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해汝諧로 살아간 이순신李舜臣 ①

▲ 예나 지금이나 현장의 목소리는 현장 밖에 있는 상관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제게는 늙은 어머니가 계신데, 올해 나이 여든하나입니다. 임진년 초에 다행히 별일 당하지 않고, 목숨을 보존하셨습니다. 바닷길을 이용해 남쪽으로 내려가 순천 지방에 거처를 정하고 사셨습니다. 당시는 저희 모자가 단지 서로 만났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여겼을 뿐 다른 생각이 없었습니다. (중략)
얼마 전 집에서 인편으로 편지를 보내왔는데, 어머님이 “날로 늙은 몸에 병이 깊어가니,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모양”이라며 “죽기 전에 네 얼굴을 한 번만이라도 보고 싶구나”라고 하셨습니다. 남이 이런 얘기를 듣더라도 눈물을 흘릴 텐데, 하물며 자식인 제 마음은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어머니의 편지를 본 뒤로는 마음이 산란하여 다른 일에 정신을 쏟을 수가 없습니다.
지난 계미년癸未年(선조16), 제가 함경도 건원乾元 권관權官으로 있을 적에 아버님이 돌아가셨습니다. 급히 먼 길을 달려갔으나, 임종을 지키지 못하여 평생의 통한이 되었습니다. 이제 어머님이 연세가 많아 돌아가실 날이 서산에 걸려 있습니다. 만일 어느 날 갑자기 돌아가신다면 저는 또다시 불효자가 될 것이며, 어머님은 지하에서도 눈을 감지 못하실 것입니다. (중략)
어머님을 찾아뵙고 올 수 있도록 허락해주십시오. 봄에는 방비를 더욱 철저히 해야 하므로 도저히 진陣을 떠날 수 없을 듯합니다.
- 「대장부의 삶」, 역사의 아침

당시 체찰사體察使는 오리梧里 대감 이원익(우의정)이 겸하고 있었다. 진영陣營을 떠나 잠시 ‘어머님을 찾아뵙고 올 수 있도록 해 달라’는 휴가신청서를 낸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였다. 해군총사령관이 국방장관에게 휴가를 다녀오겠다고 알린 셈이다.

삼도수군통제사는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 후 경상•전라•충청 3도의 수군을 총지휘할 직책이 필요하다 해서 만들어진 수군 총 지휘관이다.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 이순신이 겸하고 있었다. 이순신과 함께 7년간 전장을 누빈 당시의 육군사령관이자 합창의장은 도원수 권율權慄이었다. 명령 계통이 체찰사, 도원수, 삼도수군통제사로 이어졌으리라. 권율이 열 살이 많고, 이원익은 두살 아래다. 이런 관계에서 우호와 협조, 갈등과 대립이 없었을까.

순천집(어머니가 계신 곳)에서 온 인편 편지를 받아들고 상관인 이원익에게 휴가신청서를 쓰는 쉰둘의 이순신은 애간장이 탔을 것이다. 하지만 이원익은 허락하지 않았다. ‘사정은 이해가 되지만 나랏일이 먼저’라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이원익이 휴가신청을 거절할 땐 ‘전시’가 임박한 상황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임유경 대구가톨릭대(국어국문학) 교수는 이순신이 이 편지를 ‘1596년 겨울에 썼으리라 짐작된다’고 했다. 그 이듬해에 정유재란이 일어난 사실을 감안하면 앞뒤가 맞는 얘기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2~3일 휴가를 다녀오겠다’는 이순신의 판단이 옳았을지 모른다.

문제는 높으신 양반들과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의 해석이나 관점이 차이가 난다는 거다. 대한민국도 다를 바 없다. 현장 밖에 있는 사람들의 귀에는 현장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얘기다.   <다음호에 계속>
심상훈 고전경영아카데미 원장 ylmfa9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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