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해汝諧로 살아간 이순신李舜臣 ④

▲ 이순신은 출세는 늦었지만 이름을 남겨 천운天運을 이어갔다.
어떻게 살 것인가? 20세 청년 이순신은 ‘해諧’를 안고 간다. 문文과 무武를 따로 보지 않았다. 같이諧 했다. 인문학적 소양과 건강한 신체를 일신에 화합하고자 노력했다.

그는 21세에 가장이 된다. 상주 방씨와 결혼했다. 장인은 ‘방진方震’이다. 방진은 방진方陣에 능했다. 병법에 뛰어났다는 얘기다. 특히 궁술이 훌륭했다. 아들이 없던 장인은 사위에게 자신의 노하우인 궁술을 아낌없이 가르쳤을 것이다.
이순신은 무인이 되기로 결심한 22세 가을부터 활을 쏘고 말을 타며 무예를 배우기 시작한다. 스스로 집 뒤 야산에 연무장을 만들어 궁술을 연마하는가 하면, 방화산 마루의 평지를 말 타는 훈련장으로 삼아 기마술을 익히면서 무예를 단련했다. (… 중략 …)
28세 되던 해, 드디어 이순신은 소년 시절에 살던 한양 훈련원으로 가서 별과 시험에 응시한다. 하지만 말을 달리며 기예를 부리는 시험 도중에 그만 말이 거꾸러져 왼쪽 다리가 부러지는 사고가 발생한다. 이를 보고 있던 사람들이 이순신을 죽은 줄 알고 걱정할 정도로 갑작스러운 사고였다. 하지만 그는 정신을 가다듬고 한 발로 일어서 마당가의 버들가지 껍질로 상처를 싸매고, 다시 말에 올라타 시험을 마친다.
 - 「이순신, 신은 이미 준비를 마치었나이다」, 가디언


이순신은 22세부터 준비를 해서 32세에 처음 취업에 성공했다. 무과에 급제해 조선이란 기업에 말단사원으로 들어갔다. 취업 공부를 자그마치 10년이나 한 셈이다. ‘잘 풀렸다’고 보기는 어렵다. 게다가 장가도 가지 않았던가. 남편을 뒷바라지하며 살림을 꾸려야 했던 부인 상주 방씨의 맘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직장생활도 그렇다. 32세 때(선조 9년)에 권관으로 출발해 39세(선조 16년) 때 겨우 ‘함경도 건원보 권관’이 됐다. 안 풀려도 너무 안 풀렸다.

직장인에게 회자되는 말 중에 ‘졸卒의 법칙’이란 게 있다. 졸卒은 ‘군사(병졸)’라는 뜻도 있지만 ‘마치다’는 의미도 갖고 있다. 졸卒을 쪼개보면 ‘六+六+十’으로 돼 있다. ‘天運천운(꽃 피는 시절)과 악운惡運(꽃 지는 시절)이 각각 6년씩 지나고 이도저도 아닌 보통운이 10년 지나면 직장생활은 끝난다’는 의미다.

이순신은 달랐다. 처음 12년간 지독히 승진이 안 됐다. 44세에 1588년(선조 21년) 6월에 변방 근무를 끝내고 귀향歸鄕해 한거閒居를 누린다. 1589년(선조 22년) 2월 전라 순찰사 이광에게 발탁 돼 ‘조방장(종4품)’으로 승진한다. 이후엔 ‘정읍현감井邑縣監(종6품)’이 된다. 그 뒤로 고사리진 첨사•만포진 첨사를 거쳐 1591년(선조 24년) 12월에 전라 좌수사로 임명된다. 전라 좌수사는 정3품으로 당상관 자리다.

44세부터 딱 10년 후인 54세에 노량해전露粱海戰에서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면서(1598년 11월 19일) 직장생활을 청산한다. 졸卒했다.

천운이 끝난 걸까. 아니다. 진짜 천운은 그 이후에 이어졌다. 훗날 ‘영원한 장군’ 혹은 ‘전설의 해군총사령관’으로 기억돼서다. 서울의 복판인 광화문을 비롯해 전국 어디에나 그는 살아 있다. 게다가 이순신은 여러 부문에서 롤모델이 되고 있다. 졸(卒•병졸)로 시작했지만 졸(卒•나라)을 사로잡은 셈이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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