선 어선을 습격하여 재물을 약탈할 뿐만 아니라 우리 사람의 목을 베어 상투를 풀고 일본 사람의 머리 모양으로 백회를 쳐서 적병을 잡은 듯이 수급을 모은다는 보고를 받은 순신은 원균을 믿을 수 없었다. 정말 그렇다면 원균은 해적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인물이었다. 만일에 그렇다면 원균은 마땅히 처참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경상도 바다에서 싸우는 이상에 그 관할권을 잡은 원균을 참여시키지 아니할 수도 없고 다 같은 수군절도사로서 논죄할 처지도 아니요, 또 조정에 원균의 당이 많아서 참으로 포호빙하10)를 대한 감이었다.
정리 | 이남석 더 스쿠프 대표 cvo@thescoop.co.kr 자료제공 | 교육지대(대표 장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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