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채무시계는 경고음을 울렸는가

재정준칙을 만들자는 주장에 힘이 실리고 있다. 국가채무가 더 이상 늘어나선 안 된다는 논리에서다. 무언가 이상하다.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의 3분의 1 수준밖에 안 된다. 그런데 한편에선 ‘나라빚’ 때문에 큰일날 것처럼 호들갑을 떤다. 왜일까.

기획재정부는 10월 6일 국회에 ‘2014년도 예산안의 국가채무 전망’을 제출했다.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적자성 채무가 사상 최초로 국가채무에서 50%가 넘어섰다.”

적자성 채무는 채무에 대응할 만한 자산이 있는 금융성 채무와 완전히 다르다. 자산이 없기 때문에 오직 조세 등으로 재원을 마련해야 한다. 이번 세대가 갚지 못하면 미래세대가 갚아야 한다. 상황이 심상치 않아 보인다. 그러자 보수언론들이 펜을 들었다.

그중 한 신문의 사설을 보자. “여야 정치권이 방만한 나라살림에 제동을 거는 재정건전화 법안을 잇달아 발의하고 있다. … 무차별 퍼주기 복지공약을 남발하던 정치권이 이제 와서 나라살림을 걱정하니 찜찜한 구석도 없지 않다. … 우리도 여러 선진국처럼 재량지출에 대한 엄격한 통제장치를 갖추고 있다면 재정건전화 달성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참에 재정지출을 통제할 준칙을 세워 ‘나라빚’이 늘어나는 걸 막자는 주장이다. 사실 보수언론이 재정준칙을 세우자고 한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경제민주화’ 바람을 타고 ‘복지재원마련’이 이슈가 될 때마다 이 얘기를 꺼내들었다. “법적 구속력이 있는 준칙을 마련하지 않고 포퓰리즘에 물든 정치인들에게 나라 살림을 맡겨두면 재정건전성은 급속히 악화될 위험이 크다(A신문ㆍ2013년 2월)”

나라 살림을 건전하게 하자는 주장이다. 감히 토를 달 이가 없을 게다. 재정건전성 확보를 위해 재정준칙을 도입하는 국가도 늘어나고 있다. 홍승현 한국조세연구원 재정지출분석센터 센터장은 “1990년 5개국(독일ㆍ인도네시아ㆍ일본ㆍ미국ㆍ룩셈부르크)에 불과했던 재정준칙 운용국가들이 2012년에는 76개국으로 늘었다”며 “장기적 재정규율의 필요성과 재정에 대한 신뢰성 확보의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음을 반영한 것”이라고 말했다. 틈만 나면 쪽지를 날리면서 선심성 예산을 짜는 국회의원까지 재정준칙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김춘진 민주당 의원은 9월 3일 국가채무 한도 설정, 추경요건 강화 등의 내용을 담은 국가재정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김무성 새누리당 의원은 10월 10일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을 전년도보다 낮게 유지하는 내용을 담은 국가재정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이런 법안이 발의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한국의 국가부채는 주요 공공기관 41곳의 부채까지 포함하면 1000조원이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국가채무가 늘어나는 속도도 빠르다. 외환위기 당시인 1997년 국가채무액은 60조3000억원이었지만 현재는 515조2000억원으로 7.5배 늘었다. 조세부담률이 19.7%에서 19.9%로 고작 0.2%포인트 증가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정부재정이 온통 나라빚으로 충당됐다는 얘기다.

국가부채 1000조원 추산

그렇다고 ‘국가채무에 빨간불이 켜졌다’면서 호들갑을 떨 정도는 아니다. ‘세출예산을 규제해 국가채무를 더 이상 늘리지 말자’는 주장이 나올 만한 상황도 아니다. 기획재정부가 발표한 2013년 기준 국가채무액은 480조3000억원으로 GDP 대비 36.2%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 국가채무비율 108.8%의 3분의 1도 채 안 된다. 한편에선 ‘공공기관 부채를 포함해서 계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주요 공공기관 41곳의 부채 520조3000억원을 합쳐도 국가부채비율은 71% 수준이다. 이 역시 OECD 평균보다 낮다.

▲ 한편에선 세출규제가 복지정책을 공격하기 위한 것 아니냐는 주장을 내놓고 있다. (사진=뉴시스)
김승래 한림대(경제학) 교수는 “아무리 봐도 재원이 부족해서 부채가 증가한 것인데 지출을 줄여야 한다는 논리로 가고 있는지 모르겠다”며 “재정건전성을 확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세입을 늘리는 게 순서”라고 지적했다. 김승래 교수는 “국가부채가 GDP의 200%를 웃도는 일본도 탄소세를 도입하고 소비세를 5%에서 8%로 늘리는 등 세입을 늘리는 정책을 폈지 무조건 세출을 막는 정책을 펴지 않았다”며 “우리나라 조세부담률은 OECD 평균인 25%에도 못 미치는 20% 수준인데, 최소한 그 수준까지는 올려놓고 난 후에 재정지출 규제를 논해야 할 것”이라고 충고했다.

정창수 경희대(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부채가 증가하는 건 수입이 너무 적거나 지출이 너무 많아서다”며 “하지만 경제규모 등을 감안해 다른 나라와 비교해 볼 때 우리나라의 재정지출 규모를 결코 많다고 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독일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4만1514달러(2011년 기준)로 우리나라(2만2582달러)의 1.8배지만, 중앙정부의 한해 재정지출액은 약 1100조원으로 우리나라(약 273조원)의 4배가 넘는다. 프랑스 역시 1인당 GDP는 3만9772달러로 1.7배 많지만, 재정지출액은 약 1200조원으로 4.4배에 달한다. 한국은 경제규모에 비해 재정지출이 적다는 얘기다.

재정준칙 세우면 재정건전성 개선될까

그렇다면 재정준칙을 세워 세출을 규제해야 한다는 주장은 무슨 이유에서 나오는 걸까. 여기엔 ‘복지를 늘려선 안 된다’는 무서운 근거가 숨어 있다. 재정준칙을 만들어 국가부채의 주범인 복지예산을 줄이고 재정건전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 언론이 사설을 통해 재정준칙 수립을 운운하면서 복지를 언급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 국가채무를 제한하는 재정준칙을 법으로 정해 방만한 재정운영을 막는 방안도 실행에 옮길 때가 됐다. … 세금은 덜 내면서 복지 혜택은 선진국 수준으로 받겠다면 나라 곳간이 견뎌내질 못한다(B신문ㆍ2013년 5월).”

최희갑 아주대(경제학)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원래 선진국의 재정준칙은 경기침체기에 적자재정을 얼마나 일으킬 수 있느냐는 문제에서 출발했다. 균형재정을 꾸릴 것인지, 적자재정을 꾸릴 것인지에 대한 논의라는 얘기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선 복지 탓에 지출이 늘었고, 그 결과 국가채무가 증가했으니 재정준칙을 세워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상한선을 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선순위가 뒤바뀌었다. 복지준칙을 상위에 놓고 합의점을 만든 다음 재정준칙으로 세입ㆍ세출을 조정하는 게 맞지 않은가.” 재정준칙의 논점이 완전히 빗나갔다는 얘기다.

최희갑 교수는 “‘복지 때문에 부채가 늘었으니 부채를 줄이기 위해 복지를 줄여야 한다’가 아니라 이미 복지가 필요하다는 것에는 국민적 합의가 있는 만큼 어떤 복지를 할 것인지, 우선순위는 어디 둘 것인지를 정한 후에 그에 걸맞은 재정준칙을 정하는 게 수순”이라고 주장했다.

최승필 한국외국어대(법학) 교수는 “국가부채가 복지예산 때문에 늘어났는지는 따져봐야 할 문제”라며 “재정지출 규제는 국가부채를 줄인다는 명분을 앞세워 복지예산을 줄여야 한다는 논리로 귀결될 수 있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현재 국가부채 총량규제 등의 주장이 나오고 있는데, 너무 수치에 치중하는 것 아닌가 우려된다”고 꼬집었다.

“재정준칙 기준부터 세워라”

그렇다. 국가채무는 ‘얼마를 줄여라’고 해서 줄일 수 있는 게 아니다. 복지 역시 마찬가지다. 복지를 줄이기 위해 국가채무의 총량을 규제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최승필 교수는 “복지를 국가채무에 연결하는 방식의 재정준칙 논의는 엉뚱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재정준칙을 세워도 쉽게 운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재정준칙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무엇보다 국회의 조정역할이 중요하다.

그런데 우리나라 국회가 정치색을 떠나 조정역할에 충실할 수 있을지 미지수다. 최승필 교수는 “지금 논의되고 있는 페이고(PAY GO)는 새로운 지출을 늘리려면 기존의 지출은 줄여야 하는 재정원칙이기 때문에 각 부처의 이해가 충돌할 수밖에 없다”며 “다양한 논의를 거쳐 선순위와 후순위를 합의로 이끌어야 하는데, 과연 국회가 그 역할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선 의문”이라고 꼬집었다. 지금도 다양한 연구결과와 의견을 따져 보지 않고 법안을 만드는 바람에 갈등을 일으키는 국회가 재정준칙이 제대로 작동시킬 만한 역량을 갖추고 있느냐는 거다.

올해 2월 재정준칙을 필요하다는 보고서를 발표한 홍승현 한국조세연구원 재정지출분석센터 센터장은 “재정준칙은 뚝딱뚝딱 만들어서 적용해서도 안 되고, 그렇게 할 수도 없는 것”이라며 “학계가 필요성을 느끼는 만큼 관련 논의를 차근차근 해나가야 한다는 것이지 지금 당장 재정준칙을 만들어서 실행해야 한다는 건 아니다”고 말했다.

그래서 지금 중요한 건 국가채무총량을 줄이는 게 아니라 기준점부터 만드는 것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이원희 한경대(행정학) 교수는 “복지국가를 지향하고 있는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부채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며 문제를 지적했다. “한편에선 국가부채를 ‘다음 세대의 부담’으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현 세대의 부담이다. 부채의 이자만 해도 연간 수십조원에 달하기 때문이다. 그것만 줄여도 여러 정책을 추진할 수 있다.
부채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은 사실 많다. 재정준칙을 세워 재정규모를 직접 통제할 수 있다. 절차나 과정을 통제하는 방식도 가능하다. 재정지출을 막지 않고 세입을 늘릴 수도 있다. 지금 우리가 해야 일은 이런 방법 가운데 무엇을 선택하고, 이를 어떤 기준으로 운영할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재정운용 기준점을 찾아야 하는 이유다.”

최근 들어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재정준칙 문제는 사실 ‘세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세출을 규제해 국가채무를 조정하자는 취지다. 하지만 국가재정은 ‘세출’로만 조정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주장도 많다. 특히 나라빚을 털기 위해선 세입을 늘려야 한다는 분석도 나온다.

정창수 교수는 “국가재정은 수입에 지출을 맞추는 게 아니라 지출에 수입을 맞추는 구조”라며 “증세 논의는 별개로 치더라도 수입을 늘리려 하지 않은 채 재정지출만 규제하려 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정 교수는 다음과 같은 주장도 덧붙였다. “재정의 신뢰성을 회복하기 위해 지하경제 양성화나 지출구조조정을 당연히 해야 한다.

▲ 정치권은 재정지출 상한선 규제를 골자로 한 국자재정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사진은 김무성 새누리당 의원. (사진=뉴시스)
하지만 지하경제 양성화는 이미 피로감을 느끼는 것 같다. 양성화 할 수 있는 부분이 많지 않아서다. 이미 민간기업의 89%가 현금영수증과 카드를 사용하지 않는가. 공공소비지출은 더 투명하다. 생각보다 지하경제가 적을 수 있다는 얘기다. 지출구조조정을 할 부분들이 있지만 사이즈가 너무 작다. 건설 분야 예산을 좀 더 줄여야 하는 것은 맞지만 이걸 줄인다고 해서 세입이 크게 늘어나는 것도 아니다. 일단은 새로운 세입을 확보하는 게 중요하다. 예컨대 비과세 감면과 같은 증세가 있을 수 있다. 액수로는 지방의 비과세 감면까지 포함하면 연간 약 50조원에 달한다. 이런 걸 잡아내야 하는 거다.”

국가재정은 세입ㆍ세출로 조정해야

박근혜 정부는 ‘복지공약’을 등에 업고 정권을 잡았다. 세금을 올리지 않고도 복지공약을 실천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그 약속은 집권 1년이 채 되지 않은 시점에서 깨졌다. 그러자 ‘나라빚이 심각하게 늘었으니 복지를 미뤄야 한다’는 주장이 잇따른다. 세입을 늘릴 생각은 하지 않고 무조건 세출만 규제하려 한다. 하지만 국가재정은 결코 ‘세출’로만 조정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세입과 세출이라는 두 바퀴가 제대로 굴러야 국가재정이 안정된다.

최승필 교수는 “재정준칙은 세출을 막는 법이 아니라 재정운용기준을 마련하기 위한 합의의 과정”이라고 말했다. 그렇다. 재정건전성도 중요하지만 합리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재정건전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주장이야말로 국민을 호도하는 것이다. 복지바람을 잠재우기 위해 재정준칙을 세워선 안 된다는 얘기다. 한국의 국가채무시계는 아직 경고음을 울리지 않았다.
김정덕ㆍ강서구 기자 juckys@thescoop.co.kr | @juckys3308

저작권자 © 더스쿠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