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당 김기환 선생의 이순신공세가(李舜臣公世家) 제37회

[CBS The Scoop] 적군의 부전수가 비밀회의를 하기 이순신은 싸워서 이기기 어려운 장수이니 조선정부의 당파싸움을 이용해 반간계를 쓰는 것이 옳다고 결정했다. 그 운동비 즉 기밀비를 대장대보 자속정가에게 청구해 행장과 청정이 먼저 부산에 건너갔다. 그런데도 일본제장들은 이순신과 정면으로 충돌하기를 걱정했다.

 
원균은 품성이 바르지 못하면서도 교활하여 조정에 세력이나 있는 사람을 대하면 처음에는 우대하며 아첨을 부리다가 그 사람이 만일에 세도가 막히는 날이면 도리어 배척하며 괄시하는 위인이었다. 그런데 임진년 전초에 순신의 은덕을 입어 패전 도주한 여러 가지 죄를 면하고 오히려 승전하여 수급을 바친 공까지 세웠다 하여 순신의 은택이라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러던 것이 차차로 대장의 권위가 회복되어 가면서 삼군의 존대를 받게 되고 순신의 제장이 파적 승전할 때마다 뒤떨어져 돌아다니며 적의 시체를 많이 건져 그 수급을 취하고 또 제장에게서 수급을 하나씩 얻어서 모으는 행각승의 동냥하는 수단을 행하면 제장들도 그 공이 없는 것을 동정하여 매인이 하나씩 주었다. 그렇게 모은 것이 도리어 제장보다 많게 되어서 한 숟가락씩 얻은 밥이 한 주발 밥보다도 많다는 속담 즉 십시일반이 되었다. 그런즉 원균은 사실에 있어서 공은 고사하고 죄가 공보다 컸지마는 조정에서는 이것을 모른다.

이 많은 수급을 조정에 헌공하고 자기의 후원인 당파 모모대관을 사촉하여 조정에 참소하기를 “이순신은 매양 싸움에 임하여 머뭇거리는 것을 원균이 분을 내어 앞서 나가 힘써 싸워 이러한 수급을 베고 대공을 세웠다” 하고 허장성세하며 임금을 기망하였다. 그러던 것이 급기야 선조의 대가가 환도하여 공론이 점차 행해지고 허실과 진위가 차차로 가려지매 원균이 그 기망한 전일의 사정이 드러날까 두려워하여 요로의 대관들에게 뇌물을 쓰고 순신을 백방으로 무함하였다.

그 뒤에 순신이 통제사가 되어 삼도의 수군절도사 이하로 모든 제장을 통할하기에 이르매 이때에 조정에 유성룡 등 동인의 세력이 쇠약하게 되고 서인과 북당이 득세하였다. 원균은 자기의 배후에 있는 세도는 순신이 따라올 바 아니라고 생각하고 그만 순신을 배척하게 되었다. 매매히 적과 대치할 때에도 순신의 지휘명령을 잘 복종치 않는 일이 많았다. 이억기와 이운룡 같은 개결한 사람은 원균을 보고 “우리 몇몇이 국가의 위난한 때 마땅히 협심해야할 것이거늘 어찌 작위의 고하와 권세의 유무로써 다투리오!” 하여 조정하였으나 어둡고 고집스러운 원균은 종시 이억기 등의 회유를 불청하였다.

순신은 원균의 행동을 많이 용서하였으나 원균의 심정이 너무도 음험하고 조정에서는 이일의 무리와 기타 모모대관이 원균의 뇌물에 눈이 어두워져 서로 호응하여 순신을 훼방하기를 여지없이 하였다. 순신도 이 소문을 듣고 헤아리되 공이 높은 자는 위태롭고 참소가 많은 자는 재앙이 온다 하여 순신은 조정에 사직하겠다는 장계를 올려 자기를 면직시켜 몸이 온전하게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여달라고 하였다.

조정에서는 원균의 도리에 어긋난 사정을 알고 이러한 난세에 순신 같은 장수를 면직시킬 수 없다는 이유로 원균을 충청병사로 전임시키고 그 대임에 진주목사 배설裵楔로 경상우수사를 삼았다. 원균은 조정에 있는 당파를 이용하여 순신을 무함하기를 “100만명의 유민流民을 거느리고 삼도의 해왕 노릇을 한다”고 선전하였다.

그해 을미1595년 8월에 체찰사 우의정 이원익이 삼남 각지를 순행하며 군정을 시찰하여 호남지방에 도착하였다. 수군행정에 관계되는 호소를 관청에 올리는 군민이 무수하였으나 이원익은 당석에서 처결하지 아니하고 모두 묶어 가지고 진주로 가서 이순신을 불러 회견한 뒤에 모든 군정을 협의하다가 그 군민들이 올린 서류 수백 건을 묶어놓은 그대로 순신의 앞에 내놓고 순신에게 처결하기를 의뢰하였다. 하나도 사리에 합당치 아니한 것이 없어서 다 공평 정대하고 면밀 철저하게 처결되었다. 도체찰사 이원익을 비롯하여 부체찰사 한효순韓孝純 이하 종사관까지 일일이 검사하여 보고 크게 놀랐다. 자기들은 능히 미치지 못할 바라고 하고 그 재주를 못내 탄복하였다.

전장에서도 행실 바른 이순신

▲ 이순신의 1일 수면은 2시간이 채 안 됐다. 밤을 새울 때가 많았지만 조금도 피로한 기색이 없었다.
이원익은 한효순 이하 종사관을 데리고 진주를 떠나 이순신의 병선에 올라 순신과 동행하여 한산도 진중에 들어왔다. 한산도는 영루가 험고하고 규모와 배치가 주밀하여 실로 하늘이 만든 요새이며 삼남 수로의 인후목이어서 난공불락의 해상 장성長城이었다. 바다를 덮은 전선과 거북선이며 6만의 용맹한 장졸을 두루 점검하고 순신과 걸상을 같이하여 군사 정보를 논의하며 밤을 지내고 이튿날 출발하려 할 즈음에 순신이 조용히 진언하여 “대감이 조정을 대표하여 이곳에 왕림하시매 일반장졸의 심정이 바라는 바이 있사오니 호궤1)라도 한번 하여서 성상께서 불쌍히 여기면 변경의 군정軍情에 서운함이 없게 될까 하오” 하였다.
이원익은 문득 깨달았으나 답하여 “내가 미리 준비한 바가 없은즉 어찌 할 수 없어 매우 미안하오” 하였다. 순신은 “대감이 허락만 하신다면 소인이 마련할 터이니 염려할 것 없소” 하였다. 이원익은 기대한 이상이라 기뻐하였다. 순신은 이에 담당자에게 명하여 소 30마리를 잡게 하고 산해진미를 요리하며 수천 독의 술을 빚어 삼도수군을 먹이고 성은이 두터우니 나라를 위해 힘을 다할 것을 선유하고 활쏘기와 씨름판을 벌여 상을 많이 주고 하였다. 삼군은 임금의 은혜에 감격한다. 이원익이 떠날 때에 순신에게 휘하 제장 중에 순신의 지위를 가히 대신할 만한 장수의 재목이 누구인지를 물었다. 순신은 이억기 이순신李純信 이운룡 등 제장을 천거하였다.

순신이 진에 머무른 지 4ㆍ5년이로되 여색은 일체 가까이 한 일이 없고 잘 때에도 옷끈을 끄르지 아니하며 잠도 2시간가량 자고나면 곧 부하 제장중에 군무를 의논하기에 밤을 새울 때가 많되 조금도 피로한 기색이 없었다. 순신의 정신력은 보통사람에서 여러 배 이상으로 건전하였으며 주량도 순신의 주량은 대단히 커서 참 장사의 주량이어서 제장이 막급이었다. 혹시나 연회할 때 이억기 이하 제장으로 더불어 많이 마시고 즐기고도 취태는 보이지 아니하며 닭이 울 때가 되면 반드시 일어나 촛불을 밝히고 군중 문서를 살피며 계책을 강론하여 조금이라도 취해서 혼미한 자태가 없었다고 제장들은 말하였다. 참으로 ‘유주무량有酒無量에 불급어란不及於亂’이던 것이었다.

병신1596년 12월에, 일본의 풍신수길이 명나라 책봉을 받는 식은 거행하였다하나 다만 책봉뿐이요, 땅을 떼어주는 것도 없고 또 통상조차 허락하지 아니하고 조선에서도 두 왕자를 돌려보낸 사례사절도 오지 아니할 뿐더러 이순신에게 연전연패한 수모를 갚지 못하여 일본제국의 위신을 잃었다는 것이 새로 분이 나서 풍신수길은 부전수가 가등청정 소서행장 등 장수에게 1000척의 병선과 14만의 대군을 주어 정유1597년 1월에 다시 조선을 침략케 하였다. 이것을 정유재란이라 하고 일본에서는 경장역慶長役이라 하였다. 이때 원정군의 조직은 이러하다.

선봉 제1진
주계두主計頭 가등청정加藤淸正(가토 기요마사) 1만인

선봉 제2진
섭진수攝津守 소서행장小西行長(고니시 유키나가) 7000인
대마수對馬守 종의지宗義智(소 요시토시) 1000인
형부소보刑部小輔 송포진신松浦鎭信(마쓰라 시게노부) 3000인
수리대부修理大夫 유마청신有馬晴信(아리마 하루노부) 2000인
대촌희전大村喜前(오무라 요시아키) 1000인
대화수大和守 오도순현五島純玄(고토 스미하루) 700인

제3진
갑비수甲斐守 흑전장정黑田長政(구로다 나가마사) 5000인
모리승신毛利勝信(모리 가쓰노부) 2000인
도진풍구島津豊久(시마즈 도요히사) 800인
고교원종高橋元種(다카하시 모토타네) 600인
추월종장秋月種長(아키즈키 다네나가) 300인
민부대보民部大輔 이동우병伊東祐兵(이토 스케타카) 500인
궁내대보宮內大輔 상량뢰방相良頼房(사가라 요리후사)2) 800인
중부대보중서中部大輔中書 협판안치脇坂安治(와키자카 야스하루) 1200인

제4진
가하수加賀守 과도직무鍋島直茂(나베시마 나오시게) 1만2000인

제5진
병고수兵庫守 도진의홍島津義弘(시마즈 요시히로) 1만인

제6진
토좌수土佐守 장종아부원친長宗我部元親(초소카베 모토치카) 3000인
등당고호藤堂高虎(도도 다카토라) 2800인
내도통총来島通総(구루시마 미치후사) 600인
관야정영菅野正影(스게노 마사카게) 700인
중천수성中川秀成(나카가와 히데시게) 1500인

제7진
아파수阿波守 봉수하가정蜂須賀家政(하치스카 이에마사) 7000인
아락두雅樂頭 생구일정生駒一正(이코마 가즈마사)3) 2400인
좌근위소장左近衛少將 입화종무立花宗茂(다치바나 무네시게) 5000인
모리수포毛利秀包(모리 히데카네) 1000인
천야행장浅野幸長(아사노 요시나가)4) 3000인
입화직차立花直次(다치바나 나오쓰구) 1000인

사령司令 제8진
안예수安藝守 모리수원毛利秀元(모리 히데모토)5) 3만인

대장大將 제9진
비전재상備前宰相 부전수가浮田秀家(우키다 히데이에) 1만인
참모총장은 흑전효고黑田孝高(구로다 요시타카)6)요, 총대장은 소조천수추小早川秀秋(고바야카와 히데아키)7)이니 당시 나이 16세였다. 수추는 제10진으로 정병 2만을 거느렸다.

총세 합 15만 4000여인의 대군을 총대장 소조천수추의 통솔 하에 명호옥 행영에서 출발하기 전에 군사회의를 열고 이번 출정은 한성이북으로 출병하지 아니할 것, 전라도를 점거할 것, 남삼도의 이순신의 수군을 격멸할 것, 이 삼대강령을 의결하고 조선의 곡창인 전라도를 점령하자면 먼저 이순신의 수군을 깨뜨리지 아니하고는 착수할 수가 없으니 이순신을 치기가 큰 문제가 아니 될 수 없었다. 수추는 전쟁경력도 없는 소년이었으나 부전수가 이하 가등청정 소서행장 등 장수는 다 이순신을 치기를 꺼렸다.

이에 부전수가 이하 제장은 비밀회의를 하기를 이순신은 싸워서 이기기 어려운 장수이니 조선정부의 당파싸움을 이용하여 반간계를 쓰는 것이 옳다고 결정하고 즉 기밀비를 대장대보 장속정가에게 청구하여 행장과 청정이 먼저 부산에 건너갔다.

이렇게 일본제장들은 이순신과 정면으로 충돌하기를 가장 걱정하였다. 도저히 승산없는 싸움은 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영리한 소서행장은 정탐을 내놓아 순신의 군비와 실력을 알아보았다. 순신은 삼남 각 요해처에 거미줄같이 철쇄鐵鎖 및 포대砲臺 망대望臺 봉수대烽燧臺와 군비병軍備兵을 두어 물 한 방울 부어도 샐 틈 없이 방비를 엄밀히 하여 놓았으며 군량과 식염 화약 건어물 등이 넉넉히 3ㆍ4년 동안에 이순신의 삼도 주사 5ㆍ6만 대군을 먹일 만한 저축이 있었다. “명나라는 오히려 두려워 할 것이 없지마는 이순신은 큰 두통거리다” 하는 말이 일본장수들의 입버릇이 되었던 말이었다.

간신의 모략으로 억울한 죽음 당해

▲ 성품이 단정하고 강개했던 김덕령의 죽음이 알려지자 백성들이 원통해했다.
8월에 조선조정에서 충용장군忠勇將軍 형조좌랑 김덕령을 사형시켰다. 역적 이몽학李夢鶴의 공초에서 김덕령과 함께 도모하였다고 진술했다는 것을 전해 듣고 선조는 크게 놀라 조정의 신하들에게 물었다. 신하들은 김덕령이 용력이 절륜하니 쉽게 잡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 유성룡은 “승지 서성徐渻이 영남으로부터 왔사오니 반드시 그 반적과 함께 도모한 진위와 잡아올 방략을 잘 알까 합니다” 하였다. 서성은 말하되 “김덕령은 충의지사이니 모반할 리는 만무합니다” 하고 서성은 다시 자원해서 김덕령을 잡아오겠다고 하였다. 김덕령은 어명을 받고 조용히 결박을 받았다. 김덕령의 명성을 미워하는 김응서 이시언의 무리가 도원수 권율을 통하여 백방으로 모해 무함하였다.

선조는 김덕령을 친히 국문하여 보매 모반한 형적이 없었다. 선조는 애석히 생각하고 좌우를 돌아보았다. 좌우에 선 삼정승은 묵묵무언이었다. 유성룡은 “이몽학의 문초에 여러 번 나왔으니 옥에 가두어 두고 먼저 적당들을 다 문초하면 죄의 유무를 알 것이니 그때 처분할까 합니다” 하였다. 판의금判義禁 최황崔滉 등이 유성룡에 반대하여 상주하되 곧 엄형하기를 청하였다. 선조는 재삼 난감하였으나 신구8)하여 주는 사람이 없었다. 선조는 참 우유부단하였다.

김덕령은 죽음에 이르러 “신은 1만번 죽음의 죄가 있습니다. 어머니 돌아가심에 3년상을 마치지 못하고 원수와 같은 하늘 아래 있음이 분하여 슬픈 정을 끊고 상복을 벗었습니다. 칼을 들고 일어나 종군한지 여러 해에 공도 세우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충을 펴지도 못하고 도리어 효를 굽히게 된 것입니다. 신의 죄가 1만번 죽어도 피할 수 없습니다” 하고 형장의 원혼이 되어버렸다.

김덕령은 몸은 단소하나 기력이 비할 데 없고 백근 철추를 사용하고 천리마를 타고 달리며 성품이 단정하며 강개하고 시에 능하였다. 창의기병한 지가 3년이 되었으나 그때에 화의和議가 한창 논의될 때라 적군과 싸워보지도 못하고 적진 근처에서 호랑이 2마리를 때려잡아 적에게 팔았더니 적은 그 용맹을 두려워하였다. 그 죽음을 듣고 적들은 안심하고 남도의 백성들은 원통하게 여기지 아니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통제사 이순신은 거제도 동단의 적의 소굴을 없애고자 하여 거제현령 안위와 군관 김난서金鸞瑞 신명학辛鳴鶴 등을 불러 밀의하고 용사 박의검朴義儉을 조용히 불러 충의로써 장려하여 죽음으로써 나라에 보답하기를 약속하고 계책을 가르쳐주어 기회를 기다려 적의 소굴에 불을 놓기로 하였다. 순신은 따로 군사를 거느려 멀리서 응대하고 안위는 제장을 인도하여 병선을 몰고 돌진하였다. 용사 박의검 등 10여인은 거지꼴을 하고 신변에 화기火器를 감추고 출발하여 바람을 타 용감하게 불을 지르고, 안위 등 제장의 병선은 포구 안으로 진격하여 천지현자 각양 대포를 올려 쏘았다. 적은 불의의 습격을 당하여 적의 가호 1000여 집과 화약고 두 곳과 군량미 수만석과 병선 20여척을 일시간에 잿더미가 되게 하였다. 적군의 사상도 무수하였는데 패잔한 적은 멀리 산상에 모여 순신의 병선을 바라보고 통곡하였다. 순신은 승전고를 울리고 한산도로 돌아왔다.

이 보고를 받은 웅천에 유진한 소서행장은 두려워서 순신을 근심하여 가등청정과 거짓으로 시기하는 모양을 드러내어 모사 요시라를 시켜 경상우병사 김응서에게 밀고서를 보냈다. 글에는 이런 구절을 적었다.
“일본에서 금번에 다시 출병하게 된 것은 주전파인 가등청정의 주장으로 된 것이니 당초부터 강화를 주장하는 우리로서는 청정을 원수로 본다. 우리는 조선장수의 손을 빌려 청정을 죽이려 한다. 조선 측에서 수군명장 이순신을 보내어 청정이 나오는 길목을 지키고 있으면 우리가 청정이 탄 병선을 가르쳐 줄 터이니 백전백승하는 이순신의 전략수완으로 청정을 베도록 하라. 청정이 비록 웅맹하나 이순신의 상대는 못된다. 청정만 죽고 보면 주전파가 몰락이 되어 양국의 강화가 성립되고 우리 수십만의 원정군이 그리운 고향에 돌아가게 될 것이다.”

요시라는 일본군중의 주화론자인 소서행장 종의지의 부하이며 또 조선어를 잘하기 때문에 김응서는 그를 환영하였다. 요시라는 행장의 서신을 전한 뒤에 김응서를 보고 “청정이 대군을 거느리고 1월 7일에 나올 예정이니 이순신이 중로에서 쳐 사로잡게 하시오. 두 나라가 다시 싸우지 아니하고 무사하게 될 것이오” 하고 요시라는 말을 이어 청정과 행장이 전부터 사이가 좋지 못한 것을 재주 있게 꾸며 말하였다.

시기 많고 어리석고 무식하고 허욕허영심이 가득한 김응서는 이 말을 믿었다. 뇌물도 많이 받고 하여서 대구에 유진한 도원수 권율에게 이 사실과 적의 내정이라는 것을 보고하고 요시라를 소개하였더니 권율도 역시 요시라의 꾸며댄 말에 딱 속아 넘어가 그렇게 생각하고 그 사정을 조정에 장계를 올렸다. 온통 조선장수란 자들은 도원수니 병마절도사이니 멍텅구리 노릇만 하였다.

당쟁으로 얼룩진 조선

 
선조는 권율의 장계를 보고 비변사 제신에게 물었다. 이때 유성룡의 세력이 떨어지고 서인 북당이 정권을 잡게 되어 몇 해 동안 전쟁이 쉰 틈을 타서 당쟁이 불 일듯 일어났다. 밤낮으로 피차에 꼬투리와 허물을 찾아내어 죽여야 하느니 베어야 하느니 하는 명분론과 성토론이란 것을 주고받고 하여서 경국지책은 말하는 이가 없었다.

해평부원군 우찬성 윤근수는 “참 이순신을 시켜 청정을 잡을 좋은 기회가 왔소” 하고 권율이 진언한 대로 하기를 주장하였다. “청정과 행장 두 사람이 비록 틈이 있다 하나 그놈들이 저의 나라를 위하기는 매일반일 것이오. 들은즉 청정이 우리 주사를 무서워한다 하고 더욱이 이순신의 용략을 겁내며 기피한다 하더니 서로 짜고 무슨 흉계를 자아냄인지 알 수 없소. 자고로 기모와 비책이 적장으로부터 나와서 성공하였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소” 하였다. 황신의 이 말은 참 만리 앞을 보는 식감이 있었다.

황신은 일본에 오래 있어 적의 사정을 잘 알고 있을 뿐더러 본래부터 명민하고 또한 담략이 있다 하여 유성룡이 이렇게 말을 내어 미관말직인 문학文學에 있던 것을 특별히 천거하여 접반사니 통신사니 하는 외교방면으로 내세운 영재였다. 지금은 비변사 부제조副提調의 직에 있었다. 선조는 영의정 유성룡을 돌아보며 황신의 말이 옳은 것 같다 하였다. 유성룡은 가부를 말하지 아니하고 다만 끄떡일 뿐이었다. 유성룡에서 말 한마디가 나와서 이순신을 두둔한다면 또 당쟁이 일 것인 때문이었다. 자기의 지위가 참 바람 앞의 촛불인 것을 자각한 까닭이었으나 혹자는 그 침묵 불언하는 것을 풍자하여 유정승의 침은 종기를 다스리는 특효약이라 하였다. 대개 종기를 없애는 데는 오래 말하지 않고 있던 침을 바르기 때문이었다.

선조는 심령이 밝아 조정이 요시라의 반간계에 넘어간 중에서 부제조 황신을 삼도수군 위유사慰諭使를 삼아 비밀히 이순신에게 보내어 그 내막을 알아오게 하였다.

이때 순신은 정탐을 놓아 수길의 처조카인 소조천수추가 총대장이 되고 흑전효고와 부전수가가 군사 계획을 주장하고 가등청정과 소서행장이 좌우선봉이 되고 15만 대군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넌다는 정보를 듣고 순신은 전쟁준비에 분주하였다. 충청 전라 경상의 삼도 연해는 갑자기 활기를 띠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 많은 장졸과 백성들까지도 하나도 겁내는 사람이 없음은 다 이순신의 용략으로 ‘전필승戰必勝 공필취功必取’를 굳게 믿는 까닭이었다. 임진년 이래 6년 동안에 이순신의 군략적 지모와 정치적 수완과 인격적 태도를 체험한 장졸과 인민들은 완전히 이순신장군과 동심일체를 이루어 사생을 같이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인 줄로 알고 있다.
정리 | 이남석 더 스쿠프 대표 cvo@thescoop.co.kr 자료제공 | 교육지대(대표 장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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