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필재의 人sight | 구학서 신세계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형제를 포함해 재벌 총수 일가 8명이 횡령ㆍ배임 등으로 구속 처분을 받았다. 검찰이 수사 중인 동양그룹과 효성그룹 오너 일가의 혐의도 별반 다르지 않다. 해당 기업에서는 으레 의사결정권자가 없어 적극적인 투자와 신사업 추진이 어렵다는 소리가 나온다. 시중엔 정치 보복이라는 이야기도 떠돈다. 전 정권과 차별화하려 시범적으로 손보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구학서 신세계 회장은 이런 시각에 대해 “납득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삼성그룹 공채 출신인 구 회장은 신세계에 영입돼 2009년까지 만 10년 간 CEO를 지냈다. 윤리경영으로 신세계를 ‘유통 명가’로 키웠고, 그의 조언으로 신세계 오너 이명희 회장의 2세인 정용진 부회장 남매는 3500억원의 상속증여세를 주식으로 납부했다. 10월 10일 구 회장을 만나 최근 재계를 덮친 ‘총수 구속 쇼크’와 관련해 입장을 들어봤다.

 
✚ 오너의 구속으로 경영이 위축됐다는 주장에 대해 어떻게 봅니까?
“오너가 없어서 의사결정을 못한다는 건 말이 안 됩니다. 오너는 주주인데 주주가 구속됐다고 주식회사가 안 돌아가면 지배구조에 문제가 있는 거죠. 배임 혐의야 경우에 따라 법률적으로 논란의 소지가 있지만 횡령, 탈세, 재산 해외 도피는 명백히 범죄입니다. 오너라고 해서 처벌 기준이 다를 수 없죠. 간디는 ‘도덕 없는 상업’이 사회를 위태롭게 만든다고 했습니다.
반면 동양그룹이 기업어음(CP)을 발행한 건 법률 위반이라기보다 경제적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경우로 봅니다. 물론 도덕적으로야 문제가 있죠. 그러나 사기 판매를 했다기보다는 CP를 발행해 돌려막기를 한 것으로 봐요. 기업이 그런 상황에서 CP를 발행하지 않고 부도를 낼 수는 없습니다. 투자자들도 동양그룹이 위험하다는 보도를 접하고도 금리가 약간 높으니까 산거고요. 그러면 자신이 한 투자에 대해 상응하는 책임을 져야죠.”

✚ 오너 경영 체제와 전문경영 체제 중 어느 쪽이 더 효율이 높으냐에 대해서는 경영학자들도 결론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현실적으로 오너 경영과 전문 경영을 어떻게 조화시키는 게 바람직하다고 보나요?
“조선 왕조에 세종이나 정조 같은 임금만 있었던 건 아닙니다. 조선은 어떻게 보면 사대부들이 다스린 나라로 당파싸움 같은 폐단도 있었지만 신하들이 경연을 통해 임금을 교육시켰습니다. 그런데 요즘 중간 규모 정도의 국내 기업을 보면 오너가 무소불위의 권한을 행사합니다. 조선의 왕보다 더 막강합니다.
현명한 오너라면 사람을 잘 쓰고 권한을 이양해야 합니다. 오너는 구성원 중에서 인재를 발탁해 전문경영인으로 앉히고 콘트롤만 할 수 있으면 됩니다. 그게 바로 주식회사의 장점이죠. 물론 규모가 작을 땐 직접 경영에 참여할 수도 있겠죠.”

오너라고 처벌기준 달라선 안돼

✚ 주인이 있는 회사라면 최고 의사결정은 오너가 해야 하지 않나요?

“오너는 대표이사를 임명하고 경영진에 대한 인사권을 행사하면 됩니다. 대규모 투자에 대한 의사결정도 오너의 몫이죠. 그러나 경영 책임은 결재서류에 사인을 하는 전문경영인에게 물어야 합니다. 전문경영인은 수많은 구성원 중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고 그 자리까지 오르는 동안 능력을 검증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시행착오를 범할 가능성이 작죠. 오너는 전문경영인의 실적을 평가해 미흡할 경우 교체하면 됩니다. 국회 국정감사의 증인도 대표이사를 불러야 돼요. 실제로 경영을 하는 사람이 나와야 제대로 답변을 하죠.”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외친 이명박 정부는 30대 기업 대표들을 소집해 회의를 하면서 전문경영인을 배제했다. 전문경영인은 오너에 비해 격이 떨어진다고 생각한 듯하다. 그 바람에 대외활동을 하지 않던 일부 오너가 회의에 불려나갔다. 전문경영인 출신인 이 대통령이 전문경영인을 홀대한 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 전문경영인들에게 오너와의 관계에 대해 조언을 한다면….
“CEO는 회사를 지속 가능한 ‘계속기업(going concern)’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자면 오너가 영속해야 합니다. 오너 회장이 물러나기도 하고 물러났다 복귀하기도 하지만 주식을 전량 사회에 환원하지 않는 한 회장직에서 물러나는 건 별 의미가 없어요. 정작 오너가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날엔 회사도 문을 닫는 겁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오너가 책임을 지게 해서는 안 됩니다. 오너가 영속하려면 모든 책임을 전문경영인이 져야 한다는 거죠. 그러자면 전문경영인에게 그만한 책임에 상응하는 권한이 있어야 합니다. 오너가 구속되는 건 법률적 권한을 행사했기 때문입니다.
전문경영인은 오너에게 법률적 책임이 돌아가지 않도록 자기 책임 하에 경영 의사결정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게 기업에 좋을뿐더러 구성원에게도 좋습니다. 삼성이 잘나가는 건 이병철 회장 시절부터 전문경영인에게 권한을 이양하고 책임을 지게 했기 때문입니다. 삼성 출신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이야기가 다른 회사로 옮기니 권한이 절반도 안 되더라는 거예요.”

 
✚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갑을 문제는 어떻게 보나요? 경제민주화 정책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개인은 태어날 때 출발점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국가가 최하위층을 사회 안전망으로 보호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대기업과 중소기업을 각각 갑과 을로 구분하고 정부가 을의 입장에서 갑의 횡포를 규제한다는 발상은 시장경제 원리와 배치될 소지가 많습니다.
이 문제는 소비자의 관점에서 풀어야 한다고 봅니다. 시장경제의 판단 기준은 소비자에게 유리한가 불리한가입니다. 소비자가 품질 좋은 물건을 사고 쾌적한 서비스를 받을 수 있어야지 중소기업이라고 보호하는 건 소비자를 위해서도 국가경제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는 거죠. 자칫 중소기업의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도 있고요.
대기업이든 중소기업이든 국제 경쟁력이 없으면 도태돼야 합니다. 단적으로 경쟁력 없는 자동차 부품 회사를 굴러가게 놔두면 완성차의 경쟁력도 떨어지게 마련이에요. 경쟁을 막는 정책은 잘못된 정책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중소기업 적합업종에 대해서도 회의적이에요. 푸드 코트처럼 시장에 맡길 경우 대기업이 손들 업종도 많습니다. 경제민주화는 개인 수준의 민주화라야지 기업의 민주화로 가선 안 됩니다.”

대ㆍ중소기업 상생, 소비자 관점에서 풀어야

구 회장은 과거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에 “회원사 오너들에게 나오는 국민연금을 사회에 기부하자고 제안한 일이 있다”고 털어놓았다. 강신호 회장은 긍정적 반응을 보였지만 회장단 일부가 반대해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당시 오너 국민연금의 사회환원이 이뤄졌다면 반反기업정서가 다소 완화됐을 거라고 그는 말했다. “사실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는 오너 클럽인 전경련에 대해 차별적 특성이 없습니다. 경총을 전문경영인 클럽으로 전환하면 견제도 하고 균형을 유지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경총이 주도해 우리 사회의 현안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끌어낼 수도 있겠죠.”

✚ 박근혜 대통령에게 주문을 한다면…
“일자리를 최우선으로 하겠다고 하지만 일자리가 잘 생겨나지 않습니다. 당장 대규모 국내 투자가 근래 거의 없습니다. 클린룸 하나만 지어도 건설 경기가 살아날 텐데 말이죠. 박 대통령이 공장 준공 테이프 끊는 모습을 봤으면 좋겠습니다.”
이필재 인터뷰 대기자 stolee@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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