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총론] 노인의 경험을 구입하라

▲ OECD 국가들과 비교했을 때 한국의 노인정책은 낙제점이지만 정부는 개선의 의지가 없어 보인다.(사진=지정훈 기자)
누가 노인을 ‘힘 없는 자’라고 했는가. 노인의 경험은 자산이다. 이 경험을 정부가 효율적으로 활용하면 수익을 창출할 수 있다. 그럼 노인부양가족은 소비여력이 생기고, 시장엔 작은 활력이 주입된다. 노인의 경험, 부가가치가 있다. 노인이 웃으면 나라가 웃는다.

스웨덴 말뫼에 사는 필립씨는 올해 68세다. 혼자 사는 그의 통장에는 매달 161만원이 꼬박꼬박 들어온다. 그는 방1개와 쪽방, 부엌이 있는 41㎡(12평)짜리 아파트에 산다. 월 임대료는 연료비를 포함해 56만원이다. 기본적인 생활비로 월 45만원 정도를 지출한다. 가끔 병원을 들르기도 하지만 약값과 진료비를 모두 포함해도 연 37만원이 넘지 않기 때문에 월 3만원이면 충분하다. 나머지는 자치단체가 부담한다. 남는 돈 57만원 중 30만원은 내년에 이탈리아와 스페인 등으로 한달간 여행을 가기 위해 차곡차곡 모으고 있다. 필립씨는 정년퇴직한 후부터 매년 유럽여행을 다녀오고 있다. 노인들을 위한 장기체류패키지 여행상품을 이용하면 싼값에 다녀올 수 있기 때문에 7~8개월만 모아도 넉넉하다. 평소에 건축에 관심을 두고 있던 필립은 늦은 나이지만 지난해부터 룬드 대학에 입학해 공부도 시작했다. 등록금은 무료다. 그래서 나머지 27만원은 책을 사보거나 친구들을 만나는 등의 용돈으로 쓴다. 정부가 무료로 운영하는 수영장에서 건강관리를 위해 주 3~4회 정도 수영을 하고, 낚시도 좋아해서 가끔 할아버지 때부터 물려받은 별장에서 보트 낚시를 즐긴다.

한국의 평범한 노인들이 접한다면 영화 같은 삶이 따로 없다고 할지 모르겠다. 맞다. 일부 각색한 이야기다. 하지만 현실과 동떨어진 얘기는 아니다. 2011년을 기준으로 스웨덴의 65세 이상 노인 연평균 소득은 약 1만8165달러(약 2042만원)다. 세금을 5% 정도로 잡으면 월 161만원이 나온다. 평균치가 아니라 실제로도 일반 노인에게 130만~150만원의 연금이 지급된다.

우리나라의 일반 노인들은 어떨까. 2011년 기준 노인 빈곤율이 경제개발협력기구(OEC D) 회원국 중 가장 높다는 걸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빠듯하다 못해 생활고에 허덕이기 일쑤다. 수치로 살펴보자. OECD 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65세 이상의 노인 10명 중 6명은 실업자다. 그나마 일하는 4명도 절반(52.9%)은 농•어•축산업 종사자고, 나머지 절반은 단순노무(26.2%), 서비스•판매(11.4%), 기계•기계조작(3.1%) 종사자다.

일을 해도 문제다. 소득 제1오분위부터 제5오분위까지의 총 근로소득 평균은 774만원에 그친다. 박근혜 정부의 기초노령연금을 최고액으로 받는다고 해도 1014만원이다. 월평균 84만원꼴이다. 생활비 주 부담자는 노인부부의 경우 스스로 해결하는(42.2%) 이들이 많았지만, 독거노인과 자녀동거일 중에는 자녀들에게 의지하는(각각 47.4%와 64.1%) 이들이 더 많았다. 경제적 자립도가 떨어진다는 얘기다. 날이 갈수록 오르는 한국의 소비자물가 수준을 감안하면 매달 적자를 보거나 최소한의 생활만을 유지하거나 둘 중 하나다. 한국의 노인들이 스웨덴이나 노르웨이 등 북유럽 복지국가를 부러워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노인정책 OECD 최하위

 
이번엔 수치가 아닌 현실로 눈을 돌려 보자. 현실에서 가장 많이 눈에 띄는 노인들의 모습은 어떤 걸까.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모습은 폐지나 폐품을 줍는 노인이다. 건물 화장실을 청소하거나 지방자치단체의 공공근로에 참여해 동네 공원 등에서 휴지를 줍는 노인도 쉽게 떠오른다. LG경제연구원에 따르면 65~74세 임금노동자 중 40%가 청소원•환경미화원 혹은 경비원•검표원이었다. 넝마주이 노인들이 눈에 많이 띈 데는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직업에 귀천은 없다지만 우리 사회엔 귀천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위험하고 더럽고 힘든 직종에 종사하는 이들을 천대하게 마련이다. 직업에 대한 인식이 이렇다보니 ‘청소하는 노인’들을 대하는 태도도 비슷하다. 이런 분위기에서 동방예의지국의 노인공경은 사라진 지 오래다. 

기피 업종에서 일하는 노인들도 기분이 썩 좋을 리 없다. 보건복지부 발표 자료(2011년 기준)에 따르면 현재 일자리에 대해 만족도는 연소득에 따라 달랐다. ‘만족한다’는 응답은 제5오분위와 제1오분위에서 각각 32.65%와 21.25%로 나타났다. ‘만족하지 않는다’는 응답은 12.8%와 27.8%였다. 당연히 개인의 환경이 좋을수록 더 좋은 일자리를 얻을 수 있다는 걸 감안하면 일자리 질이 좋을수록 만족도도 높다는 얘기다.

실제로 노인에게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하는 나라는 많다. 영국은 공립 노인복지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노인들은 이곳에서 가장 자신 있는 임무를 맡는다. 프랑스에는 시청이 운영하는 가족 탁아소가 있다. 아이를 어린이집이 아닌 이웃가정에 맡기는 것이다. 보모는 주로 은퇴한 교사다. 엄격한 자격심사를 거쳐 보모로 선정된다. 주목할 점은 부모와 보모 사이에 ‘금전거래’가 없다는 것이다. 부모는 시청에 비용을 지불하고, 보모는 시청으로부터 돈을 받는다. 그 결과 은퇴한 교사는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받고, 부모는 믿을 만한 노인에게 아이를 맡길 수 있다.

일본에도 흥미로운 노인 활용법이 있다. 도시바•파이오니아•혼다 등 일본기업은 퇴직자들의 특기를 활용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고 있다. 정부는 퇴직자를 다시 고용한 기업에 일정한 보조금을 지급한다. 연령이나 재고용 기준 등은 회사마다 조금씩 다르다. 대부분의 노인은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십분 활용할 수 있는 일자리라는 점에서 만족스러워 한다. 선진국의 노인고용 활용사례를 잘 보면 공통점이 있다. 정부가 노인을 ‘도와주야 할 대상’ ‘세금이나 축내는 무리’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당한 값을 주고 노인의 경험을 구입해 또 다른 부가가치를 창출한다. 이는 ‘불량 일자리’만 주고 ‘노인고용률’이 높다고 자화자찬하는 한국정부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올해 4월 30일 ‘정년 60세 연장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마치 국가가 노인들에게 무언가 큰 선심을 쓴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사회전체로 봤을 때 실보다 득이 많아서다. OECD 선진국들이 왜 정년을 65세 이상으로 끌어올렸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노인들이 경제활동에 참여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들은 많다. 생산 활동을 통해 경제에 도움이 되고, 노인들의 안정적인 소비는 청년고용률도 늘린다. 국민건강보험도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과 건강보험정책연구원에 따르면 65세 이상 세대의 월평균 의료비는 24만7166원으로 65세 미만 세대보다 5배가 높다. 세대별 의료비 지출 비중도 생애 의료비의 50%를 차지한다. 어마어마한 의료부담이 국가 몫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크다. 그걸 막을 수 있는 게 노인들의 경제적 자립이다. 그리고 그 전제는 바로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노인은 짐이 아니다

한때 잘나가는 대기업에서 근무하다가 외환위기 당시 50대에 정리해고 당한 후 생계를 위해 일용직 노동을 하면서 간간이 폐품 수집도 겸한다는 67세의 노인은 이렇게 말했다. “전자회사 영업팀에서 근무했다. 사람을 보면 금방 친숙해지는 성격 덕에 회사가 망하기 전에는 일 잘한다는 소리도 곧잘 들었다. 정리해고와 함께 그런 성격도 잃었다. 정말 이런 노후를 보내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다시 한번 현장을 뛰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노인이라고들 하는데 나는 아직 힘도 넘치고 노인이라 생각지 않는다.”

대다수 노인의 생각이 이와 비슷하다. 마음만은 젊다는 거다. 그들을 ‘짐’으로 보면 한없이 무겁다. 하지만 그들을 후세들의 견인차로 보면 더할 나위 없이 가볍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juckys@thescoop.co.kr|@juckys3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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