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당 김기환 선생의 이순신공세가(李舜臣公世家) 제33회

임진1592년 4월로부터 전란이 난 이래로 1년 동안 좌수사 이순신은 자기의 본영 창고 내 별도로 정미 500석을 저축해 봉해 두고 헐지 않았다. 부하제장들이 연유를 물으니 “신하로서 충성이 부족해 사직을 지키지 못하고 성상이 파천했는데 어찌 편히 지낼 수 있는가”말했다. 제장들이 이 말을 듣고 감복해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울산의 좌병사 박진이 밀양에서 실패하고 다시 일어설 힘이 없게 되었더니 후일1) 기회를 타서 다시 민병 수천명을 모집하여 가지고 경주성으로 진격하였다가 참패를 당하여 의병장 김호 등까지 적과 주기로 싸우니 서천西川의 물이 붉게 물들었다.2)

박진은 안동으로 달아나 숨어 있는 동안에 이장손의 비격진천뢰를 얻어서 제조하여 가지고 군사 수천명을 모집하여 조방장 권응수 판관 박의장으로 선봉을 삼아 다시 경주를 공격하였다. 비격진천뢰를 성안으로 발사하였더니 일본 군사가 공중으로부터 떨어진 진천뢰를 모여서서 들여다보다가 진천뢰가 굉장한 소리를 내고 수많은 철환이 터져 나와 30여인이 한꺼번에 즉사하였다. 이 무서운 진천뢰가 계속 떨어지는 통에 일본 군사가 배겨낼 수 없어서 성을 버리고 울산 서생포로 달아나 버리고 박진은 경주성을 회복하였다.3)

일본의 태합 풍신수길은 출정 제장의 보고를 받고 심유경의 말대로 조선의 남3도를 할양한다는 것을 보증 확인하기 위하여 명나라 황제에게 표문을 올리고 포로로 사로잡은 조선의 2명의 왕자를 돌려보내기로 허락하고 화약을 정하여 전쟁을 거두려 하였다. 수길의 표문表文에는 이러한 구절이 있었다.

上聖普照之明 無微不悉 下國幽隱之曲 有求則鳴 欽惟皇帝陛下 天佑一德 日淸四方 皇極建而舞干羽于兩階 聖武昭而柔遠人于萬國 皇恩浩蕩 遍及遐方之蒼生 日本眇微 咸作天朝之赤子 屢托朝鮮而轉達 竟爲秘隔而不通 控訴無門 飮恨有日 增重鼎呂 共作藩籬之臣 豈愛髮膚 永獻海邦之貢

황제의 밝은 빛은 작은 것도 비추니 저희의 숨은 사정도 알고자 하시면 울림이 있을 것입니다.… 공경히 생각건대 황제 폐하는 하늘이 한결같은 덕을 도와서 날로 사방을 밝히셨습니다. 도리를 세워서 양 계단에서 간우4)를 춤추자 성무가 드러나서 만국의 먼 곳 사람을 회유하셨습니다. 황제폐하의 은덕이 넓어서 멀고 가까운 곳의 창생에게 두루 미치매 일본 같은 작은 나라도 모두 천자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여러 번 조선에 부탁하여 전달하여 달라 하였으나 끝내 숨기고 통해 주지 아니하매 호소하려 하여도 길이 없어 원한을 품은 지 오래입니다.… 신 수길은… 정려5)보다도 더 무겁게 생각하여 함께 속국의 신하가 될 것이니, 어찌 몸을 아끼겠습니까. 영구히 바다지방의 공물을 바칠 것입니다.…

한편, 이때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한산도에 자리를 잡고 이억기 원균과 더불어 한성으로부터 퇴각하는 일본군을 일본으로 도망하지 못하게 수로를 단절하여 격멸하려고 계획을 정하였다. 탐망선의 보고에 의하면 울산으로부터 기장 동래 양산 김해 웅천까지 모두 16개 주둔지가 있고 그 군사의 형세가 날로 증가되며, 병선도 그 수가 무려 500여 척이나 되는데 배를 깊은 포구 안에 감추어 두었다고 하였다. 순신은 생각하되 이것은 반드시 명나라 병사가 남쪽으로 내려옴으로 적들이 도망해 내려온 것이라 하여 이에 삼도의 주사를 느리고 가덕도를 거쳐 웅천의 웅포6)로 진군하였다. 웅천은 소서행장이 유둔한 곳이었다.

순신의 함대는 선창에 열박하고 있는 적선에게 도전하였으나 소서행장은 일찍부터 이순신의 위세를 무서워하여 감히 바다로 나오지 못한다. 매번 경쾌선 5ㆍ6척으로 포구 경계 내에서 못 들어오게 쫓다가 도로 항구 안으로 들어가고, 양쪽 동서 산록에 포대를 쌓고 군사를 나누어 지키고 기치를 세워놓고 총을 방사하여 비 오듯 퍼붓는다. 이것은 소서행장 종의지의 군사가 새로 와서 주둔한 진이었다. 육전에 사용하던 새로운 전술이 많았다.

순신은 제장을 지휘하여 함대를 좌우로 갈라가지고 일제히 들어가게 하고 천지자 대포와 각양 화살을 일시에 방사하니 그 형세가 풍뢰와 같았다. 이렇게 하기를 3`~4차나 들고나고 하매 적군들이 이편 사격에 사살되어 엎어지는 자가 부지기수였다. 좌별도장 이설과 귀선돌격장 이언량이 적선을 3척이나 깨뜨리고 적군 100여명을 쏘아 죽였다. 그중에 황금 투구에 붉은 비단 갑옷을 입은 적장이 종의지가 아니면 소서행장일 듯도 한 장수가 있어 크게 부르짖고 나와 싸우다가 이편의 피령전에 맞아 거꾸러진다. 달려가 거의 벨 뻔하였더니 그 배가 깊이 들어가므로 끝까지 추격하기 어려워 회군하였다. 날은 벌써 황혼이 되어간다.

조선함대 두려워하다 포탄 맞은 日수군

▲ 이장손이 준비한 진천뢰가 떨어지자 일본 군사가 성을 버리고 울산 서생포로 달아났다.
순신은 그날 밤에 이억기 이하 제장을 불러 군사회의를 열고 내일의 전략을 토의하였다. 순신은 “일본 수군이 우리 함대를 두려워하여 감히 나와 항전하지 못하고 시종 험지에 의거하여 깊은 항내에 배를 감추었으니 실로 섬멸할 도리가 없으나, 포구 안을 조사한즉 전선 7ㆍ8척은 가히 용납할 만하니 내일은 이렇게 하라”고 분부하였다. 그 이튿날 삼도 주사가 각기 쾌속판옥선 5척씩을 내어놓아 합 15척으로써 적선 다수가 열박하고 있는 포구 안을 번갈아 들어가 돌격하여 지현자 대포를 쏘아 거반이나 깨뜨리니 적군도 이편의 포탄에 사살된 자가 수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순신은 자기의 휘하인 삼혜와 의능의 승군과 삼도의 용맹한 사부射夫를 실은 배 10여척을 명하여 동은 안골포 서는 제포에 보내어 육지에 올라 진을 이루게 하였다. 이는 자원 출전코자 하는 수군 육전대였다. 저편 군사들은 이편 육전대의 상륙하는 것을 보고 정녕코 수륙으로 협공할 것이라 하여 동서로 달려들어 응전을 한다.

이편의 사부와 의승군은 포와 활을 쏘며 창과 칼을 휘둘러 종일 교전하니, 아군은 병선의 엄호를 받아서 죽거나 다친 자가 없었으나 적군은 죽은 자가 많았다. 이 싸움에 사도첨사 김완과 우별도장 이기남과 판관 김득룡金得龍 등을 증원부대로 참가시켜 적군에게 큰 타격을 주고 적에게 포로가 되었던 웅천의 수군 이준련李準連, 양민 여인 매염梅艶 염우廉隅 윤생允生과, 김해의 양민 여인 김개金介, 거제의 양민 여인 영화永化 등을 구해냈다.

포로로 잡혀 있던 우리 남녀들을 문초한즉 다 말하기를 “근일에 사또의 군사와 접전한 이래로 화살과 대포의 철환에 맞아서 중상된 자가 부지기수이고 죽은 자도 많았소. 또 금년은 정월이래로 전염병이 적군 중에 크게 돌아 날마다 죽는 자가 끊이지 않았소” 하고 적의 사정을 상세하게 고하였다. 순신은 군을 거두어 한산도를 향하여 승전고를 울리며 회군하였다.

며칠이 지난 뒤에 순신은 군사의 예기를 길러 가지고 다시 전함대를 거느리고 또 웅천의 소서小西 협판脇坂 관야菅野 등의 적 주둔지를 진격하였다. 삼도의 병선은 진해만을 덮어 와서 위무를 자랑하였다. 적군은 이것을 탐지하고 깊은 항만 속에 배를 숨기고 수길이 전에 명령한 바와 같이 이순신의 수군과는 싸우지 않을 작정이었다.

순신의 군사는 종일 도전하여도 적은 전일의 참패를 경계하여 포구 안에 숨어서는 나오지를 아니한다. 이편 함대는 포환과 시석으로 형세를 갖추고 좌우에 있는 산록의 포대를 비격진천뢰로 쏘았다. 이것은 이장손의 제법을 모조한 것이었다. 적진 중에 이 진천뢰가 터져서 사상자가 무수하였다. 그러나 적은 육지에 있고 우리는 배에 있어서 수급을 벨 수는 없다. 이 싸움에 경상도 복병장伏兵將이 적군 2명을 생포하여 왔다.

비격진천뢰라는 무기는 충무전서를 상고하면 박진보다 이순신공이 더 먼저 사용하였다. 그 사용한 연월일자가 그러하다. 독자는 국사와 충무전서를 고찰한 뒤에 판단하라.

영진무 공대원은 일본말을 잘하기 때문에 순신의 명령을 받아 아까 생포하여 온 적군 2명을 문초하였다. 하나는 송고로宋古老라 하고 또 하나는 요사여문要沙汝文이라 이르는 자인데 일본 이세伊勢지방에 산다 하고 진술 내용이 교활하고 말이 반복이 많아서 믿을 수가 없어서 도저히 항왜로 기를 수가 없다고 고하므로 군문에 내어 베었다.

이순신은 부하 삼도 제장과 더불어 산과 바다에 맹세하기를 적의 노 하나와 갑옷 조각이라도 돌아가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그 귀로를 끊어버릴 결심이었으나 명나라 병사의 소식은 묘연하여 알 수도 없고 우리 육군에서도 상당한 장수다운 이가 없어서 각 둔에 산거한 적세는 여전히 치장한즉 도저히 육군의 협력이 아니고는 항만의 깊은 곳에 틀어박힌 적군을 몰아낼 수가 없어서 섬멸할 기회가 막연한즉 한탄할 일이라고 기록하였다.

한편, 이때 진주성은 지난해 10월경에 수길의 명령을 받아 세천충흥의 무리 7명의 장수가 2만 군사를 거느리고 치다가 김시민의 전략에 참패당하였으므로 풍신수길은 일본무사의 위신이 경상도 연안에서 수륙으로 꺾였다 하여 크게 노하여 “금번에 일본 제장이 경상도 연해안으로 모인 기회에 한산도는 이순신이 있으니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진주성만큼은 도륙하여 분을 풀게 하라”는 명령이 내렸던 것이었다. 그렇게 되어 총대장 부전수가와 모리휘원의 지휘로 10여명 장수가 6만 대군을 거느리고 수륙병진하여 진주성을 목표로 짓쳐들어온다. 수군은 오다가 견내량목에서 이순신의 주사에게 가는대로 다 격퇴되고 말았다.

진주성 안에는 충청병사 황진, 진주우병사 최경회, 창의사倡義使 김천일, 진주목사 서예원, 김해부사 이종인李宗仁, 사천현감 장윤張潤, 복수장復讐將 고종후高從厚, 거제현령 김준민金俊民 등 여러 장수가 모여들었으나 군사는 모두가 겨우 2만이요 백성은 남녀노소 4만이 넘고 군량은 수만석이 넉넉하게 있었다. 황진은 용맹이 삼군에 으뜸이 되는 유명한 장수였다.

이때에 도원수 김명원ㆍ순변사 이빈ㆍ전라감사 권율ㆍ방어사 선거이 등 제장이 각기 부하 군사를 거느리고 진주성을 성원하기 위하여 함안군에 진을 치고 진주로 가는 길목을 막다가 적의 선봉 청정과 행장의 군사와 싸워서 하루 만에 다 무너져 패퇴되었다. 달아나기 잘하는 김 도원수가 맨 먼저 달아나고 이빈 순변사라는 분도 그 다음에 달아나고 그러니깐 권율의 군사도 싸울 용기를 잃어버려 3번째에 달아났다. 선거이는 제일 나중에 뒤를 담당하여 싸우면서 물러나 강을 건너 의령현으로 퇴각하였다.

대군 거느리며 진주성 쳐들어온 적군

▲ 소생천 1척을 상실하고도 표문을 올려 벌을 기다리는 이순신의 태도에 사람들이 그를 모두 인정했다.
의령 땅으로 물러난 제장은 진주성을 구원할 군사회의를 개최하였다. 그 석상에서 순변사 이빈이 본도 의병장 곽재우로 하여금 진주성을 구함만 같지 못하다 하였으나 곽재우는 작은 성으로 어찌 막강한 적을 당해내느냐고 하며 만일에 성에 들어가기만 하면 원조가 끊어져서 함몰이 되고 말 것이라 하여 종시 수긍하지 아니하였다. 군사회의가 있던 그 다음날에 적병은 의령 정진을 범하여 크게 쳐들어온다. 곽재우는 싸우지도 아니하고 퇴각하여 달아났다.

이빈 권율 선거이 등도 다 패주하여 전라도 운봉雲峰으로 넘어가 멀리 피하여 버렸다. 진주성에 웅거한 창의사 김천일은 황진 이외 여러 장수와 약속하여 “진주성은 호남을 막아주는 병풍과 같은 곳이요, 호남은 금일 국가의 근간이니 이 성을 사수하지 않을 수 없다”고 다짐하고 수성할 기구를 준비하였다. 또 대구에 주둔한 명나라 장수 유정에게 구원을 청하였더니 이 작자는 싸우기를 무서워하여 관망만 하고 원조하기를 아니하였다. 일본 장수들은 유정의 구원병이 오기 전에 급히 치기로 하였다. 9일 동안에 밤낮 100여번을 싸웠으나 성 위에서는 끓는 물을 내려퍼붓고 큰 돌멩이와 굵은 나무를 굴려 내려서 범접을 못하게 하였다.

성은 참으로 난공불락의 견고한 성이며 방어하는 전술도 완강하여 일본군은 매우 초조하던 판에 흑전장정의 부장 후등기차後藤基次(고토 모토쓰구)가 계책을 내어 군사 10여명을 생우피生牛皮로 몸을 싸서 수레로 운반하여 성 밑에 대고 쇠갈고리로 성 돌을 찍어 빼어내기 시작하였다. 혹은 이 계책은 가등청정이 안출한 계획이라고도 한다. 성 위에서 조선군이 끓는 물을 내려부어도 생우피를 입은 적병에게는 효력이 없었다. 성 돌이 빠진 뒤에 여름철 장마로 인해서 물에 젖은 성벽이라 성 돌이 빠진 데가 무너졌다. 일본군은 아우성을 치며 일시에 성 안을 향하여 수만 장졸이 성난 파도와 같이 돌진하였다.

성의 대장이던 황진이 용감하게 싸워 적군 수백명을 베었으나 적의 총알에 맞아 전사하고 장윤이 황진을 대신하여 맹렬히 싸우다가 역시 탄환을 맞고 전사하고 이종인이 또 장윤을 대신하여 10여명을 베고 장렬히 싸워 죽었다. 그밖에도 여러 장수들이 최후까지 싸워서 전사하였다. 성 안에 있던 1만여명 군사와 4만여의 백성이 당일에 함몰이 되었다. 김천일ㆍ최경회 등 여러 장수들은 촉석루矗石樓에서 북향사배하고 남강南江에 몸을 던져 절사하였다.7)

진주성을 점령한 일본장수들이 촉석루에 모아 앉아 승전축하를 하는 날에 진주기생 논개論介라는 미인이 남강 언덕에 있는 촉석 위에서 가무하는 것을 보고 적장중 한 사람이 그 아름다운 모습을 탐하여 취중에 쫓아가 잡으려 하다가 논개가 그 장수의 허리를 안고 남강 물에 몸을 던져 장수와 미인이 같이 죽은 일이 있었다.

논개란 관기는 본래 전라도 장수현 사람이다. 장수현에 옥녀봉玉女峯이란 산이 있어 산봉우리가 수려하여 풍수 보는 사람이 “이 산 아래에 절대명주絶代名姝가 날 것이라” 하더니 논개가 과연 옥녀봉 아래에서 태어났다. 재주와 용모와 가무가 매우 뛰어났다. 어느 날 연회석상에서 창의사 김천일이 논개더러 “나의 수성하는 방략이 이전의 김시민 공과 어떠하냐?” 하였다. 논개는 답하되 “지금 군심이 통일되지 못한 점으로 보아 상공이 아마도 전 사람에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더니 김천일이 노하여 베려 하다가 그 재모를 아껴 용서하였다. 논개는 심중에 냉소하였다. 급기야 성이 함락된 뒤에 마침내 촉석암에 낙화가 되어 아름다운 이름이 만고에 길이 전하고 있다.

순신의 말에 감복한 제장들

 
임진1592년 4월로부터 전란이 난 이래로 1년 동안에 좌수사 이순신은 자기의 본영 창고 내에 별도로 정미 500석을 저축하여 봉해 두고 헐지 아니하였다. 부하제장들이 의심이 나서 그 용처를 물은즉 순신은 “신하된 우리는 충성이 부족하여 사직을 지키지 못하고 성상이 파천하시어 방금 용만에 머무르셨다. 만일에 평양에 있는 적군이 의주를 범한다 하면 대가는 장차 바다를 건너실지라. 그러하므로 나의 책임은 용주9)를 준비하여 서해로 가서 대가를 맞아 호위하고 싶다. 황천皇天이 우리나라를 망하게 아니하면 우리 신하 된 자는 힘을 다하여 회복을 도모할 것이요, 비록 불행할 지라도 군신이 내 나라 땅에서 함께 사직에 죽는 것이 옳지 않느냐?” 하여 그 말이 비분강개하였다. 제장들이 이 말을 듣고 감복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하였다.10)

저번 웅천 싸움에 발포 통선장統船將 이응개李應漑와 가리포 통선장 이경집李慶集 등이 적선 여러 척을 깨뜨리고 돌아올 즈음에 배 2척이 서로 부딪혀서 1척이 기울어 침몰하는 바람에 탔던 군사들은 헤엄쳐서 다른 배에 올랐으나 2~3명은 행방불명이 되고 배는 건질 수 없게 되었다.

 
순신이 개전한 이후로 수십 회의 대소 격전을 치렀으되 병선 1척이라도 상실 또는 침몰한 일이 없었는데 금번 싸움에 배 1척을 잃었으므로 순신은 “나라의 병선을 일었으니 주장된 자기로서는 책임상 벌이 없을 수 없다” 하여 조정에 표문을 올려 사죄하였다. 그 표문은 이러하였다.

臣本無狀 叨守重寄 日夜憂懼 思報涓埃之效 幸賴皇天之佑 屢獲勝捷 領下之士卒 驕氣日增 爭首突戰 惟恐居後 故臣居嘗飭諭 以輕敵必敗之理 然猶此不戒 至使一隻統船 終至傾覆沈沒 此臣之用兵不愼 指揮乖方之致 極爲惶恐 伏藁待罪

변변찮은 신이 외람되이 중책을 맡아 밤낮으로 근심하고 두려워하며 티끌만큼이라도 보답하고자 하였더니… 다행히 하늘이 도우시어 여러 번 승첩하였습니다. 거느린 군사들이 (승첩한 기세를 타서) 교만한 기운이 날로 더하여 앞을 다투어 돌격하며 오직 뒤처질까 두려워하므로 신이 재삼 타일러, 적을 가벼이 여기면 반드시 패한다는 이치로써 타일렀지만 오히려 조심하지 않고 마침내 통선 1척을 전복 침몰시켰습니다. 이는 신이 용병을 삼가지 못하고 지휘를 잘못했기 때문입니다. 황공하여 복고대죄11)합니다.

이에 대하여 식자들의 공론이 있었다. “원균은 전쟁 초에 적을 겁내어 74척의 병선과 일만여 명 장졸을 일시에 제 손으로 침몰 해산시켜 버리고도 조금도 부끄러운 태도가 없었는데 이순신은 사소한 소맹선 1척을 상실하고도 표문을 올려 벌을 기다리기까지 함을 볼 때에 그 충의와 체면을 유지하는 재국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숭배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였다.

옛날 한나라의 제갈무후가 가정街亭에서 패배함으로 인하여 승상의 직위를 내어놓고 스스로 우장군右將軍의 자리에 머무르고 공을 세워 장차 속죄한다고 내외에 선포하였다. 금일에 이공이 표문을 올려 대죄하는 것은 제갈무후와 동일한 심법心法이었다.
정리 | 이남석 더 스쿠프 대표 cvo@thescoop.co.kr 자료제공 | 교육지대(대표 장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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