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당 김기환 선생의 이순신공세가(李舜臣公世家) 제32회

적은 물러가지 아니하여 정히 위급하던 판에 전일 이순신의 조방장이던 충청수사 정걸이 권율의 위급함을 알고 화살과 군량을 배에 실어 산성 절벽 밑에 들어와 구원했다. 이 행주 싸움은 정걸의 화살 보급이 없었으면 실패할 뻔했다. 의외의 원조를 얻은 피폐한 사졸은 100배의 용기를 냈다.

 
계사1593년 2월 12일에 한성에 있는 일본군은 행주산성을 치기로 의결하고 목촌중자, 장곡천등오랑長谷川藤五郞1) 대곡길계의 무리 여러 적장이 2만군을 이끌고 행주산성을 향하여 쳐들어왔다. 권율은 전라도 군사 7000과 방어사 조경이 거느린 군사 3000과 전라도 처영의 승군 1000과 행주산성 부근의 민병 1000과 합 1만2000여의 군사를 가지고 산성에 있었다. 산성 밑으로는 여러 겹으로 목책을 두르고 또 땅을 많이 파서 군사를 감추기에 편리하게 하여 놓았다.

이 고양군 행주산성이란 형승지지2)였다. 남은 한강에 임한 절벽이요, 동과 북은 평야에 임하였으나 역시 절벽이요, 오직 서쪽으로 사람이 통행하는 좁은 길을 이루었다. 산은 크지 아니하나 협곡이 많아서 만여명 군사를 감춰놓아도 밖에서는 잘 보이지 아니하였다.

12일 아침에 척후병이 보고하되 일본군이 행주를 향하여 쳐들어온다고 하였다. 권율은 피하여 달아나려 하였으나 한강에 배가 없어서 권율은 하는 수 없이 오직 사투하기로 작정하고 군사들에게 3번 먹을 밥을 싸주게 하고 몸소 군사들이 쉬는 곳으로 순회하면서 “오늘은 적병을 다 죽이거나 우리가 다 죽거나 할 날이다. 이 세 덩어리 밥을 다 먹고도 적을 파하지 못하면 다시는 밥을 먹을 수 없을 것이다” 하며 격려하였다. 권율은 의승장 처영으로 하여금 승군 1000명을 거느리고 산성 서쪽에 있는 관문을 막게 하고 자기 부하와 조경 등 제장으로 각기 구역을 정하여 지키게 하고 행주의 부녀와 아동들까지도 돌멩이를 주워 나르고 혹은 가마솥에 물을 끓이게 하였다.

이윽고 적군의 선봉 백여 기가 짓쳐들어오고 그 뒤에 대군이 좌우익으로 나누어 밀려오는 것이 보였다. 적군은 홍백청황 등 오색 기치를 수없이 날리고 장수인 듯한 자는 일산을 받치고 얼굴에 각종 귀면 철광대를 쓰고 하여서 별별 기기괴괴한 모양을 한 장졸들이 함성을 치며 달려와서 행주산성을 에워쌌다. 권율은 영을 내려 적군이 목책 밑에 오기까지는 꼼짝 말라고 하였다. 이 목책은 조경이 주장하여서, 권율이 반대하는 것을 우겨서 양해시켜 가지고 조경이 몸소 감독하여 견고하게 세운 것이었다.

이 행주산성이 삼면은 적군에게 에워싸이고 일면은 강인 것을 볼 때에 권율의 삼군 장졸은 달아날 수도 없을 줄을 다 자각하고 다만 죽기로써 싸우자고 서로 맹세하였다.

적군은 점점 산성 밑으로 바싹 대어들 때에 권율은 그제야 칼을 빼어들고 몸소 군사를 호령하여 싸우기를 명하였다. 목책 안과 흙구덩이 속에 숨어있던 군사들이 일제히 총알과 화살을 빗발같이 퍼부어 쏘았다.

이편은 높은 곳에서 몸을 숨기고 쏘는 것이요, 저편은 낮은 벌판에서 몸을 드러내놓고 싸우는 터이라 이편 군사는 사상이 적어도 저편 군사는 최전선에 선 부대는 거의 전멸이 되었다. 그러나 적은 완강하게 계속하여 후계부대로써 보급하여 죽을힘을 다하여 싸웠다. 이리 하는 동안에 적군은 목책으로 육박하였다. 목책 안으로부터 열탕과 시석이 막 퍼부어 눈을 뜰 수 없이 되어 적의 후군까지도 삼대 쓰러지듯 하여 넘어져 죽었다. 해는 석양이 거의 되고 산성 앞 벌판에는 피가 냇물을 이루었다. 이편 군사들도 반이나 죽고 화살도 다하였다. 돌멩이를 나르는 부녀자들도 손에 피가 흘렀다.

적은 물러가지 아니하여 정히 위급하던 판에 전일 이순신의 조방장이던 충청수사 정걸이 권율의 위급함을 알고 화살과 군량을 배에 실고 산성 절벽 밑에 들어와 구원하였다. 이 행주 싸움에 정걸의 화살 보급이 없었으면 실패할 뻔하였다. 의외의 원조를 얻은 피폐한 사졸은 100배의 용기를 냈다.

이 싸움에 가장 참혹하게 싸운 데는 산성 서쪽이었다. 이 산성 서쪽은 절벽이라는 지리적 험고도 없음을 아는 적은 그를 깨뜨릴 수밖에 없다 하여 승군이 지키는 서쪽 협로를 향하여 적군은 9번이나 돌격을 하였다. 승장 처영은 오직 1번 퇴각하여 권율에게 청하기를 승군이 반 이상이나 죽었으니 다른 장수로 교체하여 달라고 하였다.

권율은 듣지 아니하고 노하여 “이 위급한 때에 교체할 여유가 있느냐? 다 죽기로써 싸워라. 이의가 있다 하면 군법으로 시행하리라” 하고 도리어 호령하였다. 처영은 노기를 참고 “그만두오” 하고 끝끝내 악전고투하여 그들은 1000명 중에 900명이 넘게 죽어도 퇴각하지 아니하여 마침내 적으로 하여금 패퇴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그러나 적은 최후의 돌격을 개시하였다. 그들은 시석을 무릅쓰고 횃불을 가지고 돌격하여 목책에 불을 놓을 계획을 썼다. 이편에서는 물을 가지고 불을 껐다. 석양의 해는 서산으로 넘어가 버렸다. 적은 불로 치려던 계획도 수포에 돌아가 성공하지 못하고 수없는 시체를 버리고 총퇴각을 시작하였다. 권율은 책문을 열고 군사를 몰고 나가 적군을 추격하여 무찌르니 적은 서로 밟혀 죽는 자가 태반이다. 약간 추격하다가 쇠를 울려 싸움을 거두었다.

이튿날 아침에 적의 머리 130급을 베고 시체의 사지를 끊어서 그 팔과 다리를 나뭇가지에 걸게 하여 일본군의 한성대학살의 분을 보복하였다. 이 싸움에 군기를 얻은 것이 727건이었다. 조정에서 권율을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조경을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장僧將 처영을 절충장군당상折衝將軍堂上에 올려 그 전공을 포상하였다.

권율은 생각하되 행주산성에서 멀지 아니한 한성에 적의 대군이 있으니 행주의 패보를 들으면 반드시 또 대군이 쳐올 것이라 하여 싸움에 피곤한 군사를 쉬게 위하여 파주산성으로 옮겨가 버리고 백성들도 다 멀리 피하게 하였더니 과연 한성에 있는 부전수가는 권율이 일본군의 시체까지 끊어 나무에 걸어 놓았다는 소식을 듣고 대노하여 소서행장 가등청정 두 장수로 하여금 2만5000군을 거느리고 행주산성을 쳐들어갔다. 빈 성만 있고 사람은커녕 개미도 없다. 적군은 산성에 불을 놓고 그저 돌아갔다.

일찍이 듣기를 해외의 만족蠻族 중에 식인종과 잔포한 종족이 있어 사람의 팔다리를 자르며 해골을 패물과 그릇으로 사용한다 하더니, 지금 보니 임진전란사에 역시 사람의 사지를 잘라내어 나뭇가지에 걸어놓았다는 기록을 보게 되었다. 또, 소수이며 군사상 연습이 부족한 산중 승군으로 적과의 필쟁처를 지키게 하고 자기네들 군사는 험고한 절벽 산상에 안배하여 승군으로 적군의 방패가 되어 적의 9번 돌격에 1000명중 900명이 거의 전멸케 하고, 자기는 이로 인해 성공하여 정이품이니 도원수이니 하는 지위에 올라가니 참으로 장수 한명 성공에 1만명의 뼈가 마름이라. 고로 권율의 용병은 어진 군자의 용병이 아니라 사납고 교활한 장수의 용병이로다.

▲ 2만5000여명의 적군은 행주산성에 불을 지펴놓고 돌아갔다.
행주의 대승첩은 조선 사람에게 또 한 번 새로운 용기를 넣어 주었다. 방어사 이시언 고언백 김응서, 조방장 정희현鄭希玄 박명현朴名賢은 유병遊兵이 되어 해월령蟹月嶺을 막고, 의병장 박유인朴惟仁 윤선정尹先正 이산휘 등은 창릉昌陵 경릉敬陵 사이에[창릉은 예종睿宗, 경릉은 덕종德宗의 능] 숨어서 적군을 엄습하여 적이 많이 나오면 피하고 적게 나오면 격파하여 이 모양으로 전법을 취하여 적군에게 많은 손해를 주었다. 이 때문에 적군이 마을로 다니며 말먹이와 가축 등 군수품을 구하지 못하여 큰 곤란을 입게 되었다.

명 제독 이여송은 대군을 거느리고 평양으로 향하는 길에 평산 땅에서 권율의 행주대첩의 첩보를 듣고 퇴병한 것을 후회하여 평양으로 가기를 중지하고 다시 개성으로 회군하고 싶었으나 유성룡을 대할 면목도 없고 또 장수의 위신에도 관계되어 주저하다가 평양으로 간 것이었다.

임진1592년 4월로부터 일본군 수륙 약 15만이 부산포에 건너온 이래로 개전한 지 만 1개년 동안에 일본군이 조선 7도에 가득하였으므로 병란이 쓸고 간 연로에는 백성들이 두해를 걸쳐서 농사를 못 짓고 하여서 충청 경기 황해 각도에는 양식이 떨어졌다. 백성들도 곤란할뿐더러 한성에 있는 일본군도 군량이 끊어져

말이 못되었다. 한성에 있는 일본군의 수자는 이러하다.

석전삼성石田三成(이시다 미쓰나리) 1600인
대곡길계大谷吉繼(오타니 요시쓰구) 1500인
증전장성増田長盛(마시다 나가모리) 1700인
이상 삼봉행三奉行의 군사가 합 4800인
가등광태加藤光泰(가토 미쓰야스) 1400인
전야장강前野長康(마에노 나가야스)3) 700인
이동우병伊東祐兵(이토 스케타카)4) 600인
가등청정加藤淸正(가토 기요마사) 7500인
과도직무鍋島直茂(나베시마 나오시게) 7600인
소조천융경小早川隆景(고바야카와 다카카게) 5000인
소서행장小西行長(고니시 유키나가) 6700인
길천광가吉川広家(깃카와 히로이에) 600인
흑전장정黑田長政(구로다 나가마사) 5500인
부전수가浮田秀家(우키다 히데이에) 6000인
이상 총계가 5만1400인

▲ 이순신의 조선수군을 가장 무서워한 일본군사는 항만 심처에 배를 감추고 몸을 감추는데 급급했다.
이 5만여의 대군이 제일로 견디기 어려운 것은 군량이 떨어진 것이었다. 벽제관 싸움이 있던 그날 밤에 이여송의 아우 이여매가 사대수를 데리고 밤중에 행군하여 한성 남대문밖 10리쯤에 있는 용산창龍山倉을 적군이 모르게 습격하여 적의 군량미 10여만석을 불을 질러 태워버렸다. 그 뒤로 일본 명호옥 행영에서 군량을 염려하여 보내는 군량선은 경상도 연해에서 조선바다의 왕 이순신이 모조리 탈취하며 또는 불살라버려서 한성에 있는 일본군은 기아에 견디지 못하게 되었다.

일본제장들은 대낭패를 보는 중에 석전삼성 증전장성의 무리는 선언하되 군량이 오지 못하니 부산 방면으로 가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다 하고, 가등광태는 분연히 한강의 모래를 먹을지언정 조선의 서울 한양은 버릴 수 없다고 우기고, 가등청정같은 무장은 이여송의 군량을 탈취하여 먹자고 큰소리를 하여 장차 어찌할 방침을 정하지 못하여 정히 위급한 기회에 처하였다.

전쟁보다도 더 무서운 것은 먹을 식량이 없는 것이다. 난리로 만연하여 농사도 못 지은 경기도 일대의 백성들은 계사년 춘궁기를 당하여 굶어죽은 시체가 길가에 이어졌다. 체찰사 유성룡이 동파에 있다는 말을 듣고 기근에 못 견디는 백성 수만명이 동파로 모여들었다. 유성룡은 한강으로 들어온 전라도 피곡5) 몇천석을 풀어 전 군수 남궁제南宮悌로 하여금 감진관監賑官을 삼아 주린 백성을 구제하게 하였다. 남궁제는 기민들로 하여금 솔잎 가루를 만들어 쌀가루 한 홉에 솔잎 가루 한 되씩 섞어 물에 타서 먹게 하였다. 이 방법으로 하여도 많은 피난민을 다 먹일 수는 없어서 곤란한 정세는 이루 형언할 수 없었다.

한성에 있는 일본군의 형편은 군량으로 하여서 혼이 났던 판에 좋은 기회가 생겼다. 화의를 붙인다고 심유경인지 낮도깨비인지 하는 작자가 또다시 한성에 나타났다. 명 제독 이여송이 평양으로 물러간 뒤에 일본군의 전투세력이 상당히 강한 줄을 깨닫고 싸우기보다 강화를 붙인다 하여 심유경을 한성에 보내어 부전수가와 석전삼성 등을 만나서 “일본이 조선의 두 왕자 이하 여러 신하를 돌려보내고 일본군이 한성에서 물러가면 조선의 남삼도[경상도 전라도 충청도]를 수길의 영토로 할양하여 주겠다” 하는 것이었다. 일본장수들은 그렇지 않아도 군량 떨어진 것이 무서워서 두말없이 허락하고 군사를 거두어 경상도 연안으로 내려가기로 명호옥 행영에 보고하고 한성을 비워주고 속속 출발하였다.

심유경의 이번 강화 조건은 군량이 떨어져 낭패 당한 일본군에게 편의를 돌보아 준 셈이 되고 만 것이었다. 심유경과 이여송이 제멋대로 남삼도를 허락하고 조선정부에는 알리지 아니하였다. 그것은 유성룡 이하 조선대관들은 화의를 절대로 배척하는 통에 감히 입 밖에 이 말을 내지 못하였다는 것이었다.

마침내 이여송과 부전수가의 사이에 화의인지 하는 것이 성립되어 계사1593년 4월 19일에 일본군은 남으로 철수하고 20일에 명군이 한성에 들어왔다. 철수하는 일본군은 경상도에서도 전라도에 가까운 우도 연해안은 이순신의 세력범위이니 무서워서 갈 수 없어 오직 부산 울산 방면으로 내려갔다. 부산만 가도 고국이 가깝다는 생각에 돌아가려는 마음이 급하여 아무 난후병6)도 두지를 아니하고 우선에 배가 고파서 주야로 달려서 내려간 것이었다.

유성룡은 이여송을 권하되 일본군이 돌아가려는 마음이 바빠서 필연코 후방을 지키는 병사를 두지 아니하였을 듯하니 급히 진격하면 소서행장과 부전수가를 가히 사로잡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여송은 내심에 일본군의 전술이 무섭기도 하고 또 화의하기로 했다가 신용을 잃을까 하여 주저하다가 못한다고는 못하여 그 아우 이여백을 보낸다고 하더니, 이여백은 한강을 건너가서는 병이 났다고 핑계하고 도로 나와 버렸다.

 
파주산성에서 서울로 입성한 권율은 선거이로 선봉을 삼아 추격하려 하였는데 이여송이 이를 방해하여 유격장군 척금을 한강으로 보내어 한강의 나룻배를 통행하지 못하게 잡아매어서 선거이도 강을 건너지 못하여 유성룡의 계책이 실행되지 못하였다. 이때에 요동에 있는 경략사 송응창이 일본군이 한성을 떠난 줄 알고 이여송에게 추격하기를 명하였다. 이여송은 앉아서 배길 수 없어서 부득이 출발하여 조령을 넘어가서 일본군이 이미 멀리 가서 추급하지 못하였다는 말로 송응창에게 보고하고, 중국에서 새로 나온 사천성四川省 총병 유정劉綎을 성주로 보내어 지키게 하고, 오유충은 선산으로 보내고, 조승훈 갈봉하는 거창으로 보내고, 낙상지 왕필적은 경주로 보내고, 이여송은 서울로 돌아왔다. 이여송은 벽제관 일전 후로는 수하 정병과 용감하던 가정家丁을 잃고 그만 풀이 죽어 싸울 의지와 기개는 사라진 모양 같았다.

일본제장들은 부산해안 각처로 내려온 뒤에 군량은 저희들 본국인 명호옥 적마관赤馬關 등지로부터 실어왔다. 울산 서생포西生浦에 시작하여 동래 기장 좌수영7) 부산 양산 김해 웅천 거제 영등포까지 뻗쳐 나가며 모두가 열여섯 곳의 주둔지를 벌여서 성채를 쌓고 소굴을 만들어 자리를 차지하였다.

일본군이 최초에 조선에 나온 9진의 육군 수가 13만8000여 인이요, 두 진의 수군 수가 2만여 인이요, 그 뒤를 이어 나온 수군 수가 4만여 인이요, 전년 10월경에 진주성을 치려고 세천충흥의 무리 7장이 거느리고 나온 별동대가 2만인이요, 금번에 평양의 패보를 듣고 나온 3봉행과 기타 이달정종의 무리가 거느리고 나온 군사가 6만6000여 인이나 된다니 전후 합계 수륙군이 25만이란 수에 달하였다. 그러나 지금 남아 있는 육군이 한 6•7만이라 하니, 그렇다면 그동안에 일본군은, 수군은 이순신의 함대에게 부서지고 육군도 진주의 김시민 이치의 황진 연안의 이정암 웅치의 정담 평양의 이여송 길주의 정문부 행주의 권율 등과 여러 차례의 싸움에서 격파되어, 죽은 자가 합하면 10여 만이란 수를 돌파한 것이다. 비단 전쟁에 죽은 것뿐만 아니라 질병과 도망으로 인하여 줄어든 것이 또한 많았을 것이었다.

일본군사가 이렇게 죽었을 때에는 물론 조선 사람은 100만이 훨씬 넘는 수자로 죽었을 것이라고 추측함이 옳을 것이다. 한성이 회복된 뒤에 명나라에서 조선의 기근을 구하기 위하여 황제는 산동미山東米 10만석을 새로 내어 보내고 또 명병의 군량으로도 많은 양미가 나와서 조선백성에게 그 혜택이 미친 것이 많았으며 더구나 명나라 장수 사대수는 자선심이 있는 장수라 자기의 봉록 전부를 가지고 조선의 굶주린 자들을 구제하고 제독 이여송도 그 봉록의 반을 떼어 가지고 백성을 구하였다. 이런 행위만은 아름다운 행적이라 아니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때 부전수가의 진은 부산에 있어서 제장을 지휘하고 가등청정의 진은 울산 서생포에, 소서행장의 진은 웅천에 있었다. 그 병력은 총세 6만여인이었다. 조선장수로서는 수군대장인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총세력인 5만여인이 한산도에 웅거하여 일본군과 대치하였는데 그 백전의 위세가 당당하였다. 그 세력은 이러하다.

이순신의 좌수영 수군이 6000인
그 관하 5읍6진의 군사가 합계 1만5000인
이억기의 우수영 수군이 6000인
그 관하 각읍 각진의 군사가 합계 1만4000인
원균 및 그 관하 합계가 9000인
이상 이순신의 삼도 세력이 총계 5만인이었다.
조선육군으로는 도원수 김명원의 군사가 1000인, 순변사 이빈의 군사가 1000인, 조방장 곽재우의 의병이 1만3000인인데 모두 의령에 진을 치고 있었다. 이는 곽재우의 대군을 의지함이었다.

일본군사가 경상도 부산포 근해의 연안 일대로 내려온 뒤로는 이순신의 조선수군을 가장 무서워하여 항만 심처에 배를 감추어 순신의 예봉을 피하여 수세를 취하고, 육로로는 간간이 병사를 움직여 공세를 취하였다. 군략상으로 이렇게 되어 경주와 진주의 싸움이 일어났다. 가등청정이 지난 임진1592년 4월에 서울로 출정할 때에 경주성을 점령하고 그 부하장수인 판천채여坂川采汝8)에게 성을 지키게 하여서 지금까지 수비하고 있었다.
정리 | 이남석 더 스쿠프 대표 cvo@thescoop.co.kr 자료제공 | 교육지대(대표 장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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