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당 김기환 선생의 이순신공세가(李舜臣公世家) 제30회

승장 영규는 계룡산에서 기의하고 의병장 조헌과 동의해 금산 싸움에 순절했다. 수군대장 이순신의 부하에도 벌써부터 승군을 뒀는데 이순신의 충의와 용략에 감동해 일어난 것이었는데 그 수가 400여명에 달했다. 순신은 일일이 부서를 정해 전라도로 들어올 육로 요해처에 복병하게 했다.

 
강원도 조방장 원호는 금성1) 김화金化 양읍 간에서 옮겨 다니며 여러 번 흩어져 있는 적을 찾아 무찌르고 김화에 유진하였더니 적장 모리승신 등이 원호가 잠든 때에 야습을 감행하였다. 원호는 불의에 격파당하고 패잔군을 거두어 가지고 산으로 올라가 진을 쳤더니 적군은 또 습격하여 원호는 중과부적으로 마침내 전사하였다.2)

이조참의 이정암李廷馣이 초토사招討使가 되어 연안延安성을 지키더니 일본장수 흑전장정이 황해도에 들어가던 처음에 연안을 점령하려고 쳐들어온다.

초토사 이정암은 군사들을 대하여 “우리는 나라 일에 같이 죽자” 맹세하고 화전을 쏘아 방어하기를 연 3일을 두고 싸우는 중에 성이 점점 위태하여 간다. 이정암이 섶을 쌓고 위에 올라가 누워 군사들에게 불을 질러달라고 청하였다. 그런데 그때 마침 동남풍이 일어나 적진을 향해 불기 시작했다.

부장 조신옥趙信玉과 백천白川군수 장응기張應祺의 무리가 내달아 나뭇단에 불을 질러 성 밖으로 던지는 통에 개미떼같이 붙어서 올라오던 적병이 이러한 화공을 만나서 패퇴하고 말았다.

적장 흑전장정은 연안성을 빼지 못하고 군사만 많이 죽인 것이 분하여 다시 해주海州와 평산에 주둔하고 있던 군사를 데리고 와서 5일 동안을 계속하여 맹렬히 싸웠으나 백천군수 장응기는 원래 용장이라, 같이 수성하여 활을 잘 쏘아 많은 적군을 쓰러뜨려 마침내 적이 또 불리하였다.

조선 승군의 시초는 평안도에서 서산대사西山大師 최휴정崔休靜이 일으킨 것인데, 선조의 행차가 영변에 머물렀을 때에 묘향산妙香山 속에 있는 최휴정을 불러내어 조선불교 16종의 도총섭都總攝을 제수하고 조선팔로의 승군을 일으키게 명하였다. 서산대사의 지휘로 처영處英은 전라도에서, 임유정은 강원도江原道에서 각기 일어났다. 그때 의승장은 다 휴정의 절제를 받게 되었는데 거의가 그의 문도이던 것이었다.
이밖에도 좀 먼저 승장 영규는 계룡산에서 기의하여 의병장 조헌과 동의하여 금산 싸움에 순절하였으며 또 수군대장 이순신의 부하에도 벌써부터 승군을 두었는데 이는 이순신의 충의와 용략에 감동되어 일어난 것이라는데 그 수는 400여명에 달하였다.

순신은 일일이 부서를 정하여 전라도로 들어올 육로 요해처에 복병케 하였다.

광주목사 권율은 전 영의정 권철權轍의 아들이며 병조판서 이항복의 장인이며 당시에 문무재라 하여 이순신 김시민과 이름을 나란히 하였다. 조정의 추천으로 특히 남대3)로 있다가 광주목사가 된 귀공자였다.
권율은 동복현감 황진으로 선봉을 삼아 가지고 진산珍山의 이치4)를 지켰다. 권율은 이순신보다 9세가 더하고 수길과 동년이며 임진 당시에 나이 57세였다. 황진은 통신사 황윤길의 조카로 자는 명보明甫이고 신장 8척에 미수염美鬚髥이며 용력이 절륜하고 강개한 선비였다. 일찍 그 숙부 황윤길을 따라 일본에 가서 보고 장차 대란이 날줄 알고 일본의 보도 2자루를 사왔으며 용감하고 민첩하기가 나는 새와 같았다.

맹렬히 싸운 군대 위세 떨쳐

▲ 권율 장군이 장려하자 장병들은 적군 중으로 돌입해 맹렬히 싸웠다.
일본군은 전라도를 침범코자 하여 이치를 넘으려고 막 올려 밀었다. 황진의 군사가 수목을 의지하여 몸을 숨겨 적탄을 방어하고 활을 쏘아 종일토록 교전하였다. 적군이 패하여 많이 죽어 유혈이 초목을 물들이고 퇴각하려 할 때에 황진이 철환을 맞아 쓰러지매 이편의 사기가 저상沮喪되었다. 이것을 본 적군은 다시 쳐 올라온다.

권율이 장병을 독려하여 맹렬히 싸우는 중에 황진이 총 맞은 상처를 싸매고 일어나 장검을 휘두르고 적군중으로 돌입하여 100여급을 베니 그 형세가 질풍신뢰疾風迅雷와 같아 감히 당할 자 없었다. 이편 군사의 용기 충천하여 적은 대패 퇴각하였다. 권율과 황진이 이치 승첩으로 군대의 위세가 크게 떨쳤다.5) 조정에서 권율을 자헌대부 전라감사로 승직하고 황진은 절충장군 당상으로 승자6)할 뿐이었다.

임진1592년 12월에 명나라 조정에서 조선 청병사 정곤수의 호소로 인하여 병부시랑 송응창으로 경략사經略使를 삼고, 병부원외랑 유황상劉黃裳과 주사 원황袁黃으로 찬획군무贊劃軍務를 삼고, 요동제독 이여송으로 총대장을 삼아, 3영장 이여백李如栢 장세작張世爵 양원楊元과, 남장南將 낙상지駱尙志 오유충吳惟忠 왕필적王必迪 등을 부하로 하여 4만 병마를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왔다. 그 상세한 병마의 수는 아래와 같다.

총대장 요동제독遼東提督 영하후寧夏侯 이여송李如松 수병手兵 500인
중협대장中協大將 부총관副總管 이여백李如栢 친병親兵 1500인
좌협대장左協大將 부총병副總兵 양원楊元 친병親兵 1500인
우협대장右協大將 도지휘都指揮 장세작張世爵 친병親兵 1500인
이상 합계 5000인

통령統領 임자강任自强 선부병宣府兵 1000인
참장參將 박방춘朴芳春 마병馬兵 1000인
유격장군 고책高策 마병馬兵 2000인
총령總領 전세정錢世禎 마병馬兵 1000인
유격장군 척금戚金 보병步兵 1000인
중영장中營將 주홍모周弘謨 보병 1000인
유격장군 방시휘方時輝 마병馬兵 1000인
유격장군 고승高昇 마병馬兵 1000인
유격장군 왕문王問 마병馬兵 1000인
이상 9장 마보병 합계 1만인 이여백이 통솔.

부총병 왕유익王有翼 마병馬兵 1200인
부총병 왕유정王維貞 마병馬兵 1000인
참장 이여매李如梅 마병馬兵 1000인
참장 이여오李如梧 마병馬兵 500인
참장 양소선楊紹先 마병馬兵 1000인
부총병 사대수査大受 마병馬兵 1000인
부총병 손수렴孫守廉 마병馬兵 100인
유격장군 갈봉하葛逢夏 마병馬兵 1000인
이상 칠장 마병 합계 7700인 양원이 통솔[전임 부총병 조승훈은 평양 실패로 문책]

유격장군 오유충吳惟忠 보병步兵 1000인
부총병 왕필적王必迪 남병南兵 1000인
참장 조지목趙之牧 마병馬兵 1000인
참장 장응충張應祌 마병馬兵 1000인
참장 진방철陳邦哲 보병步兵 1000인
유격장군 곡수谷燧 마병馬兵 1000인
유격장군 양심梁心 마병馬兵 1000인
이상 7장 마보병 합계 7000인 장세작이 통솔
이밖에도 문무장관文武將官이 많았고 유격장군 왕수신王守臣 이녕李寧과 부총병 수양정修養正 낙상지와 참장 장기공張奇功 등의 마병이 각각 1000인이니 합계 5000인이요, 또 그밖에도

유격장군 조문명趙文命 마병馬兵 1000인
유격장군 고철高撤 마병馬兵 1000인
동지同知 이평李平 마병馬兵 800인
유격장군 시조경施朝卿 마병馬兵 1000인
이상 4장 마병 합계 3800인

요동지휘사 장삼외張三畏는 군량을 감독하였다. 유격장군 심유경도 뒤떨어져 와서 의주성중에서 제독 이여송과 무슨 밀담을 하고 한걸음 앞서서 평양을 향하였다. 이여송의 대군이 안주에 이르렀을 때에 유성룡은 접빈사로 면회를 청하였다. 이여송은 유성룡을 영접하여 의자에 앉으라 하여 마주 앉았다. 이여송은 심유경과 같이 오만무례하지는 아니하였다.

유성룡은 말을 내어 원로행역의 노고를 위문한 뒤 소매 속으로부터 평양 지도를 내놓고 손으로 형세를 가리키며 어디로 쳐들어가야 할 것을 상밀하게 설명하여 주었다. 그리고 유성룡을 안심시키는 듯이 “염려할 것 없소. 적은 조총을 믿지만 우리는 대포가 있으니 대포로 쏘면 5~6리 밖까지 가니 적이 당하겠소?” 하고 아주 염려할 것 없다는 태도로 웃었다. 유성룡은 이여송과 작별하고 물러 나오려 할 때에 이여송은 부채를 내어 시 한 수를 지어 써준다.

이튿날 이여송은 부총병 사대수를 먼저 순안으로 보내어 조선 각군을 통솔하게 하였다. 사대수는 평양에 있는 소서행장에게 군사를 보내어 “천조이허화”天朝已許和라는 글월을 보였다. 명나라 조정에서 이미 화친하기를 허락한다는 뜻이었다. 심유경은 이렇게 화친을 허하기까지 된 것은 자기의 공인 듯이 행장에게 말을 전하고 자기도 또 나왔다는 말까지 겸하여 전하라고 부탁하였다.

행장도 수군이 연패한 이래로는 일이 이미 틀렸으니 어서 싸움을 말고 고국으로 돌아갈 생각이 간절하던 터라 심유경이 순안에 왔다 하니 곧 부하 평호관7)으로 군사 20명을 거느리고 영접사로 보낼 때에 절구 한 수를 지어 중국문화를 칭송하여 보냈다.

사대수는 평호관을 거짓 환영하는 체하여 좋은 술을 많이 먹여 대취하게 한 뒤에 장막 속의 복병이 일시에 내달아 평호관과 그 군사를 다 결박하여 군사는 베어 죽이고 평호관은 장막 아래에 꿇리고 행장의 군중비밀을 말하라고 모진 고문까지 가하였으나 평호관은 듣지 아니하고 마침내 죽고 말았다.

평호관의 군사 2명이 도륙을 면하고 빠져나서 평양으로 도망 와서 고하되 평호관이 명병에게 잡혀 죽고 저희들도 다 죽고 단 2명만 도망하여 왔노라 한다. 행장은 놀라고 몹시 노하여 심유경의 간계에 넘어 간 것을 깨닫고 곧 성을 지킬 준비를 착수하였다. 그는 명병이 크게 쳐올 것을 짐작하였다.

명나라 대군과 조선 군사 연합

▲ 평양에서 패한 소서행장의 군대는 한성 안에 있는 조선사람을 살육했다. 죽은 사람이 10만명이 넘었다.
명나라 대군은 벌써 숙천肅川에 다다랐다. 순안에서 평호관을 학살하고 그가 거느린 병사 몇 명이 평양으로 도망하였다는 보고가 왔다. 제독 이여송은 일각을 주저할 수 없다 하여 활을 튕겨 줄을 울렸다. 이것은 곧 진군하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여송은 병사 몇 기만 데리고 말에 올라 순안으로 달려가고 막하 제장도 뒤를 이어 숙천을 떠나 밤새도록 행군하여 이튿날 아침에 평양성을 에워싸고 보통문과 칠성문을 쳐들어갔다.
이 전쟁의 일자는 계사1593년 1월 6일이었다. 3일간이나 명병과 일군이 대격전을 계속하였는데 조선군사도 각 장수들이 이 전쟁을 거들어서 일본군이 점점 불리하여졌다.

이여송의 군사는 벌써 서문으로 깨뜨려 들어가 이여송이 말을 달려 성 안을 한 바퀴 돌아오다가 행장의 군사가 사격하는 탄환에 이여송의 말이 맞고 거꾸러졌다.

이여송은 용감하게도 말을 바꾸어 타고 군사를 지휘하여 대포를 연달아 쏘게 하고 독연毒煙을 피워서 행장의 군사가 중독하여 많이 죽었다.

독와사란 무기를 전쟁에 사용하기는 즉금부터 350여년 전 임진란 시에 이미 썼다. 이순신의 거북선이 그 입으로부터 독연을 토하여 적을 혼미하게 하였으나 다만 마취제만 사용하여 죽기까지는 아니하였지만 이여송은 평양성에서 독화毒火 신화神火란 것을 피워 독연기가 가득히 적진을 덮어 와서 적중이 어지러워 쓰러지며 죽은 자가 셀 수 없으나 명병은 다 해독하는 약을 입에 물어 사상자가 없었다고 일본전기日本戰記에도 기록되었다.

행장의 군사는 이여송의 군사를 대적하지 못하여 점차로 퇴각하여 내성으로 들어가 전일부터 준비 장치하여 놓은 장벽 구멍으로 조총을 난사하여 명병이 또 많이 죽는다. 이여송은 군을 거두었다.

소서행장 종의지 송포진신 등의 군사가 이 싸움에 1만여명이 죽었다. 행장은 밤중에 패잔군을 수습하여 가지고 평양성을 버리고 대동강 얼음 위로 건너서 빠져 달아났다. 이 싸움에 조선 장수들도 힘써 싸우고 명병의 길을 향도하고 수레를 운반하여 큰 노역을 하였다.

3일 동안의 싸움에 사람이 어찌 많이 죽었던지 평양성 내외에 시체가 없는 곳이 없어서 일본군이 만여명 또 명병도 수천명이 죽었으며 조선군사도 수백명이 죽었고, 부상자도 피아에 상당하였으며, 화전과 대포에 성중의 민가는 반이나 불타버리고 칠성문도 대포를 맞아 무너져서 광경이 처참하였다.

 
유성룡은 미리 황해도 방어사 이시언李時言, 조방장 김경로金敬老에게 밀령하여 패하여 달아나는 적군을 추격하게 하였다. 평양을 버린 소서행장 종의지 송포진신 현소 등은 패잔군 수백명을 거느리고 한성으로 향하는데 그들은 마을에 들어가 배를 가리키고 입을 가리켜 밥을 걸식하였으나 조선백성들 중에는 그들을 모해하려는 사람은 없었다.

패장 소서행장은 평양을 벗어나 백천으로 달려와서 백천에 주둔한 흑전장정과 함께 군사를 거두어 가지고 개성으로 돌아와 개성을 사수하려하는 소조천융경을 권하여 황해도 일대에 흩어져 있던 군사를 전부 거두어 가지고 한성으로 들어갔다.

한성에 있는 총대장 부전수가는 평양에서 행장 등의 실패한 전말을 비전 명호옥 행영에 보고하고 일변으로 조선의 동서북 각도에 흩어져 있는 일본 제장을 서울로 불러들였다. 이것은 이여송의 군사가 수십만이라는 소문에 그를 대적하려고 준비함이었다.

마전麻田에 주둔한 장종아부원친, 광주廣州에 주둔한 호

 
전씨번戶田氏繁, 영평永平의 도진의홍, 춘천春川의 도진충풍島津忠豊, 삭녕朔寧의 이동우병, 삼척三陟의 모리승신, 함흥의 과도직무, 안변安邊의 가등청정의 무리가 다 총대장 부전수가의 소집에 응하여 한성으로 모여들어 이여송의 대군을 대항하려 하였다.

예를 들어 말하자면 이순신의 한산도 대첩의 공으로 적병이 평양이북으로 출전하지 못하게 되어 의주이서 요동 산해관 천진 산동山東의 연해 일대가 병화를 입지 않은 것과 동일한 효과를 얻은 셈이었다.

선조는 평양이 회복되매 신하들을 거느리고 평양으로 돌아왔다. 선조는 명나라 제독 이여송을 찾아보고 평양을 회복한 인사를 하고 속히 행군하여 한성을 회복하기를 청하였다. 선조는 어색하여 제신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이 무리들 중에는 아무도 이 처지에 5만

 
대군의 군량을 대어줄 각오를 내는 사람은 없어서 묵묵부답하였다.

선조는 하는 수 없어 유성룡을 부르라 하여 군량을 마련할 것을 정중히 부탁하였다. 유성룡은 명을 받들고 왕명이 지중하고 나라의 처지가 어려우니 곧 평양을 떠나 대동강을 건너서 적군이 아직 있나 없나 모르는 지방을, 더욱이 백설이 분분히 내리는 추운 밤에 종사관 몇 명을 데리고 중화 땅을 지나 새벽이 되어 황주에 다다랐다. 밤새도록 말을 달린 것이었다.

유성룡은 황주에서 황해감사 유영경에게 명하여 도내의 양미를 명병이 행군하여 오는 길에 대령하기를 명하고 평안도 순찰사 이원익에게 명하여 이빈 고언백 김응서 휴정 등 군사 중에 싸움을 감당하지 못할 만한 무리로 하여금 양미를 나르게 하고 또 대동강 하류 3현 5읍으로 배를 보내어 양미를 실어오게 하여 유성룡은 노고를 무릅쓰고 계책을 다하여 군량을 마련하였다.

이여송의 대군이 개성부에 들어간 날짜는 1월 25일이었다. 여기까지 무사히 행군한 것은 실로 유성룡이 군량을 잘 마련하여 끊이지 않게 한 공이었다. 이때 평양에서 패한 소서행장의 군대가 서울에서 말을 선전하기를 평양에서 명군에게 속은 것과 또 명군을 도와 평양의 요로를 인도한 것이 다 조선인의 속임수라 하여 한성에서는 1월 24일에 조선인 대학살이 개시되었다.

조선인 살육 감행한 소서행장

서울에 있던 조선 사람은 특히 일본군에 친밀한 자들을 내어놓고는 하나 아니 남기고 다 살육을 당하였다. 또 시민 관리 할 것 없이 그 살던 가옥도 절반 이상이나 불을 놓아 장안 안이 하루 동안에 초토가 되고 수라장이 되었다. 죽은 사람은 10만이 넘었다.

이 한성에서 이 무고한 창생을 대학살한 흉포한 행위는 일본군의 총대장인 부전수가와 평양에서 패주한 소서행장 등의 만세에 면할 수 없는 죄악이라 아니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한성에 모여들어온 일본제장은 군사회의를 열고 두 가지 방침을 토의하였다. 나아가 명군을 요격할 것이냐 앉아서 한성을 사수할 것이냐 하는 두 가지 문제였다. 마침내 축전수筑前守 소조천융경이 주장이 되고 서대문 밖에 진을 치고 있는 입화종무가 선봉이 되어 명군을 중로에서 맞아 싸우기로 결정을 하였다.

개성에 들어온 명군에도 또 두 가지 문제가 생겼다. 부총병 사대수는 평양승전의 여세를 인하여 급격물실론急擊勿失論을 주장하여 곧바로 한성을 진격하자고 우기고 전세정은 궁구물박론窮寇勿迫論을 주장하여 팔로에 분산되었던 왜군이 필연코 한성으로 모였을 것이니 얕볼 수 없으므로 서서히 전진하여 적의 귀로를 끊자고 하였다. 해빙이 되고 보면 배가 아니고는 군사가 건널 수 없게 되어 자연히 급격할 수는 없게 되는 것이다.

때마침 한성으로부터 사람 하나가 와서 소식을 전하되 한성에 있던 일본군은 명병이 크게 쳐들어온다고 놀라서 반이나 달아났다고 말한다. 이것은 아마 일본군의 보낸 간첩으로서 명병의 마음을 놓게 하는 계책인 듯하였다. 그러나 이 사람의 말은 이여송의 결심을 재촉하는 힘이 있어서 27일에 이여송은 몸소 선봉이 되어 대군의 앞을 서서 급속히 출동하였다.
정리 | 이남석 더 스쿠프 대표 cvo@thescoop.co.kr 자료제공 | 교육지대(대표 장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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