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당 김기환 선생의 이순신공세가(李舜臣公世家) 제42회

순신은 말에서 내려 백성을 위로했다. 피난을 가면 거기도 적병이 올지 모르고 또 깊은 산골짜기에는 도적과 맹수의 환란이 없으란 법이 없으니 다들 집에 돌아가 생업에 전념하라고 타일렀다. 순인은 “여러분 중에 젊으신 이는 나라일이 위급하니 나를 따라 종군 출전하기를 바라오”하고 권고하였다. 그러하여 그 자리에서 장정 30여인이 순신의 부하되기를 자원하였다.

 
이때에 이순신은 백의종군이란 벌로 초계평야에서 군수용 채소밭을 감독하고 있었다. 전날의 부하이던 제장들은 그래도 찾아와서 따르는 자가 날로 증가하여 많아간다. 남해목장으로부터 전마戰馬를 사들여 제장에게 나누어주었다. 또 우병사 김응서는 환도環刀 12자루를 보내고 순신에게 은근한 서간까지 왔다. 그때에 조선 장수들은 다 이순신을 아니 무서워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그중에서 숭배하는 이도 있었으나 또 자기보다 잘난 사람을 시기하는 자와 그 공훈과 재략을 시기하는 자도 적지 아니하였다.

그 당시에 이순신과 김덕령 이 두 사람은 실로 뭇사람보다 뛰어난 인물이어서 일본과 조선에 장수라고 하는 사람은 다 무서워하여서 김응서 같은 자도 이번에 순신은 금옥에서 꼭 죽을 줄만 알았더니, 김덕령은 죽었으나 순신은 살아나서 다시 백의종군으로 전장에 나타났다. 김응서는 전일사를 생각하매 일층 더 겁이 났다. 순신은 김응서의 전일사를 조금도 개의치 아니한다. 김응서는 순신 같은 인격을 진작 몰라본 것을 후회하고 이렇게 간곡히 존대하였다.

순신은 김응서가 보낸 보검을 제장에게 나누어 주어 차게 하고 천험인 진주 정개鼎蓋산성을 자기 근거로 하여 지키려고 하고 손수 화전火箭을 다시 연구 발명해내던 판이었다. 이때에 도원수 권율은 고성에까지 가서 원균을 독촉하여 요시라의 지휘대로 청정을 잡으라고 자꾸 서둘다가 결국 칠천도의 대패보를 받고 크게 놀라고 겁을 내어 일본군이 물밀듯 쳐들어올 줄 알고 무서운 생각이 나서 고성에서 사천으로 또 진주로 물러났다.

왜 자기는 나아가 싸우지도 못하던가. 자꾸자꾸 물러나 진주에서는 과도직무의 대군이 온다는 말을 듣고 창황히 진주를 버리고 초계로 달아나 종군하는 순신을 불러보고 권율은 부끄러운 안색으로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은즉 후회한들 무엇하겠소. 모두가 내 불찰이니 대감을 대할 낯이 없소. 대감은 기왕지사는 개의할 것 있소? 무슨 방책을 내게 일러 주오” 하고 간곡히 묻는다.

순신은 칠천도 대패보를 듣고 6년 동안 함께 지냈던 옛날의 부하 이억기 이영남 이외 전사한 제장을 생각하여 눈물을 뿌렸다. 순신은 권율을 보고 “여보, 사또. 승부는 병가상사이니 놀랄 것이 무엇있소. 소인이 곧 연해안으로 내려가 패산한 장졸을 거두어야 하겠소. 만일에 대중이 멀리 흩어지는 날에는 다시 모을 수 없을 것이오. 또 적의 사정도 알고 와서 방책을 정합시다” 하여 선선하게 대답하였다. 권율은 순신이 전일의 감정을 추호도 내비치지 않는 것을 보고 그 호활한 심정을 탄복하여 “내가 전일사를 생각하면 대감을 대할 낯이 없소” 하고 흔연히 허락하여 연해안으로 보냈다. 그것은 자기가 요시라의 말을 믿어 순신이 죄를 받게 하였다는 뜻이었다.

순신은 자기 부하인 송대립宋大立[송희립의 형이다] 유황柳滉 윤선각尹先覺 방응원方應元 현응진玄應辰 임영립林英立 이원룡李元龍 이희남李喜男 홍우공洪禹功 한치겸韓致謙의 무리 10명 군관을 데리고 수군과 말꾼을 아울러 합 25인이 출발하여 삼가1)진주 곤양을 거쳐 여러 날 만에 노량에 도착한즉 전일의 부하이던 거제현령 안위 영등포만호 조계종趙繼宗 등 10여인이 와서 순신을 보고 통곡하며 원균이 겁내고 적을 보고 도주한 소치로 이러한 패망을 당하였다고 호소하였다.

순신 역시 눈물을 뿌려 제장을 위안하고 안위의 배에 올라 안위와 더불어 밤을 지내며 적의 형세와 원균의 망령된 행동이며 금번에 패전한 이유를 낱낱이 청취하고 순신은 비분강개한 생각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순신은 배설에게 개인의 자격으로 노량목을 굳게 지키도록 권고하고 제장들과 작별하고 돌아오는 길에 진주 정개산성에 도착하였다. 권원수가 성을 지킬 보냈다는 사졸을 점검하니 말도 부족하고 활도 부족하여 도무지 적수공권뿐이니 이것이 도원수의 군비라는 것이다.

임진란 때에 일본군은 전라 충청 양도의 연해안 여러 고을의 제해권은 손에 넣어 본 일이 없었다. 이것은 백전의 경험과 웅대한 계책을 갖춘 이순신의 날개 밑에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순신은 잡혀가고 또 삼도 수군이 전멸되었으니 일본군으로서는 도무지 거칠 것도 꺼릴 것도 없었다. 한산도를 점령한 일본군이 전라도 바다를 들어가기만 하면 한성 이서로 의주까지 1개월이 다 못되어서 모두 다 점령할 형세였다. 비록 명나라 군사가 있다 하나 그것은 일본군에게는 족히 두려워할 것이 되지를 못하였다. 이여송이 벽제관 싸움에 실패한 이후로는 그만 심리가 약화되어 버려서 조선에 남아 있는 명나라 장수라고는 밤낮 화의만 힘을 쓰고, 적과 싸우기를 항상 무서워하여 회피하기만 하였다.

한산도를 점령한 일본군은 일거에 전라도 바다를 거침없이 진주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전라도 바다에는 일본 수군이 들어가 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수로를 잘 모르고 또 전라좌수영과 우수영에는 얼마쯤 병력이 남아 있는 듯도 하고 겸해 방어준비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도 자세하게는 알지 못하며 더구나 이순신은 반드시 용의주도하게 무슨 설비를 하여 두었으리라고 일본군 참모부는 그렇게 추측하지 아니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그 사정만 철저하게 염탐하였더라면 일본 수군은 파죽지세로 전라도 바다를 지나 서울과 황해 평안 바다를 모두 다 석권할 것이었다. 그때 사정이 그러한 처지에 있었다.

칠천도 대패전으로 하여 원균 이억기 최호의 삼도수군대장이 전사하고 조선수군이 전멸하였다는 무서운 경보가 조정에 올라오기는 5일 후인 7월 21일이었다. 일전에도 부산 앞바다에서 원균이 대패했다는 경보를 받은 뒤 며칠이 못되어 또 수군이 전멸되었다는 무서운 경보였다. 조정은 크게 놀랐다. 이순신을 까닭 없이 미워하던 대간 제신들과 서인 북당들도 비로소 이원익 김명원 정탁 황신 정경달 강항 등 제현의 선견지명을 여실히 탄복하였다. 그중에도 주은 김명원과 추포秋浦 황신은 서인 중 유명한 사람이던 터였다.

순신 잡혀간 후 삼도수군 전멸

▲ 선조는 주저하다 순신을 다시 통제사로 임명하고, 간곡한 교유서를 내렸다.
원균이 통제사가 되고 난 수개월 동안에 순신의 부하이던 권준 이순신李純信 구사직 정걸 김득광의 무리가 서울에 올라와 이순신의 억울한 사실과 원균의 배은망덕하는 망령된 전후행동을 상세하게 각 방면의 요로에 있는 대관들에게 대선전을 하고 이순신의 용병은 옛날 한신과 제갈공명이라도 따르지 못할 것이라 하여 떠들어 변명하였다. 선조도 이순신의 원왕한 사정을 깨달았던 때였다.

이때에 한성의 백성들에게도 칠천도 대패전의 소문이 전파되어 큰 소동이 일어났다. 내일에는 적군이 한강으로 상륙하는 듯이 인심이 소동하였다. 공연히 이순신을 잡아 오더니 이런 일이 생겼다고 대간들을 원망하였다. 선조도 크게 놀라 비변사 재상들을 불러 물으셨다. 경림군 김명원과 병조판서 이항복이 말하되 “이번 실패의 화근은 모두가 원균이 조정을 기망한 죄이오니 지금의 방책은 오직 이순신으로 다시 통제사를 삼는 수밖에 없습니다” 하였다. 선조는 “그렇다고 하나 순신이 비록 명장이나 병선 한 척도 없어진 이 국세에 그인들 어찌 하나” 하며 순신으로 다시 통제사를 시키고 간곡한 교유서를 내렸다.

이때에 도체찰사 이원익과 도원수 권율은 적의 대군이 온다는 통에 또 물러나 대구 팔공八公산성에 들어가고 조방장 김해부사 백사림白士霖은 안의安義 황석黃石산성을 지키고 우병사 김응서는 진주성을 버리고 삼가三嘉 악견岳堅산성으로 들어갔다. 방어사 곽재우는 그 재명이 이순신 김덕령의 버금이더니 이순신 김덕령이 다 감옥에 갇히는 것을 보고는 시사를 탄식하고 적송자를 모방하여 부하를 해산한 뒤에 지리산 산중에 들어가 양생술을 익히고 있다가 다시 나와 가족을 데리고 창녕昌寧 화왕火旺산성을 지켰다.

일본제장은 경상도 전체 71주와 전라도 동부 일대를 기탄없이 횡행하여 살육과 방화가 경천동지하였다. 체찰사이니 도원수이니 순변사 병수사이니 하는 무리들이 다 다투어 달아나는 이때에 상주목사 정기룡이 28읍의 병마를 규합하여 용담천2)에서 적군을 만나 적의 장수를 한 창에 찔러 생포하고 수백기를 쳐 파하여 고령 이외 5읍을 회복하였다.3)

조정에서는 전자에 한산도 위유사로 다녀온 전 통신사 황신을 전라감사를 제수하였다. 정유1597년 8월 3일에 선전관 양호梁護가 진주 정개산성에 내려와 이순신으로 삼도통제사를 삼는다는 인신병부와 교유서를 가지고 왔다. 그 교유서에는 이러한 전후득실을 간곡하게 기재하였다. 정유1597년 1월 25일에 파직되었다가 7월 21일에 복직이 되어 8월 3일에 임명을 받으니 그 사이가 만 6개월 합 180일 동안이었다. 그 교유서는 다음과 같다.

王若曰 嗚呼 國家之所以倚保障者 惟在於舟師 天未悔禍 兇鋒再熾 遂使三道大軍 盡於一戰之下 沿海城邑 誰復屛蔽 閑山已失 賊何所憚 燒眉之急 迫在朝夕 目下之策 惟當召聚散亡 急據要津 儼然作一大營則 流逋之衆 知有所歸 方張之敵 庶可式遏 任是責者 非有威惠智幹 素見服於內外者 曷能勝斯任哉 惟卿 聲名 早著於閫寄之前 威功望業 累振於大捷之後 邊上軍情 恃爲長城 頃者 遞卿之職 俾從戴罪之律者 亦出於人謀不臧 致有今日敗衄之辱也 尙何言哉 尙何言哉 今特起卿于墨衰 拔卿于白衣 授以忠淸全羅慶尙三道水軍統制使 卿當先行招撫 搜訪流散 進扼形勢 使軍聲 一振則 已散之民心 可以復安 賊亦聞我有備 不敢再肆猖獗 卿其勖之哉 三道水使以下 幷節制之 其有臨機失律者 一以軍法 斷之 於戲 陸抗 再鎭河淮 克盡制置之道 王遜 出自罪籍 能成掃蕩之功 益堅忠義之心 庶副求濟之望

 
왕은 이와 같이 말한다. 오호라! 국가의 보장으로서 의지해 온 것은 오직 수군뿐이라. 하늘이 우리에게 전쟁의 화를 내리고도 아직 후회를 아니 하여 흉악한 왜적의 칼날이 다시 번뜩여 마침내 삼도의 대군이 한번 싸움에 패해 모두 사라지게 되었으니 바닷가 여러 고을을 누가 지켜주겠는가. 한산도를 이미 잃었으니 적이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눈썹이 타 들어가듯 위급함이 닥쳐온 바로 지금 시급한 방책은 생각건대 마땅히 도망치고 흩어진 군사들을 모아 요충지를 의지하여 엄연한 하나의 진영을 형성하는 것이니 그리하면 도망갔던 무리들이 돌아올 곳이 있음을 알 것이요 침략해 오는 적들을 막아낼 수 있으리니 이를 책임질 사람은 위엄과 은혜, 지혜와 능력을 갖추어 모든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사람이 아니면 이 막중한 소임을 어떻게 수행할 수 있겠는가. 생각하건대 그대의 명성은 일찍이 수사로 임명되던 그날부터 크게 드러났고 그대의 공로와 업적은 임진년의 큰 승첩이 있은 후부터 크게 떨쳐 변방의 군사들이 마음속으로 그대를 만리장성처럼 믿고 따랐다. 지난번에 그러한 그대의 직책을 바꾸고 백의종군하도록 하였던 것은 또한 사람의 모책이 어질지 못함에서 생긴 일이어서 오늘 이와 같이 패전의 욕됨을 당하게 되니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 지금 그대가 상중에 있는 줄 알고 있지만 그대를 기용하여 충청, 전라, 경상 삼도의 수군통제사로 임명하고자 하니 그대는 마땅히 먼저 부하들을 불러 어루만지고 흩어져 도망친 자들을 찾아 집결하여 군대의 형세를 갖추도록 하여 수군의 위세를 떨치면 이미 흩어진 민심도 다시 안정시킬 수 있을 것이고 왜적들도 또한 우리의 방비에 대해 들으면 감히 다시 쳐들어오지 못할 것이니 그대는 힘쓰도록 하라. 삼도의 수사 이하 전 수군을 지휘하되 만일 명령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모두 군법대로 처단하라.

아, 저 오나라의 장수 육항은 국경의 강 언덕을 수비하는 제치사를 두 번이나 맡아 적의 침략을 막아냈고, 왕손이 죄수의 몸으로 적을 소탕하는 공로를 세운 것과 같이 그대는 충성된 마음을 더욱 굳건히 하여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를 바라는 나의 간절한 소원을 풀어주기 바란다.

순신이 교지를 받고 보니 “성시수임어패군지제誠是受任於敗軍之際하고 봉명어위난지간奉命於危難之間이라” 하는 제갈량의 출사표出師表의 일절을 여실히 표현한 바로 그러한 때였다. 이렇게 국가사와 남방 형세가 급하니 일각을 지체할 수 없었다. 당일에 출발하니 군관이 9인, 아병牙兵이 6인뿐이었다. 하동 두치豆峙를 향하여 초경에 행보하여 역에 도달하여 말을 먹이고 밤비를 맞으면서 쌍계동雙溪洞에 다다르니 험한 계곡 바위에 새로 온 비가 넘쳐흘러 여울물 소리에 귀가 멍멍하였다. 이러하여 물을 건너는 행인이 끊어졌다. 제장들은 며칠을 묵더라도 물이 빠지거든 건너가자고 말하나 순신은 듣지 아니하고 친히 말고삐를 몰아 물을 건넜다. 백성들은 다 산곡으로 피난하여 버렸다. 4일에 곡성谷城읍에 이르니 군관은 달아나고 백성들은 피난가고 없어서 관아와 여염이 텅 비었다. 그 이튿날 옥과4)지방에 당도하니 피난하는 백성이 길에 가득 하였다. 어린 것을 등에 업고 옷 보퉁이를 지고이고 하여서 그 정경이 참혹하였다. 이 백성들은 이순신 장군이 다시 통제사가 되어 온단 말을 듣고 모두 길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다 이순신장군이 오는 것을 보고 백성들은 일제히 일어서 소리를 내어 통곡하여 그리운 부모를 만나보는 것 같았다.

순신은 말에서 내려 백성을 위로하여 말하기를 피난을 가면 거기도 적병이 올지 모르고 또 깊은 산골짜기에는 도적과 맹수의 환란이 없으란 법이 없으니 다들 집에 돌아가 생업에 전념하고 타이르고 “여러분 중에 젊으신 이는 나라일이 위급하니 나를 따라 종군 출전하기를 바라오” 하고 권고하였다. 그러하여 그 자리에서 장정 30여인이 순신의 부하되기를 자원하였다. 백성들은 순신의 말에 감화되어 “우리 장수가 오셨으니 우리는 다 살았다!” 하고 다들 집으로 돌아갔다.

순신이 옥과현에 들어가는 길에 이기남 부자父子를 만났다. 이기남의 부친은 순신의 장대한 풍채를 보고 백번이나 절하며 “사또는 천신이시며 참으로 대인이시오” 하였다. 이기남은 옥과사람으로 용력이 절륜하여 순신의 막하의 날랜 장수로 전공도 많던 군관이더니 원균에게 축출을 당한 사람이었다. 이기남은 다시 순신을 따라 나섰다.

순신의 부하가 되길 소망하다

▲ 낙안에 순신이 온다는 말을 듣고 500명의 백성들이 나와 영웅을 환영했다.
8월 8일에 순천 땅에 들어가니 전라병사 이복남이 적병이 온다는 소문을 듣고 창고에 불 지르고 달아날 준비를 하므로 그 부하장졸들이 주장을 믿을 수 없음을 알고는 다 흩어져 버렸다. 이복남이 군관 몇 명만을 데리고 남원부로 달아났단 말을 듣고 순신은 분개하였다. 광양현감 구덕령具德齡과 나주판관 원종의元宗義가 병사 이복남을 따라와서 창저5)에 있다가 이복남은 달아나고 또 이순신이 온다는 말을 듣고 피하여 구치6)로 달아난 것을 순신이 전령하여 부르니 부득이 와서 본다. 순신은 호령하여 “너희가 나라의 신하가 되어 위급한 때를 당하여 목숨을 잊어버리고 나서는 것이 도리이거든 내가 온다는 말을 듣고 달아나는 것이 무슨 행동이냐?” 하고 꾸짖었다. 구덕령과 원종의는 군법으로 처단당할까 두려워하여 순신의 앞에 엎드려 사죄하고 목숨을 내어놓고 따르기를 맹세하였다. 그럭저럭 군사는 500여인에 달하였다.

순천부에 들어가니 다 피난가고 인적이 적적하다. 산승山僧 혜희惠凞가 와서 만났다. 순신은 혜희에게 의승장의 첩지를 주어 승군을 모집하여 오게 하였다. 순천성에는 관사와 창고와 군기 군물이 여전하였다. 병사 이복남이 이것을 처치하지 못하고 조급증이 나서 달아난 것이었다. 순신은 군기고를 열고 부하 장졸에게 나누어 주어 장비가 새롭게 되었다. 이것은 권준이 부사로 있을 때에 순신의 군정을 모방하여 군기 군물을 정비한 것이었다.

순신이 통제사 교지를 진주에서 받고 겨우 부하라고는 군관 9인 아병 6인이던 것이 순천에 이르러서는 차차로 옛날의 부하가 모여들어 벌써 무장한 정예기사 군관 무사가 160여인이요 그 외 병졸이 500~600인에 달하였다. 8월 9일에 순천을 떠나 낙안군에 다다랐다. 낙안에서는 순신이 온다는 말을 듣고 읍에서 오리나 되는 곳에 400~500명 백성들이 우리 영웅을 맞으려고 나와서 환영한다. 늙은이와 부인네와 아이들까지도 일찍부터 길에 나와서 우리 장수 이순신을 한 번 보자고 순천 쪽을 바라보고 기다리고 있었다. 이 백성들 생각에는 이순신이 통제사로 있던 동안 5ㆍ6년간에는 적병이 전라도를 범하지 못하더니 순신이 잡혀가고 5ㆍ6개월을 두고 감옥에 갇히어서 그 사이에 적병이 물밀 듯 전라도에 들어오니 다시 적병을 물리쳐줄 영웅은 이순신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석양 때나 되어 순신이 8척이나 되는 큰 몸에 검소한 천익(철릭)을 입고 크나큰 백달마白㺚馬를 타고 7척 장검을 허리에 차고 위풍이 늠름하게 온다. 순신을 호위하여 오는 제장과 군사들도 무장을 엄숙히 하여 깃발과 창검이 석양에 비쳐 번쩍번쩍하여 기세가 삼엄하였다. 순신을 모셔오는 군사들은 무서운 장수를 모신 것을 기뻐하는 듯이 기운차게 우쭐거리며 걸음을 걸어온다.

“통제사 대감이 오신다!” 하고 군중 가운데서 누가 외치는 소리가 들리자 길가에 또는 나무그늘 밑에 앉았던 백성들은 “어디, 어디?” 하고 모두 일어서서 바라보았다. 순신의 장대한 체격에 길고도 풍성한 자색염姿色髥이 구레나룻으로 순신의 주걱턱을 덮어서 보통 사람과는 모습이 판이하다. 백성들 중에는 감격한 충정에서 우는 소리가 들렸다.

순신은 말에서 내려 맨 처음에 읍하고 나서는 노인의 앞에 서며 “어찌 이렇게들 나왔소?” 하였다. 노인은 “통제사 대감께서 오신다니까 아침부터 나와 기다리오” 하고 고개를 들어 순신을 바라보았다. 순신의 눈에는 영채가 쏘아져 나갔다. 순신은 “군수는 어디 갔소?” 하고 다시 물었다. 노인은 “예, 본관사또는 어제 도망하였고 병사 사또는 적병의 침략이 임박하였으니 창고를 불사르고 백성은 피난하라고 영을 내리시어 어젯밤에 본관성주는 창고에 불 지르고 달아났소. 그러고 보니 백성들이 누구를 믿고 있겠소? 다들 노인들 모시고 아이들 업고 피난을 가려 하다가 관속이나 부자들은 벌써 도망하고 소인네와 같은 가난한 자들만 어찌할까 하고 방황하던 차에 대감께서 이 고을로 행차하신다 하기로 인제는 살아났다 하고 아침부터 나와서 기다리고 있소. 대감께서는 아무 죄도 없으신데 소인배들의 참소를 받으시어 옥중 고생을 많이 하시고 또 대부인의 상을 당하셨다 하오니 무어라고 여쭐 말씀이 없소” 하고 소매로 눈물을 씻었다.

와신상담하는 순신

▲ 군사와 군관으로 뽑힌 장정들은 이순신 장군의 휘하가 돼 나랏일에 나서게 되자 기뻐서 뛰고 즐거워했다.
순신은 노인의 말을 듣고 감개무량하였다. 노인은 곁에 선 젊은 사람을 불렀다. 그 젊은 사람은 노인의 아들인가 싶었다. 젊은 사람은 노인이 손짓하는 대로 질그릇 술병과 백지에 싼 안주 한 봉을 순신에게 들렸다. 노인은 “이것이 술이오. 대감께 드릴 것이 없어서 변변치 못한 촌주村酒와 거친 안주를 가지고 왔소” 하고 허리를 굽혔다. 순신이 어쩔 수 없어서 그 노인의 술과 안주를 즉 음식물이기 때문에 받았다. 예로써 줌에 예로써 받음이었다.

이것을 보는 여러 백성은 “나도, 나도” 하고 술로가 안주, 장 단지, 도시락, 찐 닭, 말린 생선, 말린 사슴고기 등등의 물건을 모두 순신에게 바쳤다. “까닭 없이 받을 수 없소” 하고 순신이 사양하면 그들은 울며 강권한다. 값을 친다면 몇 푼어치가 아니 된다. 그렇지만 백성들의 위인을 대접하는 성의였다. 순신은 부득이하여 그것을 받아 부하장졸들에게 분배하여 먹게 한 뒤에 순신은 “수군이 패망한 뒤에 군인이 부족하니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내어놓고 전쟁 제일선에 나서기를 원하는 이는 내게 말하라” 하였다. 백성들 중에서 백여명이 나섰다. 그러나 그 중에는 늙은이가 많이 섞여서 순신은 장정 30명만 뽑아내어 순천 군기고에서 가지고 오던 군복을 입히고 활과 칼을 주어 차게 하였다. 그러하여 각기 그 자격을 따라 군관에 많이 채용하였다.

군사와 군관으로 뽑힌 장정들은 우리 영웅 이순신 장군의 휘하가 되어 나랏일에 나서는 것이 기뻐서 뛰고 즐거워하나 군사로 뽑히지 못한 늙은이들은 울며 탄식하고 될 수 있으면 한몫 끼일 수 있을까 원하였다.

순신이 낙안읍내에 들어가니 창고와 관사는 다 재가 되고 말았으며 남아 있는 백성들은 모두 눈물을 뿌리며 나와 맞았다. 그 이튿날 낙안읍을 떠나 10리쯤 나가서 거기도 백성들이 길에 늘어서서 순신의 행차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리 사양을 하여도 울며 강청을 하였다.
정리 | 이남석 더 스쿠프 대표 cvo@thescoop.co.kr 자료제공 | 교육지대(대표 장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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