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당 김기환 선생의 이순신공세가(李舜臣公世家) 제34회 ①

순신이 제만춘에게 말했다. “너는 용력이 과인하고 활솜씨가 뛰어나니 마땅히 활을 쏘다가 죽음으로써 나라에 보답함이 옳거늘 적에게 사로잡혀 수길의 비서관과 서기관의 임무를 수행했으니 이 나라 신하로서의 절개를 버린 것이다.” 고개 숙인 제만춘은 순신의 부대장이 돼 군공을 많이 세웠다.

 
조정에서 이순신의 선봉장 광양현감 어영담을, 독운어사督運御史의 무고를 듣고 전후 전공도 살피지 않고 파직하였다. 이는 조정에서 그가 사생지간에 드나들며 백전 성공한 것을 몰라본 것이었다. 순신은 곧 장계를 올려 그 죄가 없음을 변호하고 이러한 명장을 국가 비상시기에 체직할 수 없다 하여 다시 복직시켜 달라고 하였다. 그 장계에는 이렇게 썼다.

謹啓魚泳潭 縣以來 釐革政 鐥備兵機 憂國如家 水陸備禦之策 無不詳究 大駕西幸之後 悶資之難繼 精米六十石 載船上送 爲國盡誠 益顯於此 而今遞職 一境士女 如失父母 泳潭 於水路形勢 無不慣識 且智慮過人 臣以中部將差定 與之謀議 累度討敵 冒死先登 仍致大捷 湖南一方 尙今賴完者 無非此等人之力也 當此艱憂之時 失一奮義之將 有妨於禦敵 況水戰 非人人所能 而臨機易將 亦非兵家之良籌 伏乞姑仍其職 以答軍民之願 臣不顧越職之罪 死敢稟

“삼가 아룁니다.… 어영담이 부임한 이래로 잘못된 규칙과 제도를 개혁하고, 병기를 수선하여 비치하고, 나라 근심하기를 자기 집같이 하여… 바다와 육지의 방어하는 책략을 상세히 연구하지 않는 것이 없으며… 임금께서 서쪽으로 몽진한 뒤 필요한 물자를 대기가 어려울 것을 민망히 여기고… 백미 60석을… 배에 실어 올려 보냈으니… 나라를 위하는 정성이 이보다 더할 수가 없거늘 그런데 이제 직책에서 갈리게 되니 온 고을의 백성들이 마치 부모를 잃은 듯하며… 영담은 물길의 형세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고 계교와 생각함이 뛰어난 사람이라 신이 중부장의 소임을 맡겨 함께 일을 의논하고 계획하여 여러 번 적을 무찌를 때 죽음을 무릅쓰고 앞장서서 대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호남 지방이 지금까지 안전하게 된 것도 일부분은 어영담의 힘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몹시 어려운 때를 당하여 의기 있는 장수 한 사람을 잃게 되는 것은 적을 방어함에 해로움이 있을 뿐 아니라, 해전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므로, 이런 시기에 장수를 바꾼다는 것은 군사상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신이 직책에 벗어난 말을 하는 죄를 무릅쓰고 감히 아룁니다.” 1)

조정에서는 순신의 간곡한 뜻도 살피지 않고 어영담을 체직시켜 버렸다. 그 조방장으로 청한 장계는 이러한 구절을 썼다.

前縣監魚泳潭 生長海曲 慣熟舟楫 兩南水路汚直 島嶼形勢 歷歷詳知 其於討敵之事 極力同心 上年以來 臨戰討敵 每每前鋒 屢致大功 請以魚泳潭 舟師助防將差定 終始策 以濟大事 伏望

“… 전 현감 어영담은… 바닷가에서 자라나 배에 익숙하고 영남과 호남의 물길 사정과 섬들의 형세를 역력하게 상세히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적을 토벌하는 일에 몸과 마음을 다하였습니다. 지난해 이래로 적을 치던 때마다 선봉이 되어 나서서 여러 번 큰 공을 이루었는데 다른 사람에 비해서 내세울 만한 인재이므로 어영담이 이미 파직되었더라도 우선 수군 조방장으로 임명하여 시종일관 계책을 세워 큰 일을 성취하도록 엎드려 바랍니다.”
순신은 이억기와 원균의 병력을 합하여 진해만 가조도2) 앞바다에 결진하였다. 세작3)이 보고하되 “팔로에 흩어져 있던 적군이 부산을 중심으로 벌떼와 개미떼 같이 모여들어 그 병력이 10만이 넘는다고 합니다. 부산항 안에만 웅크리고 있던 적의 수군은 육군의 성원을 얻어서 아연 활기를 띠어 800여 척이나 되는 병선을 출동하여 부산과 김해로부터 웅천의 웅포 제포 안골포와, 거제의 영등포 송진포 하청4) 가이5) 등에까지 뻗쳐 나와 다니며 바다에 가득하여 연락부절하니 극히 통분한 일입니다”고 하였다.

6월 어느 날 적의 선봉선 20척이 진주성 공략을 돕자고 견내량을 넘어 사천을 향하여 오다가 순신의 복병선에 공격당해 패주하였다. 적세가 700~800척이나 되어 비록 크다고 하나 연전연승하는 우리 수사의 위세를 두려워하여 감히 견내량 목을 넘어 한산도 근해로는 덤벼들지 못할 것이니 우리는 요해지처를 굳게 방어하여 이일대로6)하고만 있으면 비록 적이 100만명이 있은들 겁낼 것이 없다는 뜻으로 삼군을 단속하였다.

충청도수군절도사 정걸이 홀로 한산도에 왔는데 충청도 병선은 우후에게 거느리고 오라고 한 모양이었다. 정걸이 오는 것을 보고 순신의 군사들은 크게 환영하였다. 이는 적세가 커서 방어에 긴장한 때문이었다. 또 육로로 파송하였던 세작이 돌아와 보고하되 6월 15일에 함안에서 전쟁이 일어나 도원수 김명원 순변사 이빈 전라감사 권율 방어사 선거이 등 여러 대장들이 다 퇴각하여 의령 정진으로 달아났다고 하였다. 순신은 이 보고를 듣고 담이 찢어지는 듯하여 원통함을 이기지 못하였다.

진해만 앞바다에서 결진한 세 사람

▲ 충청도수군절도사 정걸이 걸어오는 것을 보고 군신의 군사들은 크게 환영했다.
적의 수군은 800여척이 넘는다 하나 적은 대장 부전수가와 그 이하 협판안치 구귀가륭 가등청정 소서행장 등까지라도 우리 수군의 세력을 무서워하여 감히 침범하지를 못하고 육로로 견내량까지 와서 진을 만들고 기세를 올렸다. 우리 주사는 곧 응전하여 포환은 우박과 같고 화살은 비와 같이 하여 쳐들어가서 상륙작전을 개시하니 적은 감당하지 못하여 무너져 시체를 남겨 버리고 달아났다.

적은 수전에 연전연패한 끝에 부산 기타 각 포구에 성채를 건축하고 깊은 항구에 선박을 숨기고 돌각지대에 포루砲壘를 만들어 거기서 응전하며 다만 소함대를 조직하여 우리 주사를 유인하기만 하였다. 그 음침한 꾀가 실로 헤아리기 어려운 지라 항상 이긴다고만 믿고 가벼이 진격하다가는 화를 예측하기 어려우니, 형세를 깊이 살핀 연후에야 움직이자는 말로 제장과 약속하였다.

또 6월 24일에 영등포 탐망군이 와서 보고하되 적선 500여척이 송진포로 들어왔다고 하였다. 7월 2일에 김득룡이 와서 보고하되 진주성이 함락이 되고 황진 최경회 김천일 장윤 이종인 등 여러 장수가 전사했다고 하여 순신 이하로 다들 크게 통분하였다.

순천군관 김중윤金仲胤 흥양군관 이진李珍 등이 적정을 정탐하고 돌아와 보고하되 “소서행장과 종의지의 군사가 웅천에 와 유진하였는데 웅포에 있는 적의 대소선이 200여척이나 정박하였고, 거제 영등포에도 협판 중서7)의 병선이 200여척이나 정박하였으며, 안골포에 80여척 제포에 70여척이 정박하였고, 김해강 가덕 앞바다 웅천 거제간에도 왕래하는 선박이 연락이 끊임없더이다” 하였다.

고성에 살던 전 봉사 제만춘은 본래 원균의 군관으로 적정을 정탐하다가 포로가 되어 일본장수 협판 중서에게 잡혀갔다가 수길의 본영으로 실려 갔다. 수길이 제만춘의 진술하는 문필을 보고 아껴 그 비서관에게 맡겨두었다.

“대개 수길은 30만 대군을 거느리고 낭고야8) 즉 명호옥에 3중으로 성을 쌓고 6층으로 누각을 짓고 하여서 그 요충지에 설치한 군비가 말로 다할 수 없었습니다. 지난 5월경에 명나라 사신 2인이 들어왔을 때 수길은 6층각 위에 앉아서 위엄을 보이고 명의 사신은 아래에 세우고 서로 보았으며, 명사와의 문답은, 명사가 먼저 말하기를 조선이 경상도와 전라도에 먼저 길을 열어 주어 일본군을 끌어들이고 대명을 속여서 실상을 고하지 아니하였다고 말하였는데 수길은 그 신하 석전삼성과 대곡길계의 무리로 하여금 답변케 하고 창검 각 열 자루와 은 30냥을 주어 보냈습니다. 수길의 문서에는 협판안치가 처음에 1만군의 병선을 거느리고 부전수가와 합세하여 한산도 대전에 패하여 1000여군이 남지 못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었으며, 소인이 도망하여 나올 때에 부산은 적선이 바다에 가득하여 부지기수였습니다.”

순신은 제만춘을 책하여 “너로 말하면 용력이 과인하고 활솜씨가 뛰어나니 마땅히 활을 쏘다가 죽음으로써 나라에 보답함이 옳거늘, 적에게 사로잡혀 수길의 비서관과 서기관의 임무를 수행하였으니 이 나라 신하로서의 절개를 버린 셈이다” 하고 군중에 두어 일본 사정의 고문이 되게 하고 “후일에 공을 세워 속죄하도록 하라”고 순신은 엄히 분부하였다. 제만춘은 순신의 아장9)이 되어 군공을 많이 세웠다.

선조와 백성을 먹여살리다

 
계사1593년 10월 4일에10) 선조는 한성으로 다시 돌아왔다. 이때 일본군은 경상도 부산 근해 연안에 16개 주둔지를 마련해 놓고 명나라와 외교수단으로 서로 절충하고 있었다. 선조가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 백성들이 모여들었으나 먹을 식량이 없어 굶어죽는 사람이 날로 수를 알 수 없었다.

近日飢民 無術可濟 予仰天憫歎 欲先死而不得

“요즈음 굶어죽는 백성을 구제할 방법이 없으니 내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여 먼저 죽고자 해도 그럴 수가 없구나!”

선조는 음식을 줄이고 그것으로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는 데에 보태라고 분부하였다. 이러는 때 이순신은 그동안에 저축하여 놓았던 쌀과 소금과 해물을 한성으로 실어 올려서 선조와 그 이하로 서울에 거하는 관민들을 살렸다. 순신의 양곡을 보낼 때에 함께 올린 장계에는 “신하된 정에 근심을 이기지 못하여 별도로 보관하였던 군량을 배에 실어 기타 잡물과 생선 소금 약간과 같이 올려 보냅니다” 하는 구절을 썼다.

이러한 위급존망의 시기에 오직 이순신 한사람이 지난 8월에 삼도수군통제사라는 직위로 한산도에 본영을 두고 경상 전라 충청 삼도 연해의 각읍 각관포 각도서 각진보에 전쟁으로 하여 떠도는 백성들을 모아 혹은 농사를 짓게 하고 혹은 소금을 굽게 하고 혹은 어로를 시켜서 미곡 수십만석과 소금 수만석을 쌓았으며혹은 가축을 기르게 하며 혹은 참나무와 대나무를 배양하여 창과 활을 만들게 하고 또는 항왜들까지 이용하여 조총과 기타 일본식 무기를 만들게 하고 또는 병선을 새로 짓고 하여서 혼자서 삼천리강산을 등에 짊어진 듯한 힘을 썼다.

경상좌도만 내어놓고 우도 및 전라좌우도 충청도를 합하여 모든 도서와 연해 각읍 각관포에는 오직 난리라는 것은 이순신의 날개 밑이 되어서 피난할 근심이 없을 뿐 아니라 도무지 의식주의 걱정이라고는 없이 생활을 하고 지냈다.

그럴 뿐만 아니라 선조 이하의 조정대관들도 공담공론으로 쓸데없는 당파싸움을 하고 앉았던 무리들 입에 풀칠하는 것도 통제사 이순신으로부터 한성 서강西江으로 실어 올려 보내는 쌀로 하여서 되는 것이었다.

이 삼도수군의 대성공도 사실상 이순신의 지휘 명령하에서 백전연승의 큰 공훈을 세웠다 하여 조정에서 지난 계사1593년 8월에 삼도수군통제사를 두기로 하여 이순신을 임명하여 전라좌수사를 겸임케 하였다.

王若曰 司命三軍 史稱推之重 所貴要領 易著輿尸之凶 惟卿 一生苦節 萬里長城 糾合殘兵 在慶尙全羅之要害 邀擊强寇 奏閑山唐項之奇功 勤勞表著於諸營 褒秩屢煥於三捷 顧兵家之所深缺 曰統禦之無其人 豈云如臂之使指 未免後至而先逃 適際蒼黃 未有處置 今賊勢之未艾 其奈詐之益深 斂鋒於釜山 陽示捲回之意 運糧餉於滄海 陰有再擧之謀 策應之難 有甚於疇 玆用卿以本職 仍兼全羅忠淸慶尙三道水軍統制使 嗚呼 威克愛允濟 功惟志可崇 帥以下不用命者 卿可以軍法施行 行伍之中有頑鈍者 卿可以忠孝策勵 海外有截 四方以無侮 惟卿之能 榻側容 三邊未息肩 惟卿之恥 卿勖哉 凶奴未滅何以家 寸土不復非爲國 予豈自安於小成 卿幸銳意於大伐 願徇初服之良圖 勉卒中興之盛業 故玆敎示 想宜知悉

순왕이 이와 같이 말한다. 삼군을 주관함에 대해서는 사기에서 추곡11)의 중함을 일컬었고, 인명을 귀히 여김에 관해서는 주역에서 여시12)의 흉함을 드러냈다.… 오직 경은 일생의 굳은 절개요 만리의 장성이로다. 남은 병사를 규합하여 전라 경상의 요처를 차지하고, 강적을 공격하여 한산 당항의 공을 보고하였다. 힘써 일한 것은 진영 중에서 뛰어나고, 표창과 녹봉은 3번 승리에 거듭 빛났다.

돌아보건대 병가에서 가장 걱정스러운 점은 통솔할 사람이 없는 것이라 하였다. 다급한 때를 만나면 처치할 방법이 없을 것이다. 하물며 지금은 적의 세력이 아직 뿌리 뽑히지 않았고 속이고 거짓말함이 갈수록 더하니 어찌하리오. 부산에서 창칼을 거두어 겉으로는 군사를 물릴 듯한 뜻을 보이면서, 대책을 세우기가 전보다 어려울 것이다.

이에 경을 본직에 더하여 충청 전라 경상 삼도수군통제사를 겸하게 하노라. 아! 위엄은 사랑하는 마음을 극복해야 진실로 이루어지고, 공로는 뜻을 세움으로써만 높일 수 있을 것이다.

바다 밖의 적들을 끊어 사방에서 우리를 업신여기는 자가 없게 함은 그대가 능히 할 수 있는 일이며, 임금의 의자 옆에서 코를 고는 것을 용납하여 변경이 무거운 짐을 벗지 못하게 됨은 그대의 수치이리니, 그대는 힘쓰도록 하라. … ‘흉노들을 소멸시키지 못했는데 어찌 집을 마련하랴’13) 하였으니 경은 다행히 적들을 크게 무찌르기로 단단히 마음먹고 있으며, ‘한 치의 땅이라도 수복하지 못한다면 나라가 될 수 없다’ 하였으니 내 어찌 작은 성공에 만족할 수 있겠는가. 교서를 내리는 바이니 헤아려 잘 알도록 하라. <다음호에 계속>
정리 | 이남석 더 스쿠프 대표 cvo@thescoop.co.kr 자료제공 | 교육지대(대표 장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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