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당 김기환 선생의 이순신공세가(李舜臣公世家) 제40회

권율은 순신의 충고하는 말의 진의와 요령을 깨닫지 못하였다. 순신은 자기의 과거의 죄명을 변경하자는 것도 아니요, 또 원균을 두호하자는 것도 아니요, 오직 국방대책의 이해득실만 말한 것으로 광명정대한 사리를 풀어 말한 것이건마는 권율은 처음에는 그 과거의 죄를 변명한다고 듣고 노하였다가 나중에는 원균을 두호하는 줄로 듣고 그래도 순신은 관대하다고 하여 탄복하였을 뿐이요 진정한 순신의 뜻은 요해하여 깨닫지 못한 것이었다.

 
5월 2일에 도원수 권율이 순신의 사처에 찾아와서 문상하고 지난 이야기를 나누었다. 권율은 순신보다 나이 9세가 더하여 금년 62세였다. 전라감사 이정암과 전라병사 이복남李福男도 찾아와 문상하고 순천부사 우치적도 와서 문상하였다.

5일에 충청도 수군우후 원유남元裕男이 한산도로부터 와서 문상한 뒤에 말을 내어 원균의 망령된 행동을 일일이 말한다. 제승당에다가 미녀 12명을 감추어 두고 밤낮 주색풍류로 지내며 제장이 찾아올까 싫어하여 담을 둘러쳤다는 말이며, 장사들이 마음이 떠나버린 자가 많다는 말이며, 군량과 군포 관전官錢을 자기의 사적 용도에 제멋대로 쓴다는 말을 하고 군대의 사정이 이러니 어찌 될지 알 수 없다며 분을 터뜨리니 참으로 놀랄 지경이었다.

6일에 우수사 이억기의 조문 편지가 왔다. 그러나 같이 있는 원균에게는 일자의 조문이 없으니 아마 스스로 절교하는 모양 같다.

7일에는 충청도 예산禮山현 정혜사定慧寺라는 절에 있는 노승 덕수德修라는 중이 찾아와서 순신에게 짚신 한 켤레를 바치는 것을 순신은 “내가 산승의 초혜草鞋를 받을 까닭이 있나” 하고 거절하였다. 그 노승은 “소승이 빈한하여 대감께 바칠 것이 있겠소? 소승이 손수 삼은 짚신이라도 정성으로 드리는 것을 아니 받아 주시면 소승이 수백리 길을 와서 대감을 뵈러 온 정성을 물리치는 것이 아니오이까?” 하고 재삼 간청하였다.

정혜사 노승 덕수는 그 당시에 참선오도한 고승이었다. 산중에 은거하여 천하영웅을 논평하다가 우리 영웅 이순신을 한 번 보려고 작정하고 천리를 불사하고 순신이 아산에 왔단 소식을 듣고 그리로 갔다가 순신이 떠났다 하므로 뒤를 추종하여 순천까지 온 것이었다. 순신은 그 성심에 감동하여 노자를 후히 주고 그 짚신을 받아서 발에 신어본즉 발에 맞았다.

8일에 수인守仁이란 노승이 두우杜宇라는 젊은 중을 데리고 찾아와서 순신을 보고 합장 배알하며 “이 중은 밥을 잘 짓고 소찬을 정결하게 만들 줄 아오니 대감 상중喪中 객지에 조석 진지 수발을 하게 하시오” 하였다. 순신은 “대사가 나의 처지를 생각하고 이처럼 고마운 주선을 하나 두우는 받을 수 없소” 하고 사양하였다. 수인은 다시 “대감 같으신 고해를 건너는 배요 어두운 길의 촛불이신 우리 창생의 은인을 위함이요, 개인적 정분으로 하는 일이 아니오” 하고 두우를 떼어 두고 하직하고 가버렸다.

그때나 이때나 위인 은인 철인 성인을 숭배하기는 일반이다. 중국의 손문 인도의 간디이며 그때에는 조선의 이충무 중국의 왕양명王陽明같은 사람이었다.

5월 13일에 부체찰사 판서 한효순이 찾아와 문상하고 말하기를 도체찰사 이원익이 순신의 억울한 일을 항상 탄식한다고 하였다. 그 뒤 20일에 이원익을 구례求禮에 가서 만났다. 이원익은 상중인 순신에게 조의를 표하기 위하여 소복을 갈아입고 순신을 대하여 문상한 뒤에 말을 내어 나랏일이 그릇됨을 근심하였다.

이원익은 순신의 양미 두 석을 보냈다. 순신은 또 출발하여 6월 5일에 초계읍에 득달하여 어떤 집에 머물기로 하였더니 그 집 주인이 과부라는 말을 듣고 곧 다른 집으로 옮아 떠났다. 8일에 권율이 남원으로부터 돌아왔다. 그때 정유재란으로 일본군이 다시 조선을 침략한다고 조정에서 명나라에 청원하여 중국에서 양호楊鎬라는 장수를 경략사를 삼아 조선으로 내어 보내던 때였다.

이때에 적장 금오수추1)는 소년장군으로 태합 풍신수길의 처조카였다. 대병 15만을 거느리고 부산에 유진한 뒤에 출정은 잠시 정지하고 우선 착수로 행장과 청정을 시켜 반간계를 행하여 제일 두려워하는 장수 이순신을 모함하게 하는데 김응서 권율 남이신 기타 모모 대관을 농락 매수하여 황금 수만근으로 순신을 죽게 하고 어리석고 서투른 장수 원균을 대해로 핍박 출동케 하여 잡은 뒤에 전격작전을 개시하기로 하였다.
명나라에서는 강화를 주장하여 풍신수길을 봉왕까지 한 것이 대국의 위신을 실추하고 수길의 반감을 도발하여 금번 재란이 된 것이라 하여 심유경을 매국의 간적이라 하여 처참하고 석성을 하옥하고 송응창 이여송의 무리를 벽제관 패전 후에 적을 두려워하여 강화를 주장하였다 하여 쫓아낸 뒤에 병부상서 형개邢로 정동총독征東總督을 삼고 양여남楊汝南 정응태丁應泰로 찬획주사贊劃主事를 삼아 조선 구원병을 파견하였다.

경략사 양호楊鎬 친병親兵 8000인
제독 마귀麻貴 선부대동병宣府大同兵 7000인
부총병 양원楊元 요동병遼東兵 3000인
부총병 오유충吳惟忠 남병南兵 4000인
유격장군 우백영牛伯英 밀운병密雲兵 3000인
유격장군 진우충陳愚衷 연수병延綏兵 3000인
합계 3만인이었다.

참정參政 소응궁蕭應宮, 어사 진효陳效는 감군監軍이 되고 낭중中 동한유董漢儒, 유격장군 엽상葉, 참장 설호신薛虎臣의 무리는 독향관督餉官이 되어 육속도강陸續渡江하여 평양으로 나왔다. 양호는 평양에, 마귀는 한성에, 오유충은 충주에, 모국기茅國器는 성주에, 양원은 남원에, 진우충은 전주에 각각 주둔하게 하였다.

6월 8일에 이순신은 일개 군사의 자격으로 권원수를 찾아보는데 권율은 반갑게 맞아들여 대좌하고 시국에 관한 담화를 하는데 권율은 양심에 가책이 되어 전일의 무함한 일에 대해 잘못한 변명을 하기 위하여 박성이 상소한 초본을 보이며 지나간 참소는 자기의 주장이 아니라는 뜻을 많이 변명하고 죄를 피하였다. 박성이란 작자는 시류를 좇는 무리들의 비위를 맞추어 벼슬길에 초천2)해보자는 소인의 행위였다. 권율도 순신을 대함에 그 엄정한 인격 앞에 자연 스스로 부끄러워 전날의 과오를 깨닫고 자발적으로 나오는 인사의 말이었다.

원균의 행패에 떠나는 군사들

▲ 군사들은 음란하고 무책임하게 행동하는 통제사 원균을 믿고 따를 수 없어 떠나버렸다.
권율은 조용한 때에 순신을 불러 대하여 원균의 범사가 바르지 못하여 항상 거짓말을 한다는 것을 통분하게 여겨서 장계를 올렸다고 하였다. 그 글에는 “신임통제사 원균 전진하려 하지 않아 수군 제장이 다들 마음이 떠났습니다. 원균은 안에 들어가면 나오지 않고 장수들과 함께 모의하지도 않으니 실패할 것을 가히 알 수 있습니다” 하는 구절이 있어 권율은 원균을 크게 근심하였다.

어떤 때에는 밤이 깊도록 혹은 밤이 새도록 질탕한 풍악 소리와 미첩들의 웃는 소리와 취한 통제사가 호령하는 소리와 그 뒤를 이어서 들리는 여자의 울음소리가 날 때에 군사들은 담밖에 모여서서 구경도 하고 수군거리기도 하였다. 군사들 중에는 이렇게 음란한 통제사를 대장으로 믿고 있다가는 언제 어찌 될지 모른다 하여 “가자, 가자” 하고 도망하는 사람도 많이 있었다.

이때에 도원수 권율을 경유하여 원균에게 출동명령을 내린 일이 있었다. 부산으로 적장 청정의 후군이 건너 나온다 한즉 나아가 치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요시라가 김응서와 권율의 무리를 구슬려 속여서 청정의 후군이 상륙만 하고 보면 조선은 또 진탕이 된다고 밀고하므로 어리석은 권•김의 무리와 조정에 세력을 잡은 그의 한패들이 떠들어서 소위 도원수에게 이러한 명령이 내린 것이었다. 소위 조정의 중신이란 작자들은 온통 요시라의 권모술수에 속아서 그의 대변인이 되고 심부름꾼이 되고 말았던 것이었다.

이 명령은 가장 그럴듯한 것이었다. 원래 순신이 죄를 입은 것이 부산의 적을 대해로 나가서 치지 아니하였다는 것이요, 원균이 자원하고 통제사가 된 것과 조정에서 원균을 시킨 것이 이순신의 자중책을 뒤집어엎고 원균의 적극적 진공책을 쓰기 위한 여러 소인배의 주장이던 것이었다. 그러나 원균은 통제사 자리를 얻기 위하여 맨 거짓말을 하고 급기야 통제사가 되고는 지금까지 3•4개월이 되도록 도무지 싸우러 나갈 기색이 없었다. 조정에서는 도원수를 시켜 그를 재촉하려 할 때에 마침 또 요시라의 밀고가 있어서 조정에 세력을 잡은 무리들은 좋은 기회를 잃지 말라고 엄명하였다.

 
원균의 실정은 행장 청정의 반간계는 전연 몰라도 부산 양산의 적이 무서워 싸우러 나갈 수도 못되고 무슨 핑계를 만들려고 애를 썼다. 그런데 이 안골포의 적은 순신이 잡혀 가고 원균이 대신 와서 한산도에서 주색에 빠져 있는 동안에 적은 전년에 대패한 안골포에다가 새로 근거를 잡고 안심하고 이제는 이순신이 없으니 원균 같은 따위는 족히 두려워할 것 없다고 하였다.

이때에 도원수 권율은 종군하는 이순신을 청하여 문의하여 말하기를 “적병 10만이 또 대마도에서 금명일간에 부산으로 건너온다는데 통제사 원균이 막지를 아니하여서 될 일이겠소?” 하였다.

순신은 “적병 10만이 대마도에 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시오?” 하고 권율에게 반문하였다. “행장이 또 요시라를 보내어 진주병사 김응서에게 청정의 후군後軍이 또 건너온다는 날짜까지 고하였다는구려!” 하는 것이 소위 도원수라는 권공의 대답이었다. 순신은 이 말을 듣고 기가 막혀서 내심에 헤아리되 권율이 이렇게 우매하여 적의 유적지계誘敵之計를 깨닫지 못하니 사람을 다루고 부하를 다루는 것은 오히려 김명원만 못하구나 하고 놀랐다. 그러나 알아듣게 말을 아니 할 수 없어서 말을 내어 “적병 10만이 대마도에 와 있을 듯도 하고 적의 병선이 많이 계속하여 나올 듯도 하오마는, 모두 두 놈이 무슨 속임수를 베풀어 놓고 우리를 유인하는 것 같소. 또 안골포와 웅포 제포에 적의 대함대가 있는 것이 사실일 것 같으면 그것을 그냥 두고 주사를 몰고 부산 앞 대해로 출전하는 것은 위험한 일인 줄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소” 하고 순신은 충고하였다.

이 말에 대하여 권율은 안색을 변하면서 “대감은 원균과는 의사가 다를 줄 알았는데 또 그런 소리를 하는구려!” 하고 순신을 노려보았다. 순신은 더 말하는 것이 마치 자기의 지나간 과실이나 변명하는 것 같을까 하여 입을 닫았다. 권율은 순신의 충고하는 말의 진의와 요령을 깨닫지 못하였다. 순신은 자기의 과거의 죄명을 변명하자는 것도 아니요, 또 원균을 두호하자는 것도 아니요, 오직 국방대책의 이해득실만 말한 것으로 광명정대한 사리를 풀어 말한 것이건마는 권율은 처음에는 그 과거의 죄를 변명한다고 듣고 노하였다가 나중에는 원균을 두호하는 줄로 듣고 그래도 순신은 관대하다고 하여 탄복하였을 뿐이요 진정한 순신의 뜻은 요해하여 깨닫지 못한 것이었다.

도원수 권율이 사천에 와서 유진하고 원균에게 진격명령을 보냈다. 원균은 하는 수 없어서 병선 90여척을 거느리고 안골포에 이르니 적의 함대는 벽을 쌓고 나오지를 않았다. 원균이 보성군수 안홍국安弘國을 명하여 병선 20척을 몰고 적을 유인하라 하였다. 안홍국이 앞서나가 싸우는 것을 보고 원균은 철환의 비를 무릅쓰고 진격하기가 무서워서 그만 슬그머니 뒤로 물러나 버렸다. 원균은 관망만하고 구하지 아니하여 안홍국이 탄환을 맞고 전사하였다.

순신의 충고를 깨닫지 못하다

▲ 권율은 순신의 충고에 담긴 진의와 요령을 깨닫지 못하고 크게 노하였다.
통제사 원균은 권율의 독촉을 견디지 못하여 부산 바다로 또 출동하기를 결정하였다. 우수사 이억기와 경상우수사 배설이 안골포와 가덕도에 있는 적의 눈에 뜨이지 아니하도록 밤을 타서 행선하기를 주장하였으나 고집스럽고 어리석은 원균은 불청하여 말하기를 “당당한 우리의 병위를 적에게 보여서 감히 싸우지도 못하게 하리라” 하고 향하였다.

배설이 선봉이 되어 웅천에 이르러 적선 10척을 만나 한동안 싸워 적의 사상과 손실이 많았다. 배설을 비롯한 제장은 적선 10척과 군량미 200석을 빼앗아 배는 불태워버렸다. 군사 베기를 초개와 같이 하였다. 그리고 군사들이 배가 고파도 무엇을 먹이지 못하게 하였다. 원균은 마음이 바빠서 성공이 목전에 있는 듯하였다.

연안 각지에 있던 적의 척후병은 원균의 함대가 크게 일어나 부산을 향하는 것을 보고 육로로 급히 달려 함대보다도 먼저 부산에 그 소식을 보고하였다. 일본의 대장 소조천수추와 부전수가는 무릎을 치며 기뻐하고 행장과 요시라를 불러 그 반간 내지 유인한 공을 찬양하고 손수 술을 부어 권하였다.

원균의 함대가 절영도를 지나 동해에 나설 때에는 벌써 석양이 되었다. 앞에는 몇 십 척의 적선이 오색기를 달고 마치 원균의 함대를 엄습하려는 듯이 포를 쏘고 함성을 지르며 북을 울렸다. 바람은 더욱 일고 물결은 더욱 날뛰었다. 원균은 칼을 빼어 들고 군사를 독촉하여 노를 저어 일본병선을 격파하라고 초조한 행동을 여지없이 횡포하게 서둘렀으나 그러나 적선이 활 두어 바탕 거리 이내에 가까워졌을 때에 적은 뱃머리를 돌려 대마도 쪽을 향하고 달아났다. 원균은 달아나는 적선을 따라가 치자고 피곤한 군사를 독촉하였다. 얼마 후에 저녁 해가 넘어가려 할 때까지 따라가더니 문득 원균의 함대 뒤로부터 북과 나팔과 대포 소리가 들렸다. 원균은 따라가던 적을 버리고 새로 나타난 대함대를 맞아 싸우기를 각선에 명하였다.

도무지 물결이 거세어서 자유롭게 배를 조종할 수가 없었다. 얼마 아니 가서 또 부산 쪽으로 200척은 될 듯한 대함대가 내달아 원균의 측면을 위협하였다. 형세가 이리되어 원균은 갈팡질팡하는 동안에 해는 저물고 군사들은 더 동작할 기력이 사라지고 말았다.

원균은 가덕 쪽으로 향하는 적선의 뒤를 따르기를 명하였으나 벌써 함대는 통제력을 상실하여 버렸다. 군사들은 목이 말라서 물을 얻어먹으려고 미친 사람 모양으로 섬에 뛰어 내렸으나 거기에는 적군이 먼저 와서 복병하고 있었다가 하륙하는 족족 베어 죽여서 경각지간에 400여명 장졸이 소리도 기척도 없이 죽음을 당하여 버렸다.

저편에서는 흑전효고를 비롯하여 부전수가 협판안치 가등청정 소서행장 도진의홍 장종아부원친의 무리 제장은 변사 요시라를 시켜서 권율 김응서를 농락하고 동해에는 천라지망3)을 베풀어 놓고 청정의 후군後軍이 나온다고 속여서 원균을 피곤하게 하고도 정면으로 감히 싸우지 못하는 것은 아직까지도 이순신의 병법으로 훈련을 받은 수군을 꺼리고 무서워하는 까닭이었다.

원균은 영등포에도 적의 복병이 있는 것을 보고는 아마도 수천명 군사가 죽었는가 하여 겁이 잔뜩 나서 자기 먼저 캄캄한 밤중에 다른 제장이야 어찌 되든 말든 혼자 빠져나와 배를 달려 칠천도로 달아나 버렸다. 다른 배들도 대장인 원균이 낭패 도주하는 것을 보고 싸울 뜻이 사라져서 원균의 뒤를 따라 갈팡질팡 도망을 하였다.

권율은 무슨 심사인지 육로로 행군하여 적을 치지도 못하고 요시라의 말에 속아서 청정만 잡으면 싸움이 해결된다고 믿어서 원균만 자꾸 독촉하다가 급기야 원균이 절영도 앞 대해에서 적의 의병疑兵에 속아서 질서를 잃고 낭패하여 병선 20척과 정병 수천명을 싸움도 해보지 못하고 잃어버렸다. 권율은 원균에 대하여 통제사 임명 이래의 군무에 태만한 죄와 이 번 출정 초에 제장의 계획한 것도 불청하고 실패하였다는 것을 엄책하고 군문에서 장형杖刑을 집행하려고 권율은 서둘렀다.

원균은 분이 나서 권율에게 대들었다. 두 사람은 서로 항쟁하였다. 두 사람은 세력 다툼을 하는 판이었다. 조정에 있는 당파의 분야라든지 문관 무관의 차별이라든지 두루 보아도 원균이 권율에게 비교하면 한수가 부족하였다. 원균이 횡포하다고 하나 권율도 우매하여 요시라의 반간계에 넘어갔다. 원균이 항언하기를 “소인이 사또의 명령대로 부산 앞 대해까지 출병하여 적의 속임수에 빠지게 된 것은 소인의 죄가 아니오. 임진 이래 6년간이나 고생하여 적을 무찌른 공이 적다할 수 없소. 공으로써 속죄라도 할 터이지” 하고 은연히 전공을 자랑하며 요시라의 사주를 지적하였다.

권율은 원균의 반항에 대노하여 원균의 십악대죄를 조목조목 열거하였다.

 
1, 금번 부산으로 출정하는 처음에 이억기와 배량裵樑의 몰래 습격하자는 충언의 계책을 쓰지 않고 병위兵威를 과시하다가 적으로 하여금 대책을 준비하게 하여 그 속임수에 스스로 빠져 병선 20척과 군사 수천명을 상실하였은즉 그 패군한 죄
2, 대장이 되어 천은이 망극하거든 부귀만 편안히 누리고 머물러 관망하다가 영등포에서 먼저 겁을 내어 칠천도로 달아나 전군이 주장을 잃고 사방으로 흩어버리게 되었은즉 그 겁내어 도주한 죄
3, 임진란 초에 원균이 경상우수사로서 자기가 통솔한 병선 70척과 병기 군량을 바다 밑에 침몰시키고 싸우지도 못하고 노량으로 도망하였은즉 그 부대를 버리고 도주한 죄
원균과 권율의 세력다툼
4, 부산의 적을 소탕하겠다고 대언장담하다가 급기야 통제사가 되고는 지금까지 5, 6개월에 이 핑계 저 핑계로 적을 두려워하여 머물러 있었으니 조정을 기망한 죄
5, 개전 이래 5, 6년 동안에 이순신의 40여차 승전에 뒤떨어져 해상에 전사한 적의 시체를 건져 그 머리를 베어 모아서 조정에 공을 보고하되 먼저 나가 싸운 공은 순신보다 자기가 앞서건마는 순신을 먼저 통제사를 시켰다 하여 조정을 원망한 죄
6, 도원수의 육군을 불러 안골포의 험한 곳에 자리 잡은 적을 소탕하기 전에는 부산을 진공할 수가 없다 하여 자기가 진공하지 못하는 책임을 육군에 돌려보내자는 흉계인즉 그 피할 생각에 싸우지 않은 죄
7, 제승당은 삼도수군의 국방대책을 논의하는 해양 관문의 장단4)이어든 근자에 요녀 10여명을 데려다 놓고 밤낮 음락으로 질탕하여 이런 대전란시대에 소위 삼도의 대장이 되어 임금의 소의간식 하는 근심을 생각하지 않는 죄
8, 무고한 가난한 어민의 목을 베어 적군의 수급이라 하여 조정에 속여서 바치고 공을 가로채 상을 받은 비인도적인 죄
9, 전임 통제사 이순신이 여러 해 노고하여 둔전을 통해 저축하여 놓은 군량미 수천석을 임의로 사용 낭비해 없애버려 독직한 죄
10, 전란 이래 오륙년 동안 40여차 싸움에 사생을 돌보지 않고 국가를 위하여 훈공을 세워오던 제장들을 무단히 배척하고 군무를 모르는 부랑자를 좌우에 막내의 간부로 두어 상벌이 거꾸로 된 죄

▲ 조정의 중신은 적군 요시라의 권모술수에 넘어가 그의 대변인이 되고 심부름꾼이 됐다.
원균은 머리를 들지 못하고 내심에 헤아리되 이것이 정녕코 이순신이 원수의 진중에 종군하여 자기를 참소한 것이라고 하여 순신을 원망하였다. 대곤大棍 50도를 때려서 두 볼기가 터져 피가 흘렀다.

권율에게 매를 맞은 원균은 이를 갈며 권율과 순신을 원망하였다. 순신이 권율에게 자기를 무함한 것이라 하여 변명도 못하고 분을 머금고 칠천도 본진으로 돌아갔다. 순신은 무함한 일이 없었다. 이는 정인군자를 오해하는 것이다. 원균은 술만 먹고 매일 대취하여 제장들과 대면을 아니한다. 매를 맞은 통제사가 아니 부끄러울 리는 없었다.

수군의 패망한 책임을 논하면 어찌 원균뿐이리오. 권율 김응서의 무리가 적의 반간계를 믿고 간섭 독촉하여 사지를 보내고 조정에 있는 무리들도 서로 호응하였으니 가히 눈물을 흘릴 일이로다.
정리 | 이남석 더 스쿠프 대표 cvo@thescoop.co.kr 자료제공 | 교육지대(대표 장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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