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당 김기환 선생의 이순신공세가(李舜臣公世家) 제38회 ①

[CBS The Scoop] 서인 대관 몇 사람과 북당들 중에도 소위 유식계급이란 작자들은 말하기를 이순신을 잡아오기는 난문제가 아니라 하였다. 그는 순신의 충성만은 속마음으로 잘 아는 바였다. 왕명이라 하면 그는 두말없이 잡혀 올 것을 믿는 까닭이었다. 금부도사 10여인이 건장한 나졸을 많이 데리고 한산도에 들어온 것은 1월 25일이었다.

 
황신이 위유사로 한산도에 이르매 이순신은 성대한 의식을 차려 환영하였다. 위유사란 뜻은 왕명을 대표하여 바닷가에서 고생하는 삼남 장사의 노역을 위문하는 사절이었다.

황신은 순신을 처음 보았다. 그 명성은 일본에 있을 때부터 많이 들었다. 그 풍채가 장대함과 자태가 단아함이 문무겸전인 것을 알게 되어 자연 경모하는 정이 간절하였다. 황신은 그 삼국의 인물을 널리 본 사람이었다. 더구나 수백척 병선에 6만 정예의 사졸이 마치 잠이나 든 듯이 정숙정제하게 자기를 맞이하는 모습을 볼 때에 마치 꿈의 세상에나 온 것이 아닌가 하였다.

서울서 들은즉 이순신이 한산도에서 궁궐 같은 제승당과 운주각運籌閣이란 집을 짓고 왕공과 같은 호화로운 거처에서 행동을 하고 100만명의 유민을 편안히 살 곳을 정해 주어 삼도의 해왕노릇을 한다느니, 조정의 처분을 듣기도 전에 자기의 마음대로 논공행상을 하여 사사로운 정을 쓴다느니, 전공이 많은 원균을 배척하였다느니 하는 별별 참언이 많더니 급기야 한산도에 와서 본즉 순신의 거처도 검소하여 사졸의 거처와 다름이 없었다.

황신은 생각하되 그 참언의 출처를 몰라서 궁금하였다. 아마도 원균 이일 김응서 권율 윤근수 이산해 무리의 시기심과 당파 싸움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하고 시사를 탄식하며 영웅을 위하여 눈물을 뿌렸다.

황신은 순신에게 선조의 분부를 전하고 행장과 요시라의 밀고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순신은 그 부당不當 불가不可 불연不然한 뜻으로 다섯 가지 조목을 들어 진술하였다.

첫째로, 청정과 행장이 비록 서로 반목한다 하나 적국이 되는 우리에게 저의 나라 군사상 비밀을 누설할 리가 있겠는가? 만일에 군기의 비밀을 누설한다면 역적의 죄를 범하는 것이니 청정과 행장은 철없는 어린아이가 아니고 풍신수길의 휘하에 신임을 받는 백전의 명장이니 그럴 리가 없다.

둘째로, 설사 행장의 말과 같이 그날 그 시에 청정의 병선이 온다 하더라도 먼저 그럴듯한 말로 우리 수군을 유인할 때에는 반드시 적들은 해로에 복병을 많이 베풀거나 무슨 음흉한 계책을 사용하였을 것이 뻔하다. 만일 우리가 병선을 많이 끌고 간다면 적이 모를 리가 없고 그렇다고 적게 끌고 간다면 도리어 적에게 반격을 받는 것은 내가 알고도 함정을 찾아가는 셈이니 어찌 적의 지휘를 받아 가지고 적을 친단 말인가. 비유컨대 나방이 불을 찾아 드는 꼴이다.

셋째로, 수길이 수전에 연패한 분을 풀려고 병선을 많이 지었다 하니 적은 전국의 힘을 기울여 오거든 우리는 다만 삼도의 수군만을 가지고라도 지리의 선점과 조수의 순역과 해양도서의 깊고 얕음을 잘 이용하여 응변치 아니하면 아니 될 것이다. 이제 망망한 대해에서 수많은 적의 함대와 수 적은 우리 함대가 서로 맞아 싸운다 하면 우리가 100번 패할 근심이 있을지언정 한 번 이길 소망은 없을 것이다.

요시라 술책에 세상이 넘어가다

▲ 황신은 일본의 계략을 잘 아는 순신의 설명을 듣고 절절이 옳다고 무릎을 치며 탄복했다.
넷째로 적이 아무리 많은 병선을 끌고 와서 부산부근 일대에 근거지를 잡고 있더라 하여도 이 한산도 요새를 깨뜨리지 못하고 전라 충청의 연해를 점령하지 못한 이상에는 조선의 제해권은 얻을 수는 없을 것이니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우리는 요해지처를 지키고 있다가 기회를 보아 적을 칠 때에는 모든 도서와 항만이 다 우리의 도움이 될 것이다.

다섯째로 설사 망망대해에서 서로 싸워 적을 이긴다 하더라도 적은 저의 본국방향으로 달아날 것이니 우리는 추격한다 하여도 일본까지 따를 수 없은즉 아무 소득이 없다. 만일에 이편이 불리하다 하면 앞에는 적의 함대가 가로막아 싸울 것이요, 뒤에는 부산 김해강의 적의 소굴에서 내달아 전후로 협공할 것이니 이편은 진퇴유곡이 되고 말 것이다.

황신은 순신의 설명에 절절이 옳다고 무릎을 쳐 탄복하였다. 황신은 전년에 통신사로 일본에 가서 본 풍신수길의 형편과, 오래지 않아서 수길의 대군이 또다시 침범할 것을 말하고, 겸하여 근일 서울의 정계에서 순신에 대한 훼방이 심하다는 정세를 말하여, 황신은 영웅을 위하여 정을 나누고 시사를 탄식하였다.

며칠을 머물렀다가 한산도를 떠나 서울에 득달하여 복명하기도 전에 서인 북인들이 몹시 떠들어서 순신에게 체포명령이 내렸다. 마음이 약하고 주장이 없는 선조는 황신의 회보도 듣기 전에 나라의 만리장성을 스스로 헐어버렸다.

황신이 떠난 지 며칠이 못되어 정유1597년 1월 21일에 도원수 권율이 한산도 진중에 들어왔다. 순신은 도원수를 맞는 성대한 환영을 하였다.

권율은 순신을 군례로 서로 보고 난 다음 “요시라의 내고에 의하면 적장 청정이 근일에 또 나온다 한즉 영공은 곧 주사를 거느리고 일부러 일러주는 요시라의 약속을 이행하여 좋은 기회를 잃지 마오. 나는 분망한 군무로 인연하여 지체할 수 없소 부디부디 요시라가 알려 주는 청정을 사로잡게 하오” 하고 권율은 순신과 그 내막 사연을 말할 시간의 여가도 없이 군무가 바쁘다는 핑계로 곧 배를 돌려 한산도를 떠난 것이었다. 참 권원수란 싱거운 작자였다.

순신은 분하여 탄식했다. 권율이란 작자가 이렇게 우매하여 일개 간첩인 요시라에게 소위 일국 도원수라는 작자가 우롱을 당하고 속임을 당하고 심부름을 받다니 참으로 조선에는 사람이 없나 하여 울분하였다.
순신은 권율을 보낸 뒤에 시사를 탄식하며 조정을 근심하였다. 행장 요시라의 술책에 온 세상이 속임을 당하니 순신은 분이 나서 밥도 넘어가지 않고 누워도 잠들지 못하였다. 시 두 수를 지어 밤을 지새우고 수루에서 칼을 만지며 홀로 앉았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또다시 시 한 수를 읊었다.
문정공文正公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말했다.

余每讀岳武穆詩 未嘗不擊節而三復 其忠毅雄勇固其所也 至於文詞 亦何其奇且新也 李忠武閑山之作 可謂千載而同符者也 我孝宗大王嘗欲北伐中原 讀忠武李公詩 極有漢帝鉅鹿意

내가 매양 악비의… 시를 읽을 때 무릎을 치며 세 번 되풀이하여 읽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 굳센 충성과 장한 용맹은 본디 당연한 것이지만 그 글에 이르러서까지 또한 어찌 그리 기이하고 참신한가. 이충무공이 한산도에서 지은 시는 1000년 이후에도 서로 부합하는 것이라 하겠다.… 우리 효종대왕이 항상 중원을 북벌하고자 하셨는데… 이공의 시를 읽으시니 한나라 황제가 거록을 생각하던1)것과 같은 뜻이 있으셨다.
문충공文忠公 좌의정 외재畏齋 이단하李端夏가 말했다.

嗚呼 公之勳烈蓋國家 貞忠貫日月 我國人之思詠者 垂宇宙而將不泯矣 惟此咳唾之遺 卽其精神所寓 其曰 誓海魚龍動 盟山草木知 可見其壯志精忠矣

아아, 공의 공훈과 의열은 국가를 덮고, 절개와 충성은 일월을 꿰뚫었다. (그 사적은 역사서에 실리고 금석문으로 새겨져) 우리나라의 사모하고 노래하는 사람들에게 (전파되어) 우주에 드리워져 장차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생각하건대 공이 읊어 남긴 이 구절에 그 정신이 머물러 있다. 말하였으되 ‘바다에 맹세하니 어룡이 꿈틀대고 산에 맹세하니 초목이 아네’ 한 데서 장한 뜻과 지극한 충성을 볼 수 있다.2)

 
제장들도 순신의 답답한 마음을 위하여 비분강개함을 금치 못하고 많이 순신의 시에 화답하였으나 여기에는 기록하지 아니한다.

그 이튿날 순신은 권원수의 영대로 청정을 잡으려고 적의 간첩인 요시라가 지정하는 적의 병선을 치려고 함대를 몰고 가덕도로 나가서 요시라 등 적장의 동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요시라는 순신의 진중에는 감히 발을 들여놓을 수는 없었다. 권율 김응서의 진은 패상극문군3)과 같아 아이들 장난으로 보고 드나들지만, 이순신의 눈은 곧 조요경照妖鏡이며 이순신의 칼은 곧 항마검降魔劍이라 만일에 섣불리 갔다가는 군문에 효수되기를 면치 못할 것을 저희들도 자각하는 때문이었다.

소서행장은 또 요시라를 보내어 김응서를 찾아와서 고하기를 청정이 조선 땅에 상륙하였다는 말과 이순신이 가덕도에까지 와서 가등청정을 사로잡지 아니하고 일부러 놓아 보냈다는 말과 청정이 나올 때에 대마도에서 순신의 함대가 습격할까 두려워하여 순신에게 폐백과 뇌물을 많이 보냈다는 말을 밀고하였다. 김응서는 요시라의 말을 믿고 그대로 대구에 있는

 
권율에게 보고하고 권율 역시 그 말을 믿고 그냥 그대로 조정에 장계를 올려 사실이 그렇다고 하여 이순신을 무함 모해하였다.

김응서와 권율은 온통 행장 청정 요시라에게 속아서 속았다기보다 농락을 당하여 그 대변자가 되고 그 심부름꾼이 되었다. 사실은 매수가 되었다. 순신의 전공이 자기보다 높은 것이 미워서 모해코자 하는 심리가 요시라의 반간계와 합하여 폭발되는 행동이었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었다.

조정에 있는 무리는 권율과 서로 부르고 답하며 이순신을 베어야 한다느니 죽여야 한다느니 하는 상소가 하루에도 3~4차씩이나 일어났다. 범같이 무섭다는 청정을 그들은 그리 쉽게 잡을 것이던가? 조정은 참 허무하였다. 윤두수는 순신의 죄명을 지어 망상요공지죄4)라고 상소하고 윤근수는 종적해국지죄5)라 하여 별별 죄명을 덮어씌웠다.

그중에도 박성朴惺이란 자는 상소하기를 “적장 청정의 뇌물을 받고 순신같은 용략으로 능히 잡을 수 있는 청정을 놓아 주었은즉 이는 매국의 죄이니 처참하소서” 하였다. 유성룡과 이순신의 공명을 시기하는 서인과 북당은 사건의 유무와 이유의 허실곡직도 모르고 전부가 떠들고 일어났다. 비유컨대 개 한 마리가 짖음에 여러 개들이 같이 짖음이요, 닭 한 마리가 우니 여러 닭들이 같이 우는 격이었다. 그러나 그중에도 경림군 김명원만은 이순신을 정대한 사람이니 그렇지 않으리라고 말을 하고 우의정 이원익은 선조의 앞에서 역설 변명하되 그가 체찰사로 전년에 한산도에 갔을 때에 본 것을 들어 순신의 충성을 증명하였다.

첫째로 순신이 검소하고 사졸과 고락을 같이 하는 것
둘째로 군법이 엄숙하고 군령이 간명한 것
셋째로 군민이 모두 순신을 부모와 같이 따르는 것
넷째로 청렴 개결하여 진중에 한 여자가 없는 것
또 체찰사의 명의를 빌려 삼군을 호궤하고 선조의 뜻을 선유하던 것을 낱낱이 말하여 변명하였다.
선조는 이원익의 말을 듣고 순신의 충성을 짐작하나 좌우 제신이 하도 순신의 죄상을 적발하므로 성균관 사성司成 남이신南以信을 한산도로 암행어사를 시켜 그 내정을 염탐하여 오기를 명하였다.[또 보내지 말고 먼저 보낸 황신이 오거든 물어보지.]

선조가 특별히 성균관 사성을 택하기는 아무쪼록 정치에 관계가 없는 대학교 교수 격인 사성을 당파관념에서 초월한 한학자를 보낸 것이었다. 그러나 남이신은 공정한 사람은 아니다. 도중에서 백성과 군인들은 조정의 경알6)이 심하다는 말을 듣고 또 어사가 내려온다는 말을 듣고 이순신이 지극히 공정하고 사사로움이 없으며 성충 보국함을 길을 막고 호소하여 설명하였다. 만일에 순신이 체직이 되고 보면 백성은 어육이 되고 삼남은 수라장으로 화한다는 뜻으로 호소하며 덕을 칭송하는 자가 수를 셀 수 없었다. 그러나 남이신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남이신의 심중에는 금번에 이순신만 무함하여 집어 넘긴다 하면 옥당이나 한림 한 자리는 갈 데가 있지 않느냐 하는 벼슬 욕심이 열중하였던 것이었다. 한산도를 잠깐 다녀 순신도 보지 않고 진주로 들어가 김응서를 찾아보고 대구로 돌아와 권율과 무슨 요담을 한 연후에 서울로 돌아왔다.

남이신이 복명한 보고는 적장 청정이 병선 한 척만을 타고 조선으로 건너오다가 바다에서 역풍을 만나 조그마한 절해고도에서 배가 암초에 걸려서 7일 동안이나 있었는데 행장은 곧 요시라를 이순신에게 보내어 청정을 사로잡기를 독촉하였으나 순신은 청정의 뇌물을 받고 요시라의 말을 불청하였다고 고발하였다.[참 거짓말 접장接丈이다.]

조정에서는 남이신의 이 보고를 보고 이순신을 허튼소리로 임금을 속였다는 죄로 금부에 잡아들이기를 명하였다. 이에 원균과 이일의 무리는 더욱 기회를 타서 유언비어를 퍼뜨리되 순신이 100만명의 유민과 천척의 병선을 갖추고 삼도의 해왕 노릇을 할 야심을 품었다고 하였다.

순신의 충성 왜곡하는 조선 조정

▲ 이순신을 잡으러 왔다는 말을 들은 사졸과 백성들이 물 끓듯 했다.
이제 이순신을 잡아오는 데 대하여 큰 걱정이 생겼다. 그 당시에 호랑이떼와 같은 청정 행장의 무리 일본장수들도 못 당해내는 이순신을 행장과 청정 같은 놈들이 뇌물을 주고 살려 주옵소서 한다는 이순신을 무용은 분육7)과 같고 지모는 귀신과 같다는데 잡혀올 것이냐가 문제가 되는 때문이었다. 만일에 항거를 한다면 조선의 힘은커녕 명나라에 청병을 하여서라도 잡을 수 없을 것이라 운운 하였다.

그러나 이때에는 당쟁의 우두머리이던 정철 유홍 두 사람은 다 죽고 오직 서인 대관 몇 사람과 북당들 중에도 소위 유식계급이란 작자들은 말하기를 이순신을 잡아오기는 난문제가 아니라 하였다. 그는 순신의 충성만은 속마음으로 잘 아는 바였다. 왕명이라 하면 그는 두말없이 잡혀 올 것을 믿는 까닭이었다. 금부도사 10여인이 건장한 나졸을 많이 데리고 한산도에 들어온 것이 1월 25일이었다.

이통제 대감을 잡으려 왔다는 말을 듣고 사졸과 백성들은 물 끓듯 하였다. 그때 순신은 없었다. 소위 도원수란 작자 권율의 장령을 받아 청정을 잡으려고 가덕도에 진군하고 청정이 오는 배를 정탐하고 있었다. 그러나 항왜들의 보고에는 청정이 1월 14일에 대함대를 인솔하고 바다를 건너 나와 양산강에 들어와서 양산군수를 격파하고 울산 서생포의 옛 진지로 옮아갔다고 하였다. 그런즉 권율이 한산도에 들어오기도 전이었다. 그때에 권율은 일개 허수아비처럼 되어 김응서가 놀리고 요시라가 놀리고 또 누구누구가 놀리고 하였다.

금부관원들은 다시 배를 타고 가덕도 진중으로 가서 어명을 전하고 즉석에서 결박하였다. 전함대는 한산도로 돌아왔다. 통제사대감이 잡혀가시면 우리는 적의 손에 다 죽는다고 군사 백성 할 것 없이 곡성이 산과 바다를 진동하였다.

조정에 간신놈들이 우리 대감을 시기하여 우리가 다 죽게 된다고 하여 금부도사 앞에 애원하며 등장8)을 들였다. 혹 더러는 “이 경관9)놈들을 다 죽여라, 이 간신놈들!” 하고 폭언을 하는 군사도 있었다. 처음에는 매우 거만하던 금부관원들도 군민들이 이렇게 분개하여 서두르는 모습을 보고 겁이 나서 순신의 앞에서 “대감, 이것 큰일 났소” 하고 벌벌 떨었다. <다음호에 계속>
정리 | 이남석 더 스쿠프 대표 cvo@thescoop.co.kr 자료제공 | 교육지대(대표 장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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