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당 김기환 선생의 이순신공세가(李舜臣公世家) 제34회 ②

[CBS The Scoop] 명나라 관리 양보는 순신을 대하였다. 가만히 순신의 주사를 보니 그 세력이 무적함대라 부를 만하였다. 양보가 순신을 칭찬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순신의 인격을 존경하여 마주앉기를 굳이 사양하고 손을 모으고 시립하여 서있었다. 잠시 이야기하고도 영웅을 만나보았다고 더없이 기뻐하였다.

 
순신은 본영을 한산도로 옮기기로 조정에 청하여 허가를 얻었다. 좌수영은 금일 전쟁에 적을 방어하기에는 너무 한쪽에 치우쳐 불편하고 한산도는 일본군과 싸우는 데 있어서 삼남수로의 요충이요 항만이 깊고 봉우리가 감싸고 있어 유일무이한 좋은 장소이기 때문이었다.

이때 명나라 동정東征 총대장인 경략사 병부시랑兵部侍郞 송응창이 조선의 수군대장 이순신은 백전 연승하는 명장이란 소문을 듣고 그 허실과 방략을 알아보기 위하여 자기의 수하 비서관 양보楊甫와 역관 표헌表憲을 한산도로 파견하여 보고 오라고 하였다. 양보는 한성에 와서 조정에 그 사유를 말하였더니 선전관 목광흠睦光欽을 동반하여 5월 24일에 한산도에 들어왔다.

순신은 교제 수완이 있는 우별도장 이설을 시켜 마중 나가게 하여 자기가 탄 대장선에서 삼도제장을 모아 연회를 열고 대명천자의 황은을 칭송하고 전함대의 병위를 관람시킨 뒤에 순신은 호상을 주어 자기와 대좌하게 하였다.

명나라 관리 양보는 순신을 대하여 순신의 주사를 보니 그 세력이 무적함대라 부를 만하다고 칭찬하기를 마다하지 아니하였다. 또 순신의 인격을 존경하여 마주앉기를 굳이 사양하고 손을 모으고 시립하여 서있었으며 잠시 이야기하고도 영웅을 만나보았다고 더없이 기뻐하였다고 한다. 25일에 양보의 일행을 호송하였다.

그 당시에 이공은 조선국의 일개 수군제독에 불과한 직위이니 아직 대신의 반열도 못된다. 그때에 중국에서 나온 관인들의 오만무례한 버릇이란 조선의 대신도 소국의 배신1)이라 하여 심유경이 대신을 깔본 것과 유서애가 채찍에 맞은 것이 이것이다. 그러나 도독 진린은 이공을 경천위지經天緯地의 인물이라 하여 제갈무후에 비하였다. 이 양보라는 사람도 송경략이 신임하는 사람인즉 정녕코 눈이 있는 자일 것이니 공을 존경하여 대좌하기를 사양하고 종일 시립하였으니 이는 공의 인격을 오자서와 관운장과 같이 보는 까닭일 것이었다.

계사1593년 10월에 선조는 유성룡을 다시 영의정을 시키고 곽재우로 성주목사를 제수하여 본도 조방장을 겸임케 하였다. 원 성주목사 제말은 본래 고성현 사람으로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하여 정진 웅천 김해까지 격파하여 전공이 그 당시에 정기룡 곽재우 이상이 되어 성주목사가 되었더니 한성서 내려오는 적의 대군과 맹렬히 싸워서 성주성을 베개로 하고 전사한 뒤였다.

도원수 김명원을 면직하고 권율로 도원수를 삼고, 이정암으로 권율을 대신하여 전라감사를 제수하였다.[한 방면의 장수감으로는 김명원보다 권율이 앞서고, 적을 대할 계책을 세우며 군사를 아끼는 도원수 자격으로는 권율보다 김명원이 앞설 것이었다.]

기다리고 있다가 일본군 엄습하다

▲ 순신은 추격대를 두 갈래로 보내 비밀리에 일본군의 통오를 차단했다.
일본군은 울산 부산 양산 김해 웅천의 여러 고을 항만 요처에 근거를 만들고 병선을 깊은 포구 안에 들여세워 보호하여 이순신의 수군 예봉을 피하게 작정하고 때때로 쾌속선 수십척씩으로 소선대를 조직하여 달밤이나 안개 낀 날에 한산도 앞바다를 지나가서 사량 사천 간에서 날뛰며 어민을 상해한다는 탐보가 순신에게 들어왔다.

순신은 추격대를 두 갈래로 보내어 소탕케 하고 비밀리에 착포량2)목을 흙으로 막아 육지와 연결되게 하여 적의 통로를 차단하여 버렸다.

이 착포량목은 만조시가 되면 중소선 정도는 통행할 수 있었던 운하지대였다. 아니나 다를까 적의 소함대 20여척이 10월 달밤 조수를 이용하여 조선군이 지키는 견내량목을 넘어와서 바로 착포량목을 향하였다. 적군은 물목이 막힌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었다. 이 적의 소함대는 전부 조선병선의 모양을 차리고 군사들도 다 조선수군의 복색을 차렸던 것이었다.

기다리고 있던 조선수군은 견내량에서도 놓아두었다가 그 뒤를 엄습하였다. 적선은 순신이 모르는 줄만 알았다가 불의에 쳐오는 것을 보고 당황하여 착포량에 다다른즉 물길이 막혀 있다. 적은 형세가 궁박하여 그 막힌 곳을 파고 달아나려 하여 배를 버리고 육지에 내려서서 수천명 적군이 사력을 다하여 운하를 다시 파고 배에 도로 올라 넘어 달아나려 하였으나 순신의 제장은 벌써 적선을 반수 이상이나 깨뜨려 불살라 버렸다.

적군은 조총과 기타 군기를 수없이 버리고 겨우 4ㆍ5척의 남은 배를 타고 살아 넘어가고 죽은 군사가 무수하였다. 순신은 군을 거두어 동방이 밝은 뒤에 회군하였다.

 
순신은 군사를 지휘하여 착량목에 판교를 놓아 백성의 통행을 편하게 하고 또 착량과 마주보는 해안인 해평海坪평야에 농장을 신설하고 유민을 자리잡게 하였다. 해평평야는 그렇게 크지는 못하나 지세가 평탄하고 토질이 비옥하였다.

관개사업을 개시하여 미륵산彌勒山 용동수龍洞水를 끌어와 유민을 농사짓게 하였다. 대개 유민이란 임진란 당시에 피난하여 다니는 수천호의 백성들이었다. 부호는 모든 식솔을 배에 실고 빈민은 짐을 이고 지고 이순신의 백전백승하는 부대 뒤를 따라다니는 것이 천하에 제일 안전한 피난처라 하였다. 그때에 적병과 토적이 천하에 가득하여 비록 심산유곡이라도 아니 간 곳이 없었다.

삼남 각처의 떠도는 백성들은 이 안전지구로 바퀴살 모이듯 모여들었다. 첫 번에는 식량이 부족하여 군량을 헐어 먹게 하였으나 농사를 지은 뒤에는 군민이 다 풍족하였다. 그러기 때문에 순신이 유진한 곳곳마다 졸지에 마을이 생기고 도시가 생기는 것이었다. 한산도로 모여 들었던 유민들도 많이 해평농장으로 옮겨가게 하고 군관 중에서 농사 감독을 정하여 백성의 편익을 돌보아 주었다.

착량묘의 유래는 그때 유민들과 그 자손들이 이공의 은택을 영원히 잊지 못하여 착량도에 초묘草廟를 짓고 기나긴 세월에 추모봉사追慕奉祀하여 지금까지 전하여 온 것이었다.

명나라 병부상서 석성은 심유경의 진언을 믿고 일본과 외교적 화의를 개시하기로 하였다. 일본의 풍신수길은 연령도 벌써 노쇠하였을 뿐 아니라 조선과 대명의 사정에도 어두워 기어코 조선과 명나라를 때려 부수어 이기겠다는 야심을 가지고 있지만, 그 부하제장들은 대개가 이역만리의 전쟁을 원치 아니하고 어서 본국으로 돌아가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들 행장 등 여러 장수는 싸워서 아무 소득이 없고 공연히 인명만 상실하는 것이라 함이었다. 그러나 오직 청정의 일파는 수길의 뜻을 받들어 실행코자 하였으나 그 세력이 행장일파의 세력에 미치지 못한다고 심유경은 말하였다.

조선ㆍ명나라 사정 어두운 日장군

▲ 명나라 조정에서는 응징설과 허화설이 엇갈렸다. 백제관 싸움에 일본군의 전투력을 무서워하는 무리들은 화의를 들어주는 것이 후환이 없으리라고 주장했다. 결국 허화설이 대두됐다.
이보다 먼저 심유경은 소서비탄수3)라는 일본장수를 청화請和 사절로 데리고 북경에 들어가 석성을 통하여 일본과 강화조건으로 명나라 영락제永樂帝 즉 성조成祖 때에 족리 장군을 일본왕으로 봉작하던 전례에 의하여 수길을 일본왕으로 봉하여 마음을 만족케 하여 전쟁을 멈추게 할 것과 해마다 조공하기를 허락할 것을 청하였다. 이것은 소위 봉封과 공貢의 두 조건이었다.

일본측이 제출한 두 조건에 대하여 명나라 조정에서는 응징설과 허화설이 있었으나 벽제관 싸움에 일본군의 전투력을 무서워하는 무리들은 화의를 들어주는 것이 후환이 없으리라 하여 결국 허화설이 유력하게 되었다.

그러나 봉封은 상관없지만 공貢은 불가하다는 설이 유력하였다. 왜 그런가 하면 수길을 봉왕하는 것은 별로 명나라에 이해관계가 없다하나, 공을 허락하면 일본 관민들이 해마다 명나라 지방에 출입한다면 백해百害가 있고 일리一利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러하여 ‘허봉 불허공’으로 조정의 논의가 결정되었다.

명나라 조정에서는 책봉 정사로 개구리 잘 먹는 임회후臨淮侯 이종성李宗城을, 부사로 양방형楊方亨을 일본으로 파견하기로 하였다. 심유경은 석성에게 많은 기밀비[일본측의 요인을 매수할 돈]를 받아 가지고 이종성의 일행을 따라 한성에 도착하였다.
정리 | 이남석 더 스쿠프 대표 cvo@thescoop.co.kr 자료제공 | 교육지대(대표 장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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