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킨지 보고서의 ‘1997 데자뷰’

외환위기가 터진 1997년. 글로벌 컨설팅업체 맥킨지는 ‘한국보고서’를 발간했다. 규제완화를 통해 외환위기를 탈출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맥킨지가 최근 두 번째 ‘한국보고서’를 냈다. 내용은 1997년 보고서와 비슷하다. 맥킨지가 그때 그 보고서를 다시 들춘 까닭은 무엇일까.

▲ 맥킨지의 2013년 한국보고서는 1997년 외환위기 당시 발표했던 보고서와 성향이 비슷하다.

올 4월 13일 글로벌 글로벌 컨설팅그룹 맥킨지는 한국 관련 보고서를 발표했다. 1997년 외환위기 때 발표한 보고서에 이어 두번째다. 맥킨지는 이 보고서에서 ‘부채와 사교육비로 인한 중산층 가구의 재정건전성 취약’과 ‘대기업 고용창출 둔화와 중소기업 부진으로 인한 성장 동력 상실’을 진단했다.

한국사회는 뜨겁게 반응했다. 모든 언론이 앞다퉈 보도했고, 원본을 구하려는 발길도 이어졌다. 그러나 보고서를 자세히 살펴보면 공감할 수 없는 내용이 많다. 우리 사회의 심각한 문제인 양극화•불평등•사회불안•저성장극복 방안 등은 충분히 담지도 않았다.

맥킨지가 내린 처방은 더욱 한심하다. 성장을 위한 규제완화만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맥킨지는 왜 이런 보고서를 작성했을까. 또한 별 내용이 없는 보고서임에도 정치권과 대기업이 열광한 이유는 무엇일까. 우연이라고 하기엔 공교로운 장면들이 있다.

우선 맥킨지는 박근혜 정부의 이른바 ‘창조경제’ 구상사업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최근 한국개발연구원(KDI)은 박근혜 정부가 주창한 ‘창조경제’의 구체적인 정책비전 수립에 나섰다. KDI는 이를 위해 국내외 연구소와 공동으로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다. 여기에 참여한 협업파트너에는 삼성경제연구소•골드먼삭스와 함께 맥킨지의 이름이 들어 있다.

맥킨지의 2013년판 한국 보고서를 좀 더 살펴보자. 보고서는 한국경제가 구조적인 변곡점에 도달해 저성장의 덫에 걸렸고 이에 따라 한국에 새로운 성장공식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성장을 위해선 주택담보대출비율(LTV) 규제를 완화해 중산층 가구의 재정 건전성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면 제2금융권과 비금융권의 고금리 대출을 받는 주택구매자들이 제1금융권을 통해 주택을 구입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연간 8조8000억원 이상 대출비용을 줄일 수 있다는 게 맥킨지의 설명이다.

보고서는 서비스 부문의 확대•강화도 주장한다. 보건의료•금융서비스•관광산업을 육성하고 교육•관광•의료보건•물류•금융 등에 대한 규제를 완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양질의 일자리를 보충하고 확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게다가 중소기업 부문 강화를 위해선 기업가 정신 부활을 위한 각종 규제를 완화하고 관련법을 개혁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다.

맥킨지가 보고서를 발표하자 기다렸다는 듯 저성장 우려와 규제완화 요구가 쏟아졌다. 한국경제연구원은 “경제민주화•복지확대 등의 논의가 기업투자심리에 불안요인이 될 가능성이 존재한다”며 “일상적인 경제활동마저 위축시키는 과잉 규제 일변도의 경제민주화 방향은 재수정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5월 2일 있었던 회장단 회의에서 “기업에 대한 규제가 정상적인 기업 활동에까지 영향을 미칠 경우 우리 경제의 성장동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며 “심각한 저성장 국면에서 경제민주화를 급격하게 추진할 경우 한국 경제의 성장엔진 자체가 꺼질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누구를 위한 정책인가

조동근 명지대(경제학과) 교수는 한국경제학회와 경제•인문사회연구회가 공동 주관한 ‘2013년 제1차 정책세미나’에서 “새 정부가 밝힌 올해 2% 초반대의 경제성장률을 받아들이기엔 우리 경제가 가야 할 길이 먼데도 경제 민주화에 집착하고 있다”며 “경제 민주화 논쟁이 ‘투자와 소비’를 얼어붙게 했다”고 주장했다.

맥킨지가 보고서로 포문을 열자 보수성향의 단체•학자들이 규제완화를 요구하고 정부가 화답하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현오석 경제부총리는 곧바로 규제개선 중심의 투자활성화 대책을 발표했다. 내용은 지주회사 규제 개선, 공장증설 부지 확보지원, 산업단지 내 토지임대차 제한 개선, 산업단지 내 열병합 발전소 건설, 의료관광객 숙박시설(메디텔) 건립, 풍력발전 입지 규제 개선 등이다.
 

최수현 금융감독원장은 자산운용 규제 완화, 상품개발 자율성 확대 등과 같은 보험사 지원방안을 발표했다. 외국인 환자 유치사업 대상에 보험회사를 포함시키는 내용의 법 개정도 시도하고 있다. 심재철 새누리당 의원은 기다렸다는 듯 원격진료 허용 의료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이제 정리해보자. 지금의 상황은 1997년 맥킨지가 보고서를 통해 ‘한국 재창조’를 외치던 당시와 별반 다르지 않다. 해당 보고서의 내용은 IMF의 권고 이후 한국 정부가 수행했던 규제개혁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하지만 그 권고안을 따른 그 결과는 어떻게 됐나. 대기업의 시장지배력은 눈에 띄게 커졌고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거치면서 노동시장은 양극화됐다.

대기업 위주의 성장은 낙수落水효과로 이어지지도 않았다. 중소기업은 설자리를 잃고 있으며 소규모 자영업자는 빈곤으로 떨어지기 직전 단계까지 와 있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2013년 판 맥킨지 보고서는 완전히 잘못된 처방을 내놨다.

언급했듯 LTV 규제 완화, 교육•관광•의료보건•물류•금융 등에 대한 규제혁파, 기업가 정신 부활을 위한 법 개혁 등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한국 기업과 부유층이 요구하는 정책들 아닌가. 몇몇 내용은 실제 집행 중이기도 하다. 맥킨지 보고서는 외환위기 때와 마찬가지로 스피커 역할을 충실히 실천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나라의 국가정책은 현재 어떻게 결정되나. ‘회전문 인사’로 불리는 전문가•행정관료•이익집단의 공고한 카르텔을 통해서 나오지 않는가. 다시 말해 미국 주류경제학에 지적 토대를 둔 민•관•학 전문가들이 정부의 요직을 번갈아 맡으며 대기업과 부유층을 위해 유리한 정책을 만들고 있다. 이런 과정에 맥킨지와 같은 글로벌 컨설팅 그룹이 참여해 정책결정의 객관성과 합리성을 증명해준다.

음모론 아닌 음모론
 

외환위기 당시 구조조정을 맡았던 한 기업체 임원은 “글로벌 컨설팅사 이름으로 경영진이 원하는 방안의 보고서를 만들면 노조와 같은 반대세력을 누르기도 쉽고, ‘말빨’도 섰다”고 털어놓았다. 조장된 공포감과 글로벌컨설팅사의 명성이 상승작용을 일으킨 결과다. 이에 보답하듯 지난 10여 년간 정부와 기업은 맥킨지에 수백억원대의 수수료를 지불하는 등 비용을 지출했다.

하지만 글로벌 컨설팅그룹의 화려한 통계와 현란한 그래픽 속에 담긴 정책 주장은 오롯이 자본의 이익에만 충실할 뿐이다. 음모론은 별다른 게 아니다. 소득 상위 1%를 위한 정책개발이 전체 국민의 삶과 룰을 바꾸고 있다는 것이다.

세계 굴지 연구소의 보고서와 국제기구의 강제에 가까운 권고가 나오면 지배계층은 금과옥조처럼 받아들여 정치와 정책결정에 이용한다. 그럼에도 한국의 지식인들은 침묵하고 있다. 일부 지식인은 오히려 앞장서서 지지하며 경제민주화 폐지와 규제철폐를 강력하게 외치기도 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된 지 7개월째에 접어들었다. 그럼에도 국회에서 경제민주화를 위한 법안은 거의 다뤄지지 않고 있다. 발표된 국정과제들은 대선시기보다 훨씬 후퇴했다. 맥킨지 보고서가 아닌 한국 사회 불평등해소 보고서가 필요하다.
이은경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연구원 eundust@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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