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당 김기환 선생의 이순신공세가(李舜臣公世家) 제49회

진린은 순신이 제 공을 자기에게 양보하는 것을 보고 대단히 기뻐하였다. 내조흡 강린약 등을 살려주고 분함과 부끄러움이 풀려서 순신의 손을 잡으면서 “내가 중국에 있을 때부터 장국의 대명을 많이 들었더니 과연 명불허전이오!”하였다. 그날 저녁에 내유격 왕유격 강천총 정천총을 위시해 명나라 제장들은 패군한 죄를 면한 것을 순신의 은덕이라 하여 그 오만하던 놈들이 순신의 앞에 머리를 숙여 감사하였다.

 
진린은 순신의 병위를 보고 크게 놀랐다. 이순신은 13척의 병선을 가지고더라도 300여척의 적을 격파한 명장이라고 하여 중국에서나 조선에서나 많이 들었는데 순신의 병선이 13척이 아니고 온 바다를 덮은 대함대였다. 신속하게 확장된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진제독의 군사가 고금도 새 선창에 하륙하자 순신이 몸소 진린 이하 총병 등자룡鄧子龍, 유격장군 계금季金 양천윤梁天胤 복일승福日昇 왕원주王元周 이천상李天常 강린약江鱗躍의 무리를 새로 건축한 아문으로 인도하고 또 부하를 시켜 모든 장병을 계급을 따라 각기 병영내로 인도하게 하였다. 그들 명나라 장병들도 이름이 높은 조선의 명장 이순신을 보자고 다투어 앞을 나서는데 순신의 풍채는 팔척장신에 용 수염 범 눈썹으로 의기가 헌앙1)하였다.

명나라 장병들이 다 자리를 잡을 만한 때에 순신은 미리 준비하였던 산해진미의 성찬이 언덕처럼 쌓였고 1000 독의 좋은 술로 병과 잔이 풍성하고 깨끗하여 비록 여자는 한 명도 없으나 크게 잔치를 베풀어 그 많은 명나라 장졸에게 저마다 양껏 마시고 먹게 하였다. 진린은 자기네 나라 북경에 있는 것 같다고 말하며 더할 수 없이 만족하였다. 그 말뜻은 북경을 떠난 뒤로 이때껏 한 번도 이렇게 유쾌하고 풍족한 대우를 받아본 일이 없다는 말이었다. 성품이 오만하고 사나운 진린은 서울서 오는 길에 고금도에 도착만 하면 무엇이던지 책을 한 가지라도 잡아내어 조선명장이라고 이름이 높은 이순신을 혼을 내어 그 기상을 꺾으리라고 마음을 먹은 것이었다.

주육을 싫도록 먹은 명나라 사졸들도 취중에 이순신을 두고 과연 어진 장수라고 칭찬하며 혹자는 “우리가 세상에 나서 처음 먹는 성찬이다. 한성에서도 이렇게는 못 먹었다” 하고 그 말끝에 “참 동국東國의 영웅이다” 또는 “아니다, 한신 제갈량이라도 이렇게는 못한다” 하며 떠들었다. 만일에 조금이라도 책을 잡혔던들 청파 이찰방 같은 모욕을 당하였을지 모른다. 사납기로 유명한 진린이 무슨 핑계만 잡으면 벼락이 내릴 것은 물론이었다. 그런데 불행히 한 사단이 생겼다. 진린이 온 지 이틀 만에 적의 수군 일대가 고금도에서 얼마 멀지 아니한 녹도를 습격한다는데 그 선봉선 2척이 절이도에까지 들어왔다는 경보를 받게 되었다.

 
순신은 선조로부터 모든 군무를 진도독의 절제를 받으라는 밀령을 받았으므로 곧 그 경보를 진도독에게 보고하였다. 이때야말로 명나라 수군의 무위를 보일 첫 번째 기회라 하여 진린은 순신에게 아무 의논도 아니하고 정예라는 유격장군 내조흡來祖歙 왕원주, 천총千總 강린약 정문린丁文麟과, 파총把總 공진龔璡 진국경陳國敬 등을 불러 병선 50척을 주어 적을 무찌르라고 하였다. 순신이 진린을 보고 “천병이 먼 길에 왔을 뿐 아니라 이곳의 수세水勢 형편을 잘 알지 못하리니 소인의 병선으로 돕게 함이 어떠하올지?” 하였다. 진린은 생각하기를 순신에게 공을 뺏길까 하여 조선 병선이 길만 가르쳐 주고 적과 충돌이 되지 아니할 것을 조건부로 허락하였다.

진린의 병선 50척은 기고당당하게 녹도를 향하여 달리고 순신의 병선은 멀리 그 뒤를 따랐다. 순신은 우수사 안위에게 병선 20척 녹도만호 송여종에게 병선 8척을 주어 각기 밀계密計를 주어 두 함대가 접전이 되어 포연이 자욱하거든 그 연기 틈을 타서 송여종은 적의 뒤를 돌아 절이도의 뒤 그늘에 매복하게 하고 안위는 명병이 위급한 지경에 빠지기까지는 도와 싸우지 말기를 재삼 분부하였다.

그리고 순신은 관전하기 위하여 진도독의 배와 두 기함이 같이 금당도金堂島까지 이르렀다. 그 적선은 대마도수 종의지의 함대였다. 순천에 유진한 소서행장이 백전의 상승장군常勝將軍 이순신의 함대가 고금도에까지 진주하여 순천과 수로 백리를 격하여 근거지를 잡고 일기도수 모리민부의 함대를 파멸한 것을 볼 때에 그 위협을 받아서 남해 방면에 주둔한 종의지 도진충항 오도순현 유마청신 내도통총 등당고호의 무리에게 청원하여 고립된 순천을 도우라고 하여 이상 여러 장수들이 구원하기로 하여 차례로 병선을 몰고 오는데 금번은 종의지의 함대가 왔던 것이었다.

오만함 버리고 머리 숙이다

명나라 함선에서 먼저 방포하고 도전하였다. 적의 함대는 잠시 관망하는 모양을 하더니 곧 방포 응전하였다. 가장 두려워하는 이순신의 함대는 아니고 명나라 함대인 것을 볼 때에 얼마쯤 안심한 모양이었다. 격전이 벌어진 약 1시간이나 계속하다가 두 함대는 점점 서로 전진 접근하여서 단병전이 일어났다. 순신은 멀리서 바라보기에 명나라 병선 4•5척에 적의 검객이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명나라 전선 3척이 완전히 일본군에게 점령을 당하자 나머지 명나라 병선들은 항오가 어지럽게 되어 그만 퇴각하였다. 그 뒤를 따라 적선은 질풍 같이 추격하여 온다. 순신은 진린의 뒤를 따라 돌아와 운주당運籌堂에 술과 안주를 베풀고 진린을 청하여 민망함을 풀어 위로하여 승부는 병가의 상사라 너무 상심할 것이 없다고 하였다.

 ▲ 격전 끝에 일본군에 쫓겨 고금도로 돌아온 명나라 장군 진란을 순신은 술과 안주를 베풀며 위로했다.
안위는 벽파진에서 순신의 쓰던 병법을 배운 바와 같이 자기가 몸소 선봉이 되어 대포와 화전을 소낙비 퍼붓듯이 적선을 향하고 맹렬히 쳐들어갔다. 20척이나 되는 생력군生力軍이 꼬리를 이어 들어치는 바람에 적은 사력을 다하여 격전하였으나 전법이 명군과는 두드러지게 달리 강하여서 도저히 감당해 내지를 못하여 많은 군사를 죽이고 점령하였던 명나라 함선도 배 타는 법이 일본선과 달라서 도저히 불편하여 다 내어버리고 동으로 달아났다. 숨어서 전황을 엿보고 있던 송여종의 복병선 8척이 불의에 돌연히 내달아 길을 가로막아 안위의 함대와 앞뒤로 협공하였다. 적은 대경 낭패하여 어지럽게 혈로를 뚫고 빠져 달아났다. 송여종은 적선 6척을 바다에서 전포하여 머리 69급을 베었다.

안위는 순신에게 도로 찾은 명나라 함선 3척과 그 속에 있는 중국 물건과 적의 머리 40급을 바쳤다. 송여종은 일본 병선 6척과 머리 69급을 바쳤다. 승전하고 돌아온 조선군사는 의기당당하였으나 중원 군사는 의기가 위축되었다. 진린은 명병은 패하고 조선군은 이겨서 기세가 왕성한 것을 보고 분이 나서 명나라 병선의 주장이던 유격 내조흡 천총 강린약을 잡아들여 앞에 꿇리고 손수 칼을 빼어 들고 목을 베려 하였다. 순신은 이 광경을 보다가 진린에게 안위 송여종 두 장수가 베어온 적의 수급 109급과 명나라 함선 3척과 일본 함선 6척을 주며 “노야는 천조天朝의 도독으로 조선군사까지 지휘할 권한이 있은즉 누가 이겼으나 다 같이 노야의 공이 아닐 리가 없소.” 하였다.

진린은 순신이 제 공을 자기에게 양보하는 것을 보고 대단히 기뻐하였다. 그래서 내조흡 강린약 등을 살려주고 분함과 부끄러움이 풀려서 순신의 손을 잡으면서 “내가 중국에 있을 때부터 장군의 대명을 많이 들었더니 과연 명불허전이오!” 하였다. 이날에 진린은 본영에 돌아와 명나라 장병에게 대하여 영을 내리기를 “지금 이후로 이통제를 소국 사람으로 보지 말고 나와 같이 노야라고 부르라. 또 그 절제를 나의 절제같이 받으라” 하였다. 그날 저녁에 내유격 왕유격 강천총 정천총을 위시하여 명나라 제장들은 패군한 죄를 면한 것을 순신의 은덕이라 하여 그 오만하던 놈들이 순신의 앞에 머리를 숙여 감사하였다.

이날 밤이 깊어 안위 송여종의 무리가 실망하여 순신을 보고 읍소하여 “소인 등이 사력을 다하여 전승한 공을 명의 장수에게 빼앗긴 바 되니 어찌 억울하지 아니하오리까” 하였다. 순신은 웃으며 “적의 수급은 이 같은 더운 날씨에 장차 부패될 물건이니 저들에게 주는 것이 무엇이 애석하리오. 자네들 공훈은 내가 우리 성상에게 장계를 올려 포창할 것이니 염려할 것이 없다”고 말하고 장계 초본을 내어 보였다. 안위 송여종은 황연히 꿈을 깨듯 술이 깨듯 깨닫고 감복하였다. 후일에 선조는 순신의 장계를 보고 무릎을 쳐 이순신의 사람을 다루는 수단을 찬양하며 명의 장수에게 빛이 나게 하여 그 오만한 진린을 감복하게 하였다하여 교유서를 내려 칭찬하고 안•송 양장에게도 벼슬을 올려 포상하였다.

적장 모리민부 종의지의 무리가 연전연패한 뒤에 소서행장은 이순신의 세력에 위압되어 변사 요시라를 한성으로 보내어 전년의 반간계를 또 시용해보려고 경략사 양호에게 화의를 청하였다. 양호는 막하 무사를 명하여 요시라를 결박하여 꿇리고 호령하기를 “이놈, 네 죄를 아느냐? 권율을 속이고 김응서를 매수 우롱하고 수군의 장성長城인 이순신을 반간계로 무함하고 원균을 대해로 꾀어내 삼도 수군을 전멸하고 한산도를 점령한 뒤에 남원을 함락하고 전주성을 공략하였거든 또 무슨 흉계를 품고 나를 찾느냐?” 하고 죄를 물은 뒤에 형장 80대를 때려 북경으로 압송하여 처참 효시하였다. 양호는 총독 형개와 협의하고 군을 삼로로 나누 동로는 제독 마귀가 양등산 파새 설호신 오유충 진인 해생 등 제장의 군사 2만 4000인을 거느리고 울산의 가등청정을 치게 하고, 서로는 제독 유정이 이방춘 우백영 남방위藍芳威 이녕 조희빈曹希彬 오광吳廣 등 제장의 군사 1만 3000인을 거느리고 순천의 소서행장을 치게 하고, 중로는 제독 동일원이 도관塗寬 학삼빙郝三聘 엽방영葉邦榮 노득공盧得功 모국기 안본립安本立 제갈수諸葛鏽 등 제장의 군사 1만 3000인을 거느리고 사천의 도진의홍을 치게 하였다.

수군제독 진린에게는 강화도 이북에 수비하고 있는 수군 허국위許國威 장량상張良相 심무沈懋 오유림吳惟林의 군사와 남하한 등자룡 계금 양천윤 왕원주 복일승 이천상 내조흡 왕계여王啓予 등 제장의 군사 합 1만 3200인을 배속시켰다. 현재로 군사는 등자룡 계금 등 이하 제장이 통솔한 무리 5000인이요, 더 증가되어 합 7000인이었다.

진린의 군사가 고금도에 와서 유진한 뒤로 조선 백성을 학대하며 재물을 약탈하므로 난리를 치르는 백성들이 견딜 수 없다는 애원 등장이 순신에게 제소된 것이 많았다. 중국놈들의 버르장머리란 어쩔 수 없었다.
진린이 이 소문을 듣고 순신에게 통역관과 아장을 보내어 그 연고를 물었다. 순신은 얼굴에 불평한 노기를 띠며 “우리 조선 군민이 천조의 도독이 옴을 보고 부모와 같이 우러러보았더니 이제 천병이 폭행 약탈하기를 일삼아 백성과 군졸이 이를 견딜 수 없어서 모두 다른 곳으로 피하려 하니 내가 대장이 되어 홀로 이곳에 있을 수 없은즉 나도 역시 진을 옮겨 보화도로 가고자 하노라!” 하였다.

진린이 이 말을 듣고 놀라 순신의 영문에 와서 친히 순신의 손을 잡고 간곡히 만류하였다. 진린은 그 자리에서 쾌히 허락하고 명군 진중에 조사를 실시하여 약탈한 군사를 일일이 순신에게로 잡아 보냈다. 순신이 논책하고 골라내어 명병을 징계하였다. 명병은 그 후부터는 순신을 자기 도독보다도 일층 더 무서워하여 약탈을 못하게 되어 조선군민이 이로부터 서로 편안하게 되었다.

적선 격파에 기여한 거북선

8월 6일에 순신이 진도독을 청하여 연회하고 놀더니 탐망군의 보고에 적선 백여척이 기고당당하게 절이도 밖에서 지쳐 들어온다고 경고하였다. 순신의 기함은 몸소 선봉이 되어 적선 중으로 돌입하고 순신의 배를 호위하여 다투어 돌진하여 대전쟁이 일어났다. 순신의 거북선은 좌충우돌하여 각 병선의 대포소리는 산악을 흔들고 시석은 소낙비와 같았다. 격전 수시간에 적선 50여척을 당파하여 버렸다. 온 바다에는 적선이 불타는 연기가 하늘을 가렸다. 적은 견딜 수 없어서 남은 배를 돌려 동쪽으로 달아난다. 이순신은 옛날 손자 오자보다도 낫다 하여 순신이 방패를 세워 탄환을 피하는 것은 진린이 그 임기응변하는 것을 탄복하고 진흙을 발라 불길을 이기는 것은 계금이 그 기발한 계책을 내는 것을 흠모하여 명나라 제장은 찬양함을 마지 아니하였다.

▲ 명나라 장군은 순신의 군 다스리는 제도와 백성을 돌보는 정사가 제갈량을 방불하다며 직접 찾아와 자문했다.
순신은 승전하고 돌아와 적의 머리 140급을 진린에게 바치고 적선 50척을 당파한 공을 전부 진린에게 돌려보냈다. 진린은 매우 기뻐하여 이날로부터 진린은 무슨 일에나 반드시 순신에게 물어서 하고 순신을 부를 때에 반드시 노야라고 부르고 가마를 타고 어디를 갈 때에도 반드시 순신과 나란히 가고 감히 앞서가지 아니하였다. 그리고 명나라 제장들 부총병이니 유격장군이니 참장이니 중군이니 하는 이들도 길에서나 어디서나 순신을 보면 반드시 진도독에게 대하는 것과 같은 예로 경대하며 신뢰하였다. 진린은 순신을 천거하여 명나라 황제에게 이순신의 장재와 훈공을 보고하여 이순신은 경천위지經天緯地2)의 재주와 보천욕일補天浴日3)의 공이 있는 장수라고 상주하였다.

이순신의 공이 아니면 일본병선이 산동 하북의 연해에 까지 왔으리라 하여 황제는 이순신의 전후 훈공을 살펴보고 수군도독이라는 명나라 벼슬을 봉하고 도독의 인수印綬와 호두영패虎頭令牌와 귀도鬼刀 참도斬刀와 독전기督戰旗와 남령기藍令旗 홍령기紅令旗와 곡나팔曲喇叭의 여덟 가지 물건을 하사하였다.

명사明史 여복지輿服誌에 “수군도독은 문무대신 및 속국의 번왕과 동등한 지위라” 하였다. 그런즉 “유명수군도독有明水軍都督”이라 하면 어떤 의미로 보면 조선 국왕과 동등한 지위였다. 그러므로 조선에서는 누구든지 이순신을 죄를 줄 사람은 없는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벽파진의 대승첩의 보고를 경략사 양호가 천자께 올려서 명나라 조정에서 초유문招諭文과 면사첩免死帖이라는 단서철권4)을 이순신에게 전하였다. 이것을 가진 사람은 자기 당대뿐 아니라 그 자손까지도 사형을 면하는 힘이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순신은 명나라의 수군도독으로 자처하거나 자칭하는 일은 없었다.

진린은 항상 말하기를 이순신의 군을 다스리는 제도와 백성을 돌보는 정사가 옛날의 이윤이나 제갈량과 방불하다 하여 대소 군무를 반드시 찾아와 자문하고 또 “이노야는 소국 인물이 아닌즉 중국에 벼슬하면 마땅히 천하의 으뜸 장수가 될 것이거늘 어찌 소국에서 몸을 구부려 스스로 곤궁하리오.” 하여 탄식하며 권고하였다. 또 순신의 병선은 그 제조 방식이며 법도가 실전에 적절하여 일본 병선보다 또 중국 병선보다 우월하다하여 판옥대맹선 1척을 순신에게 얻어 자기의 기함을 삼고 본래에 타고 왔던 중국 기함은 고금도 해안에 상륙시켜 두었다. 또 진린은 순신의 맹산서해시盟山誓海詩를 차운하여 순신을 흠모하였다.

질책 피하고자 목숨 끊은 수차

진린도 순신과 같이 신장 8척에 위신이 당당하여 중국에서 문무재를 겸한 장수라 하였다. 광동성廣東省 사람으로 성품이 웅장하고 사나우며 무용이 천근을 드는 장사였다. 자는 조작朝爵이오 호는 용애龍厓였다. 벼슬은 도독부동지수군제독都督府同知水軍提督이오 동쪽으로 온 이래로는 이순신을 생래로부터 처음 보는 대인물이라 하여 동심협력하기로 스스로 맹세하였다. 순신도 또한 진린의 찬시를 받고 다시 시를 지어 답하였다.

 
한편 이때 전에 동정찬획주사東征贊劃主事로 조선에 나왔던 병부주사兵部主事 정응태가 경략사 양호를 무함하여 울산 싸움에 군량 군기를 많이 버린 것과 군사를 많이 죽였다는 죄목을 얽어서 상소하였다.

동로 제독 마귀는 동래부로 내려가 울산의 도산성을 치는데 도산성은 가등청정이 한 번 실패한 뒤로 새로 수축하고 군사를 독려하여 굳게 지키므로 마귀의 군사는 발을 붙일 수가 없게 되어 군사를 많이 죽이고 퇴각하여 경주로 돌아와 유진하고 대기하고 있었다.

중로 제독 동일원의 군사는 진강晋江의 적을 쳐 파하고 사천에 들어가니 도진의홍은 사천의 법질포法叱浦에 새로 성채를 쌓고 고성과 하동을 좌우익으로 삼아 유진하고 동양창東陽倉을 통하여 사방에 새로 성채를 쌓으니 영춘永春 망진望津 곤양 고관故館으로서 그 중에 망진은 북쪽으로 진강과 통하고 영춘 곤양의 성채를 좌우로 벌였는데 도진의홍의 진은 장사진의 형세였다.

명나라 장수들은 망진이 가장 중요하니 먼저 망진을 깨뜨리면 다른 성채는 치기가 쉽다 하여 제독 동일원은 모국기로 하여금 망진을 치게 하였다. 일본 진중에 포로로 잡혀가 있던 명나라 관리 곽국안郭國安이 내응이 되어 망진성 안에 불을 지르고 모국기의 군사를 밤중에 불러들여 망진을 점령하고 승전하였다. 제독 동일원은 그만 적을 얕보는 마음이 나서 군사를 몰고 사천성으로 쫓아가 성을 에워쌌다. 모국기가 동일원에게 간하되 “우리 명병이 비록 몇 개 성채를 연파하였다 하나 적을 죽인 수가 많지 아니하고 적의 대군이 사천성으로 들어갔으니 만일에 적이 힘을 다해 성을 지킨다면 우리의 형세가 성을 깨기 어려울 것이니 차라리 사천을 버리고 고성을 쳐서 적의 외부 지원을 끊는 것만 같지 못할 것이오” 하였다.

동일원은 모국기의 양책良策을 듣지 않고 사천성을 에워싸고 쳐들어가다가 도진의홍의 아들 도진충항이 미리 수천근 화약을 길바닥에 묻어두었다가 불을 질러 폭발하여 명병 천여명이 폭사하였다. 이때를 기회로 하여 도진충항의 용장 이세정창伊勢貞昌 부외방조富隈方助의 무리가 창을 들고 내달아 군사를 지휘하여 맹렬히 추격하여 명병을 대파하고 수천급을 베었다.

조정에서는 임진란 이래로 7년간이나 난마와 같은 국가사를 경영하느라고 죽을 욕을 보고 몸과 마음을 쓰던 영의정 유성룡을 이이첨李爾瞻 유영경 이산해의 무리가 내외로 참소하는 통에 선조는 그 말을 듣고 유성룡을 파면하고 이원익으로 영의정, 이덕형으로 좌의정, 이항복으로 우의정을 삼았다.

수차가 관백이 되기 전까지는 수길이 마음을 놓고 내정을 맡길 만하였으나 관백이 되고 난 뒤로는 차차로 방탕하고 음란하며 사치를 숭상하여 수길이 장만하여 놓은 취락聚樂의 창고를 헐고 보물을 끄집어내어 수길에게 질책을 당할까 두려워서 기주紀州의 고야高野로 들어가 자살하여 버렸다.

수길은 수차가 죽은 뒤에 수차의 처첩 30여인을 삼조하원三條河原에서 목을 베어 한구덩이에 파묻고 “축생총畜生塚”이라는 표석을 무덤 앞에 꽂고 수차의 부하를 쫓아버렸다. 수길의 양자로는 직전신장의 아들이라든지 덕천가강의 아들이 있기는 하지만 자기 혈통으로는 오직 뒤늦게 낳은 계사생인 수뢰 하나뿐이었다.
정리 | 이남석 더 스쿠프 대표 cvo@thescoop.co.kr 자료제공 | 교육지대(대표 장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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