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의 기억법」

▲ 김영하 저|문학동내 펴냄
연쇄살인만큼 무서운 치매의 공포

초심初心. 처음에서 멀어질수록 되돌아가는 건 어렵다. 18년 넘게 소설을 써온 작가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한국문단의 이슈메이커인 김영하가 18년이란 시간을 뛰어넘어 처음으로 돌아갔다. 그의 신작 「살인자의 기억법」 곳곳에 데뷔작인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의 기운이 묻어 있다. 김영하가 돌아왔다.

「살인자의 기억법」은 올 7월 발간됐다. 상아탑에 있을 땐 그의 소설을 참 많이 읽었다. 누군가는 다독할 만한 작품이 아니라고 했지만 읽고 또 읽었다. 이야기를 힘차게 끌고 가는 특유의 필력이 좋았다.
그 기운을 얻고 싶었던 모양이다. 어쩌면 그의 에너지가 부러웠던 건지도 모른다.

짧은 이야기 힘 있게 전개

「살인자의 기억법」은 장편소설인데 두께가 얇은 편이다. 그마저도 글이 빽빽하지 않아 읽기에 부담이 없다. ‘힘’ 있는 짧은 이야기다. 내용은 알츠하이머에 걸린 연쇄살인범 이야기다. 김영하답다. 내용이 자극적이어서가 아니다. 주인공을 표현하는 모순된 상황이 ‘김영하가 쓴 소설’이라고 말해주고 있어서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빛의 제국」같은 전작을 보면 그렇지 않은가.

주인공은 연쇄살인을 즐겼던 70세의 김병수. 수의사인 그는 한때 시를 썼고, 등단까지 했다. 살인자와 문학이라니, 어쩐지 변주곡을 듣는 기분이다. 김병수는 자신이 죽였던 한 여자의 딸을 친딸처럼 키운다. 모순이다. 공소시효가 끝난 어느날, 그에게 거부할 수 없는 손님 ‘치매’가 다가온다. 기억을 가질 수 없는 김병수 주변에서는 연쇄살인이 발생한다. 그는 ‘살인’을 아는 사람이다. 전직 연쇄살인자의 직감으로 한 남자를 가해자로 지목한다. 하필 그 남자가 친자식처럼 키운 딸과 결혼하겠다며 찾아온다. 김병수가 거부할 수 없는 손님이다.

딸은 그의 친자식이 아니라서다. 딸을 보호하기 위해 김병수는 치매와 싸운다. 그것만으로도 모자라 딸을 지키고자 살인을 준비한다. 모순의 모순이다. 강렬하고 잔인한 소설의 제목과 달리 문장은 평이하고, 짧다. 그런데 이 평범해 보이는 여러 문장이 충돌하면서 이상한 의미를 만들어낸다. 미술로 보자면 콜라주고, 영화로 따지면 몽타주 같은 느낌이다. 전형적인 김영하표 문체다.

딸을 보호하려 살인을…

문장만 읽으면 딱히 큰 의미가 없어 보이지만 큰 줄거리는 그렇지 않다. 과하게 교훈적이지도 않고, 지나치게 감성적이지도 않지만 메시지는 묵직하다. 「살인자의 기억법」은 연쇄살인에 대한 공포를 말하려는 게 아니다. 치매와 그것이 수반하는 공포를 끄집어 낸 소설이다. 기억이란 보이지 않지만, 우리의 삶을 지탱할 때가 많다. 기억이 켜켜이 쌓이고, 세월이 지나면 좋은 기억만 남는 법이다. 이것을 ‘무드셀라 증후군’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것을 기억할 수 없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고단했던 지난날조차 떠올리지 못하는 것은 공포다. 「살인자의 기억법」이 기억을 이야기하면서 치매에 걸린 연쇄살인범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유다. 책의 물리적인 무게는 가볍지만, 화학적 흡수력은 뛰어나다. 그래서 소설의 마지막장을 덮으면 생각이 많아진다. 잠이 오지 않을 정도로….

 

북 에디터 한마디

3년 전 구입한 밥솥은 새 기능이 많았다. 사용법에 익숙하지 않은 아버지가 취사 대신 보온을 눌러놨다. 무려 5시간 동안…. 예상대로 밥은 설익었다. 물에 말아먹기조차 어려운 수준. 그런데도 아버지는 밥이 다 됐다며 어깨를 으쓱댔다. 참다못한 어머니가 밥을 음식물쓰레기봉투에 담자 아버지는 말 없이 두손을 모았다. 그날 우리집은 모처럼 ‘못먹는 밥잔치’를 벌였다. 착각은 이렇게 소소한 에피소드를 남긴다. 점점 나이 들어가는 부모님을 지켜드리고 싶다. 이 책이 준 이상한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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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희 기자 kkh4792@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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