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조정의 편법 ‘부당전직’

경기침체의 늪이 깊다. 이익이 줄어든 기업은 운영비를 줄일 수밖에 없다. 가장 쉬운 방법은 인력을 솎아내는 거다. 하지만 쉽지 않다. 명예퇴직을 시키려 하니 돈이 든다. 명확한 책임소재를 밝혀야 하는 해고는 당연히 더 어렵다. ‘알아서 나가게 만드는’ 부당전직이 활개를 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래저래 노동자는 슬프다.

▲ 경기침체가 이어지면서 고용환경이 불안정해졌다. 회사 측에서 인력감축을 위해 흔히 내미는 카드가 부당전직이다.

대형 출판기획업체 A사에 근무하는 정영훈(32•가명)씨는 최근 회사로부터 부서이동 명령을 받았다. 그가 발령받은 곳은 배포유통부. 정확히 말하면 책 배달직이다. 2년전 경력직으로 입사한 정씨는 그동안 기획팀에서 일했다. 회사에 접수된 원고들을 검토하고 적합한 출판물을 기획•선별하는 게 업무였다. 국문학을 전공한 학력과 3년 전 공동저자로 자기계발서를 펴낸 경력을 인정받았다.

이런 정씨가 터무니없는 인사발령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한 달 전 회사 대표와 가진 면담 때문이었다. 과도한 업무와 짜디짠 급여 탓에 A사 직원들은 불만이 많았다. 1년 전부터는 부서를 가리지 않고 영업할당이 떨어지기도 했다. 간혹 베스트셀러가 터져도 보너스는 기대도 못했고 공휴일에도 특근을 해야 했다.

그럼에도 누구 하나 나서 업무여건 개선을 요구하지 못했다. 보다 못한 정씨가 총대를 멨다. 뜻밖의 면담신청에 당황한 대표는 “전향적으로 검토해보겠다”고 말했고, 정씨는 근무환경이 개선될 것으로 기대했다.

 
면담 일주일 후 대표는 정씨를 따로 불러 “당신과 우리 회사는 성향이 맞지 않으니 그만두라”며 사직을 권고했다. 불공정한 영令이었다. 회사에 가장 먼저 출근해 가장 늦게 퇴근하는 직원이 정씨였기 때문이다. 정씨가 기획한 출판물 중 베스트셀러가 된 책도 있었다. 정씨는 “그럴 수 없다”며 버텼다. 그러자 대표는 “권고사직을 수용하는 조건으로 한 달 치 급여를 위로금으로 지급할 테니 나가라”고 으름장을 놨다. 회사에 잘못한 것이 없다고 생각한 정씨는 이번에도 버텼다. 결국 정씨는 기획부에서 배포유통부로 가라는 인사발령을 받고 말았다.

배포부에서 정씨에게 업무를 인계할 사람은 최진성(28•가명) 사원이다. 가끔씩 정씨를 볼 때마다 ‘선배님’으로 깍듯이 모시던 직원이었다. 그러나 배포부 첫 출근날 최씨가 정씨를 부르는 호칭은 ‘정영훈씨’로 바뀌어 있었다. 정씨를 대하는 다른 직원도 퉁명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정씨는 직원들의 태도가 돌변한 배경에 대표의 압력이 있다는 걸 직감했다.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반발했다간 어떤 부당한 조치가 떨어질지 몰라서다. 오늘 정씨는 수도권 남부 지역 서점을 모두 돌면서 수천권의 책을 배포해야 한다. 무지막지한 업무량 앞에 마음이 답답해 온다.

노동자 두번 죽이는 부당전직

경기침체가 장기화되고 있다. 꽁꽁 얼어붙은 시장이 풀리지 않자 문을 닫거나 인적 구조조정을 꾀하는 기업도 늘고 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해고•전직 등 부당한 인사조치가 끊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중앙노동위원회의 자료에 따르면 2011년 1만848건이었던 부당해고 등 구제신청건수는 2012년 1만1444건으로 늘었다. 올 들어 신청건수는 더 늘었다. 올 4월까지 5168건으로 집계됐다. 고작 1분기가 지났을 뿐인데 지난해 신청건수의 절반에 육박한 셈이다.

 
부당한 인사조치 중 주목되는 것은 부당전직이다. 경영난을 겪는 일부 기업은 절차가 까다롭고 입증을 해야 하는 ‘부당해고’ 대신 ‘부당전직’을 통해 인력을 솎아내고 있다. 정씨 사례처럼 근로자의 의사와 관계없이 엉뚱한 부서로 발령을 내린 뒤 퇴사를 유도하는 것을 ‘부당전직’이라고 한다. 주변에서 귀동냥으로 듣거나 TV드라마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사례다. ‘부당해고보단 낫지 않은가’라고 말하는 이들도 많다. 하지만 부당전직으로 고통 받는 당사자는 ‘안 당해본 사람은 모른다’며 혀를 내두른다.

현행법상 부당전직은 불법이다. 근로기준법 제23조에는 “사용자는 정당한 이유 없이 근로자를 해고•휴직•정직•전직시키지 못한다”고 명시돼 있다. 이 때문에 근로자는 부당전직을 당한 날로부터 3개월 이내에 근무하던 사업장을 관할하는 지방노동위원회에 구제신청을 할 수 있다.

문제는 구제신청을 해도 해결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최우정 리더스 노무법인 노무사는 “지방노동위원회에서 해결이 나지 않으면 중앙노동위원회로 넘어가 재심을 받고, 여기서도 불복하면 행정소송을 진행해야 한다”며 “이 기간만 1년 정도 소요된다”고 말했다. 또한 노동계에선 소송이 2심•대법원으로 이어지면 구제기간은 2년 이상 걸리는 것으로 본다.

더 큰 문제는 근로자가 구제신청을 하거나 소송을 진행해도 이길 확률이 높지 않다는 거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올 1분기 기준 지방노동위 심사에서 근로자의 이의제기가 인정된 비율은 34.6%에 불과했다. 중앙노동위 재심의 경우 인정률은 29.5%로 더 낮아진다. 전직의 경우 원칙적으로 인사권자인 사용자의 고유권한에 속한다고 보는 경향이 짙기 때문이다. 근로자가 부당함을 주장해도 사용자측에서 ‘업무상 필요성’을 내세우며 재량권을 주장하면 이기기가 쉽지 않다는 얘기다.

이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선 입사 당시 근로계약서에 근로의 내용을 약정해야 한다. 그러나 의사나 보일러공처럼 특수직업을 가진 이가 아닌 이상 근로계약 시 업무 내용을 명확히 기재하는 경우는 드물다. 물론 부당전직 판정에 있어 근로자가 유리할 때도 있다. 애초 약정한 근로조건 계약을 사측이 위반했다든지, 전직으로 인해 근로자의 생활상•건강상 심각한 불편을 초래했다면 근로자가 이길 확률이 있다.

그렇지만 승리를 쟁취하는 과정이 녹록지 않다. 부당전직에 불복해 구제신청•소송을 제기한 근로자는 회사를 다니면서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박종천 청담노동법률사무소 노무사는 “부당전직 명령이 떨어졌을 때 출근을 거부하며 싸우려는 근로자가 있는데 이는 매우 위험하다”며 “출근을 하지 않으면 회사 측에서는 근로자의 ‘무단결근’을 문제 삼아 해고 사유를 만들 확률이 높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 부당전직이 일어나면 근로자는 부당전직을 당한 날로부터 3개월 이내에 근무하던 사업장을 관할하는 지방노동위원회에 구제신청을 할 수 있다.
감정적 대응은 자제해야

부당전직은 근로자에게 여러모로 불리한 제도다. 회사를 다니며 사용자와 맞서는 일은 쉽지 않다. 회사와 등을 진 근로자에게 사용자는 절대로 편안한 환경을 만들어주지 않는다. 사내 왕따, 부당한 업무량, 각종 트집 등으로 근로자를 괴롭힌다. 구제신청을 중도에 포기하는 근로자가 적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부당전직이 부당해고만큼 독하다’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노동 전문가들이 “부당전직을 당했을 때 감정적으로 대응하면 안 된다”고 조언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남신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소장은 “부당전직 명령을 받은 후 회사 측의 불합리한 처사에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근로자가 있는데 이는 상황 해결에 도움이 안 된다”며 “사측의 부당 행위를 기록한 내용증명을 보내거나 각종 자료를 수집해 정신적•물질적 피해보상을 청구할 여건을 만드는 게 더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유두진 기자 ydj123@thescoop.co.kr|@allint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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