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총론] 뷰티과학시대 개막

용량이 12mL에 불과한 로레알의 마스카라엔 16개의 특허가 들어 있다. 삼성전자가 지난해 출시한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3D 안경에 포함된 특허는 40개다. 작은 화장품에 들어 있는 특허 기술력이 IT기기에 견줄만 하다는 것이다. 그렇다. 화장품은 꾸미는 도구가 아니다. 과학이다.

 
#화장품 세계시장 점유율 1위는? 프랑스 화장품 업체 ‘로레알’이다. 로레알은 또 다른 별칭을 갖고 있는데, ‘특허왕국’이다. 지난해에만 600개가 넘는 특허를 출원했다. 국내 화장품 기업의 최다 특허출원이 300개 미만이라는 점에 비춰보면 대단한 실적이다.

로레알에게 특허는 기술력이자 자부심이다. 창업 104년 동안 전세계 130개국 지사에서 출원한 특허가 3만개에 달한다. 연구개발(R&D)조차 어렵다는 신新물질의 특허출원은 120개나 된다.

로레알의 수많은 특허는 끊임없는 R&D의 산물이다. 이 회사는 연간 매출의 3~4%를 R&D비용으로 쓴다. 2011년 R&D 비용은 7억2000만 유로(약 1조234억원)에 달했다. 연구시스템도 최고다. 전 세계 연구센터 19곳, 평가센터 17곳에선 60여개 국적을 가진 3818명의 연구원이 세계인의 각기 다른 피부와 모발을 탐구한다.

화학자였던 유젠 슈엘라 로레알 창업자는 이런 말을 남겼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화학적 반응만이 창조의 불꽃을 피워낼 수 있다.” 철저한 과학적 검증과 세밀한 분석을 바탕으로 화장품을 만들 때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는 얘기다. 로레알의 성공키워드가 ‘과학’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 프랑스에 로레알이 있다면 한국엔 이지함화장품이 있다. 이지함화장품은 ‘피부과학’ 시대를 국내에 개막한 주인공 중 하나로 손꼽힌다. 약사였던 김영선 대표(당시)는 1994년 개인병원을 개원함과 동시에 코스메틱사업에 뛰어들었다.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창업 2년 만에 ‘피부과학연구소’를 세웠는데, 나름 이유가 있었다. 화장품 시장에서 생존하려면 다른 ‘무언가’가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당시 국내 화장품 업체는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데 집중하느라 화학성분을 원료로 사용했다. 김영선 대표의 생각은 달랐다. 화장품이 빛을 보려면 ‘피부’를 개선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피부과학연구소를 세운 이지함화장품은 피부개선을 위해 2002년 7월 대구한의대(옛 경산대)와 산합협동까지 맺었다. 2005년엔 R&D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피부과학연구소를 대구한의대로 이전했다.

R&D를 중시한 이지함화장품의 철학은 놀라운 결실로 이어졌다. 2006년 ‘무방부제’ 기술을 개발해 특허출원했다. 화학방부제(파라벤 등)를 사용하지 않고 방부효과를 내는 데 성공했다. 탄력을 받은 이지함화장품은 항균효과를 가진 생약조성물 등 3개의 특허를 잇따라 출원했다. 이 회사는 그해 신기술벤처기업으로 국내 최초로 선정됐다. 화장품 업체가 ‘과학’과 ‘개발’로 인정을 받은 것이다. 매출의 6%를 R&D에 투자할 정도로 혁신적인 과학기술 개발에 몰두한 결과다.

국내 화장품이 해외시장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2010년 유로존 재정위기도 국내 화장품의 질주를 막지 못했다. 아모레퍼시픽의 ‘라네즈’는 2009년 4월 프랑스시장에 출사표를 던졌다. 까다로운 심사를 거쳐 글로벌 화장품 매장인 ‘세포라’ 50곳에 입점하는 데 성공했다.

화장품 진수는 과학에서 나와

세포라는 루이뷔통모엣헤네시 그룹이 운영하는 화장품 유통업체다. 라네즈의 프랑스시장 진출은 의미가 크다. 국내 브랜드로는 처음으로 화장품의 본고장인 프랑스시장에 진출했기 때문이다. 화장품 ‘본토’에서 경쟁력을 확인한 라네즈는 2010년 중국시장에 진출해 2011년 한해 1909억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BB크림 돌풍을 일으킨 한스킨의 활약도 빼놓을 수 없다. 2009년 일본시장에 진출한 한스킨은 1년 만에 67억엔(약 1014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일본의 한 홈쇼핑에서는 4시간 동안 17억원을 팔아치우는 진기록도 세웠다. 한스킨의 고공행진은 일본뿐만 아니라 홍콩ㆍ대만ㆍ중국ㆍ싱가포르ㆍ말레이시아ㆍ미국ㆍ유럽국가 진출로 이어지고 있다.

국내 화장품이 해외시장에서 선전하는 이유는 별다른 게 아니다. 제품이 우수해서다. 비결은 첨단과학기술의 적용에 있다. 혹자는 ‘화장품에 무슨 기술이 필요하느냐’고 물을지 모르겠다. 그렇지 않다. 이제 화장품 산업에서 의학ㆍ생물학ㆍ물리학ㆍ공학ㆍ전자학은 필수기술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3㎝가 채 되지 않는 립스틱, 1g도 나가지 않는 파운데이션에 수십개의 특허가 들어있을 정도다. 화장품기업 로레알이 2006년 출시한 마스카라를 보자. 12mL 용량의 마스카라에는 16개의 특허가 들어가 있다. 삼성전자가 지난해 출시한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3D 안경에는 40개의 특허가 포함됐다. 작은 화장품에 들어 있는 특허기술력이 IT기기에 버금간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화장품업체는 어떤 특허와 기술을 보유하고 있을까. 국내 대표 화장품기업 LG생활건강은 사업별 연구소가 있다. 치약ㆍ세제ㆍ샴푸ㆍ비누 등 생활용품에서 출발한 회사답게 인체공학 기술력이 뛰어나다. 1993년 국내 최초로 CGMP(우수 화장품 제조ㆍ품질 규정) 적격업체로 인정받았다. 이를 발판으로 기초와 색조화장품 R&D에 속도를 냈고, 화장품용 기능성 소재 분야를 개척했다. 이 과정에서 화장품 성분이 피부에 효율적으로 전달되는 기능성 소재 개발 연구에 성공했다.

국내 화장품 산업의 쌍두마차인 아모레퍼시픽은 지난해 ‘국내 10대 산업재산권 다출원기업’에 이름을 올렸다. 화장품 기업으로는 유일하다. 이 회사가 지난해 출원한 특허는 229건에 달한다. 그중 아모레퍼시픽의 대표 브랜드 ‘설화수’는 특허의 집합체로 불린다. 1997년 출시한 설화수가 현재 보유하고 있는 한방화장품과 피부 관련 특허는 103건(국제특허 54건)이다. 90여편의 국내외 논문에서도 설화수를 다뤘다.

머드팩 하나로 화장품 신화를 쏘아 올린 코리아나화장품은 천연소재 개발의 강자다. 특히 기능성 천연 신소재 R&D 능력은 해외업체마저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탁월하다. 빈랑자ㆍ예덕나무ㆍ노니ㆍ용안ㆍ메타세콰이어 등 천연소재를 활용해 주름개선 성분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화장품에 과학기술 접목 ‘봇물’

최근엔 한국한방산업진흥원과 손잡고 우방자 추출물을 특허출원했다. 이건국 코리아나화장품 송파기술연구소장은 “우방자 추출물은 염증과 알레르기 억제효능이 있어 3000년 전부터 서양에서 민간치료제로 사용하던 것”이라며 “여기에 코리아나화장품의 기술력을 접목해 기능성 화장품의 성분으로 재탄생했다”고 설명했다.

최근 화장품 시장에서 다크호스로 떠오른 웅진코웨이는 2010년 9월 출시한 리엔케이(Re:NK)로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다. 리엔케이를 발판 삼아 국내 화장품 업계 빅5에 진입하는데 성공해서다. 웅진코웨이의 성장비결도 기술력이다. 피부세포에 에너지를 주입해 노화를 방지하는 이중캡슐 ‘에너셀’은 특허출원을 받았다.

국내 화장품 기업이 처음부터 과학시술을 접목한 건 아니다. 화학성분으로 제품을 제조하던 기업들은 1990년대 중반 이후 과학기술을 접목하기 시작했다. 선구기업은 LG생활건강이다. 당시 시장을 빠르게 넓히던 수입명품 화장품의 위세에 눌린 LG생활건강은 자존심을 되찾기 위해 승부수를 던졌다. 생명공학기술을 응용한 고기능성 화장품을 개발하기로 한 것이다. 그 결과물이 피부과학 제품으로 불리며 연간 2000억원의 매출을 기록한 ‘오휘’다.

LG생활건강은 ‘오휘’를 개발하기에 앞서 한국 여성의 피부를 분석했다. 계절별 피부상태, 연령별 피부변화 주기를 수년간 연구해 통계화했다. 이런 방식으로 모은 자료는 화장품을 만드는 훌륭한 원료가 됐다. 중장년 여성의 성장 호르몬과 유사한 구조를 지닌 ‘스템SP’와 ‘피크노제놀’을 개발한 것이다. 스템SP는 피부 모세포를 자극하는 단백질을 말한다. 피부의 90%를 구성하는 피부 모세포를 활성화하는 역할을 한다. 피크노제놀은 세계 3대 천연 황산화제다. 비타민E보다 황산화 물질이 10배가량 많다. 연구팀은 한발 더 나아가 프랑스 청정 해안에서 자라는 해송 껍질에서 피크노제놀을 채취해 스템SP와 결합했다. 피부 나이를 되돌리는 기능성 화장품의 성분은 이렇게 개발됐다.

LG생활건강의 고기능성 화장품 ‘오휘’의 성공은 국내 화장품산업의 ‘생명공학시대’를 여는 계기가 됐다. 무엇보다 화장품에 주로 들어가던 화학성분을 과학기술로 다시 만들었다. 천연소재 확보경쟁이 뜨거워졌다. 과학기술 활용과정에서 화학반응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화장품산업에 도입된 생명공학은 바이오테크놀러지(성분)과 나노테크놀러지(입자크기) 기술로 확대됐다. 특히 나노기술을 적용한 고기능성 화장품 연구가 활기를 띠었다. 노화방지ㆍ주름개선ㆍ피부개선ㆍ미백 등 획기적인 효과를 기대하는 소비자가 늘었기 때문이다.

▲ 바이오와 나노기술을 접목한 화장품이 출시되면서 뷰티과학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렸다.

과학기술과 한방ㆍ발효기술 결합 유행

나노기술이 다크호스로 떠오르자 신소재벤처기업의 화장품시장 진출이 이어졌다. 2003년 바이오스펙트럼은 식물성 화장품회사인 파이토니와 함께 손을 잡고 순수 비타민C 10%를 함유한 에센스를 출시했다. 비타민C를 은행잎ㆍ소나무ㆍ엉겅퀴ㆍ녹차ㆍ알로에 등 천연식물 추출 성분과 결합해 안정화시키는 기술을 개발해 제품으로 만든 것이다. 비타민C는 미백ㆍ탄력을 유지하는 효과가 있지만 공기나 빛에 쉽게 산화되는 문제가 있었다. 그런데 나노기술 접목으로 해결된 것이다.

나노기술이 적용되면서 각 화장품 업체는 새로운 시도를 꾀했다. 한국메카투라는 2011년 나노기술을 활용해 만든 미세 패치 제품으로 피부 흡수 전달에 성공했고, 더페이스샵은 해양식물줄기세포 성분을 함유한 에센스를 출시하는데 성공했다. 네이처리퍼블릭은 식물줄기세포 기술을 접목한 피부재생 크림을 내놨다.
화장품 산업은 오늘도 진화하고 있다. 과학기술에 동양의 발효과학과 한방성분을 넣는 작업이 한창이다. 대표적인 화장품이 더페이스샵이 2011년 출시한 ‘명한 미인도’다. 이 화장품은 100% 국내에서 재배한 한방물질을 원료로 사용했다. 전통 복합발효 기술인 음양발효법을 적용한 것이다. 특히 피부 노화 예방에 좋은 한방 원료인 칠보미려단에 음양발효기술을 접목한 것은 획기적인 연구로 평가받는다.

조병기 더페이스샵 기술연구소장은 “한방성분의 효모ㆍ유산균에 복합균을 첨가하면 분해•합성 과정이 되풀이된다”며 “이 과정을 거친 한방성분은 피부에 빠르게 흡수된다”고 설명했다.

발효기술을 화장품에 적용하는 이유는 한방성분의 효능을 높이기 위해서다. 발효 미생물이 피부 트러블을 일으키는 독소를 분해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발효ㆍ한방화장품이 피부 방어력을 높이고 항균작용이 뛰어나다.

물론 과학기술로 만들어진 화장품이 풀어야 할 과제는 아직 많다. 나노기술을 활용한 식물줄기세포 화장품의 안전성을 어떻게 담보하느냐가 첫째 과제다. 학계에선 나노기술을 접목한 화장품의 위해성이 한창 논의되고 있다. 손창욱 고려대(피부과) 교수가 발표한 ‘나노 재료의 안전성 평가보고서’에 따르면 인체에 해롭지 않은 원재료도 나노물질로 가공되는 과정에서 인체에 해를 끼치는 물질로 바뀔 수 있다.

동물실험 결과에서도 나노입자의 위해성이 드러났다. 심우영 강동경희대병원(피부과) 교수는 나노입자가 자외선으로 손상된 피부에 쉽게 침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나노기술을 접목한 자외선 차단제 사용에 주의가 요구되는 이유다.

 
식물줄기세포 화장품 안전성 논란

국제사회도 나노기술을 접목한 화장품의 안전성을 우려하고 있다. 국제환경단체 ‘지구의 친구들’과 유럽소비자제품 과학위원회 ‘사이언티픽 컴미티 온 컨슈머 프로덕츠(SCC)’는 나노입자가 피부나 호흡기를 통해 인체에 침투하면 신경세포를 손상시킬 수 있다고 강조한다.

또 다른 문제는 한방ㆍ발효화장품 인기에 편승한 일부 화장품업체의 지나친 상술이다. 일부 화장품기업은 확실한 기술력도 없이 시장에 무작정 뛰어든다. 그러면 한방ㆍ발효화장품의 신뢰가 떨어져 지금의 인기가 한낱 공염불에 그칠 수 있다.

요즘 해외 화장품 업체의 기술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로레알ㆍ에스티로더ㆍ랑콤ㆍ시세이도 등 글로벌 화장품기업은 IT업체에 견줄만한 R&D 연구소를 갖고 있다. 화장품 업계가 최근 들어 ‘특허분쟁’으로 얼룩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화장품은 이제 얼굴을 화려하게 치장하는 도구가 아니다. 과학이다.
김건희 기자 kkh4792@thescoop.co.kr│@kkh47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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