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 숲속마을의 비밀

▲ 양평 숲속마을에 개성 있는 예쁜 집이 들어설 수 있었던 건 시행사의 작은 변화 때문이다.(사진=메종 드 라파미 제공)
경기도 양평의 전원주택 단지 ‘양평 숲속마을’에는 특별한 게 있다. 수도권 아파트는 미분양에 허덕이고 있지만 이곳 분양률은 100%다. 입주자들의 만족도는 120%다. 설계사와 시공사도 웃으며 일한다. 다른 건설업계에선 볼 수 없던 모습이다. 변화의 물꼬를 튼 주인공은 건설업계의 ‘애물단지’로 불리는 시행사였다.
가을비가 내리던 11월 2일 토요일 오후, ‘양평 숲속마을’에서 잔치가 벌어졌다. 양평 숲속마을은 ‘메종 드 라파미’라는 시행사가 경기도 양평에 조성한 전원주택단지다. 사실 말이 잔치였지 별다른 건 없었다. 동네 주민은 삼삼오오 모여 각자 준비한 음식을 나눠 먹고, 안 쓰는 물건을 한데 모아 필요한 이웃에게 싼 값에 팔았다. 그게 전부였다.

하지만 그건 외부인의 눈에 비친 모습일 뿐이다. 이 마을 주민에게는 나름 의미 있는 연례행사다. 결혼한 지 30여년 만에 서울의 아파트를 떠나 숲속마을로 이사를 왔다는 60대 부부는 “양평 숲속마을로 오고서야 사람 사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며 “이웃과 함께 어울려 살았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아 감회가 새롭다”고 말했다. 

뚜쟁이 마다치 않는 시행사

부부는 “빽빽한 서울 도심에 살면서 잊고 살았던 이웃이라는 단어, 밥 짓는 냄새, 개 짖는 소리, 골목을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우렁찬 목소리, 이런 것들을 다시 찾게 돼 기쁘다”고 덧붙였다. 이 작은 연례행사가 의미 있는 건 이 때문이다. 만남의 과정을 통해 이웃끼리 다정하게 얘기하고, 옆집에 놀러가고, 초대해서 먹을 것을 나누면서 ‘사람 사는 것 같은 행복감’을 만끽하고 있다는 얘기다.

 
물론 이런 콘셉트의 마을공동체가 새삼스럽진 않다. 이젠 서울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어서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지난해부터 ‘마을공동체 만들기’를 적극 지원하면서 인간미 넘치는 도심형 마을공동체가 조금씩 늘고 있다.

롤 모델은 1994년 서울 마포구에 자연 형성된 ‘성미산 마을’이다. 이곳에선 마을 주민끼리 협동조합을 만들어 반찬가게나 빵집을 운영하고, 심지어 대안학교도 직접 만들어 운영한다.

마을공동체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양평 숲속마을과 비슷한 ‘사람 냄새’를 느낀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먼저 출발한 마을공동체에서 풍기는 진한 사람 냄새에 비해 양평 숲속마을의 냄새는 아직 옅다. 대신 이곳은 타 마을공동체와는 다른 특별함이 숨어 있다. 애초에 입주자들을 기분 좋게 엮어준 ‘뚜쟁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양평 숲속마을의 시행사인 ‘메종 드 라파미’다.

2011년초, 고정훈 메종 드 라파미 대표는 지금의 양평 숲속마을 3만6363㎡(약 1만1000평)의 부지를 사들여 택지로 조성한 후 고급타운하우스를 만들려고 했다. 부지는 입구 두 곳만 막으면 산으로 둘러싸이는 형태로 마을을 만들기에 적당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가지 걱정이 문득 스쳤다. ‘고급타운하우스를 애써 완공했는데, 미분양 사태가 벌어지면 어쩌나’ 하는 거였다. 분양을 위해 홍보비ㆍ인건비를 추가 지출해야 했고, 이 비용들은 고스란히 분양가에 반영될 것 같았다.

집짓기 좋은 땅을 미분양으로 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당시 서울의 전세가격은 매월 10% 이상 상승하고 있었다. 부동산 경기침체로 매매조차 잘 이뤄지지 않았다. 수도권 외곽에는 미분양 주택이 넘쳤다.

고정훈 대표는 한가지 대안을 생각해냈다. 고급타운하우스가 아니라 높은 전세가격에 허덕이는 젊은 세대를 위한 마을을 만들겠다는 거였다. 그러기 위해선 이 마을에 지을 집의 가격은 서울의 전셋값보다 높지 않아야 했다. 마음만 먹으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시행사가 욕심만 덜 내면 가능했다.

고 대표는 곧장 일을 추진했다. 마을 부지를 구획하고 도로를 깔았다. 상하수도와 전기ㆍ통신시설이 들어올 수 있는 인프라도 갖췄다. 통상적인 시행사의 업무는 이제부터다. 건설사를 선정해 설계ㆍ시공을 맡긴다. 집이 완공되면 프리미엄을 얹어 입주자에게 분양한다. 입주자는 토지가격이 얼마인지, 공사비용이 얼마인지 알 수 없었다. 시행사든 시공사든 부르는 게 값이다. 분양가를 얼마든지 부풀릴 수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고 대표는 인프라가 갖춰진 직후 손을 뗐다. 택지만 조성해 분양하고, 공사는 입주자가 원하는 설계사와 시공사에 맡겼다. 비용은 제각각이었지만 고 대표가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토지를 분양받은 입주민이 결정할 사항이었다.

사실 2011년 9월 1차 분양 때는 8가지 타입을 정해 입주민에게 팔았다. 입주민의 편의를 높일 요량이었지만 2차 분양 땐 이마저도 관뒀다. 양평 숲속마을로 모이는 사람들의 욕구는 ‘나에게 가장 잘 맞는 나만의 집’이었기 때문이다.

고수혁 메종 드 라파미 실장은 “당시 이현욱 건축가(이현욱좋은집연구소 소장)가 쓴 「두 남자의 집짓기」가 서점의 베스트셀러였다”며 “때문에 ‘내 집 짓기’에 대한 관심이 날로 높아가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전셋값으로 내 집 마련

택지만 분양하니까 일부에선 오해도 생겼다. 기획부동산 사기가 아니냐는 거였다. 기획부동산 사기란 임야 등 넓은 땅을 사서 택지조성을 하지 않고 잘게 쪼개 되파는 거다. 고수혁 실장은 “전원주택의 꿈을 꿨던 사람들의 돈을 가로채는 사기꾼들이 많아 가끔 오해를 샀다”며 “오해를 받을수록 제대로 된 마을을 만들어야겠다는 의지가 강해졌다”고 말했다.

우여곡절 끝에 탄생한 숲속마을은 특별했다. 무엇보다 집집마다 외형과 구조가 다르다. 다른 주택단지에는 기본으로 있는 커뮤니티센터나 놀이터 등은 아예 없다. 시행사가 ‘입주자들이 원하면 만들겠다’며 짓지 않았고, 이는 분양가격을 낮추는 요인이 됐다. 시행사가 이윤이 남는 일을 스스로 버린 셈이다. 그때부터 마을에서는 더 희한한 변화가 일어났다.

일단 입주자들이 모일 만한 장소가 없으니 집집마다 돌아가면서 모임을 갖게 됐고,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입주자들의 관계는 더욱 끈끈해졌다. 시행사로선 입주자를 엮어주는 뚜쟁이 역할을 톡톡히 한 것이다. 입주자들은 한 목소리로 “시행사 덕분에 좋은 집과 좋은 이웃을 만난 것 같다”며 시행사 자랑을 늘어놨다. 시행사와 입주자가 이렇듯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다른 곳에선 보기 드문 일이다. 이 바탕에는 집에 대한 높은 만족도가 깔려 있다.

양평 숲속마을의 입주자 만족도는 120%다. 가장 큰 이유는 아파트 전세 가격에 ‘내 집을 내 맘대로’ 지어서다. 60대 김귀옥(가명)씨는 “아무것도 몰라서 어떡하나 걱정을 했는데 그리 어려운 게 아니더라”며 말을 이었다. “그저 집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어떤 걸 좋아하고 어떤 걸 싫어하는지 솔직한 얘기들을 나눴다. 그러니 건축가가 조감도를 만들어 보여주더라. 그걸 보면서 다시 의견을 제시해서 수정을 몇번 더 하고 집을 지었다. 건물은 몇달 새 뚝딱 만들더라. 신기했다.”

▲ 서울까지 출퇴근을 하기엔 먼 거리지만 입주자들은 늘 펜션에 놀러가는 기분으로 퇴근한다.(사진=메종 드 라파미 제공)
서울에서 나고 자란 김씨는 전원주택 생활을 꿈꿔 왔다. 그래서 여러 곳을 알아봤지만 내성적인 남편이 기존의 동네에 들어가는 건 꺼렸다. 다들 그곳 나름대로 삶의 방식이 있고, 그래서 외지인을 쉽게 반기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양평 숲속마을은 모두들 외지인이니 좀 더 편했다. 남편의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자마자 계약을 했다. 직업이 화가인 김씨는 “집 구석구석과 마당 뿐 아니라 온 동네가 화실이 된 듯하다”며 “매일매일 이곳에서 사는 게 아직도 꿈만 같다”고 말했다.

결혼한 지 7년 됐다는 최병수(가명)씨 부부는 수년간 서울 성북동 아파트에 살았지만 층간소음 문제 때문에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그러다 아파트에 회의를 느꼈지만 쉽게 전원주택을 선택하지 못했다. 이미 지어놓고 분양하는 주택들이 하나같이 맘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인터넷을 통해 우연히 양평 숲속마을을 보고 곧바로 달려왔다. 서너달 후면 이들 부부도 양평 숲속마을의 주민이 된다.

최씨는 “미분양 때문인지 텅빈 마을을 많이 봤는데, 숲속마을은 3차 분양을 하고 있다는 말에 검증된 곳이란 직감이 들었다”며 “더구나 토지가격을 포함하더라도 지금껏 알아봤던 가격보다 훨씬 싸고, 직접 지을 수도 있다는 말에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고 설명했다. 컴퓨터프로그래머인 그는 “너무 멀어서 출퇴근이 어려우면 이직을 해서라도 이 집에 살고 싶다”고 덧붙였다. 최씨 부부는 인근에 초등학교가 있다는 점, 자연 속에서 생활할 수 있다는 점, 밤이 되면 하늘에서 별이 쏟아진다는 점도 장점으로 꼽았다.

부동산중개업을 하는 김형규(가명)씨는 “전원주택을 세컨드하우스처럼 이용하는 이들이 많으면 유령마을 같아서 싫고, 단지에 불필요한 요소들이 많으면 가격이 올라가더라”며 “이곳이 원래 땅값이 싼 곳이기도 하지만 쓸데없는 걸 만들지 않아서 가격을 더 낮출 수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숲속마을에 반한 김씨는 장모에게도 이사하기를 권했고, 결국 처가도 옆에 집을 지어 함께 살기로 했다. 
  
가족 생각나게 하는 집짓기

집을 짓고 산지 6개월 정도 된 이윤호(양평 숲속마을 입주자회의대표)씨는 “집을 지으면서 가족이라는 걸 다시 한번 생각하는 계기가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집을 짓는 과정에서 어떤 구조가 아이에게 혹은 부인이나 남편에게 더 이로울까를 생각하게 되더라는 거다. 그래서 마당에 아이를 위한 모래놀이터를 만들고, 부인이 활동하기 편한 주방공간을 만들게 됐다.

 
분당의 대기업 계열사에 다니는 그는 “집에서 직장까지 1시간10분 정도 걸리지만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며 “오히려 출근을 할 때는 팔당대교를 건너면서 드라이브를 즐기고, 퇴근을 할 때는 마치 펜션으로 놀러 가는 느낌이 들 때가 많다”고 만족감을 드러냈다.

집집마다 건축가가 다르고 시공사가 달라 똑같은 집이 한채도 없다는 점도 입주자의 만족도를 높였다. 한채 한채가 모두 건축가의 작품이어서 이웃집에 놀러가는 재미도 쏠쏠하다. 집 구경이 곧 작품 구경이나 다름없다. 더구나 집을 짓기까지의 고민과 기다림 등이 어우러져 애착도 크다. 한 입주자는 “2억원을 들여 지은 집을 2억5000만원에 사겠다는 사람이 나타났는데, 팔지 않았다”며 “부동산 재테크를 하기에 이 집은 정말 아깝다”고 말했다.

입주자를 위한 맞춤형 주택을 지으면서 건축설계사와 시공사도 덩달아 변했다. 먼저 시행사에 떡값을 주고 공사를 수주하는 건설업계의 로비 관행이 사라졌다. 시행사가 땅만 분양하고 뒤로 빠졌기 때문에 시행사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땅값이 공개되니까 건축설계비용, 공사비용도 자연스럽게 오픈됐다. 이 때문에 입주자들은 여러 상황을 고려해 건축설계사와 시공사를 선택할 수 있게 됐다.

담합은 자연스럽게 사라졌고, 수주를 받으려면 가격경쟁과 실력경쟁을 벌여야 했다. 처음엔 시행사가 몇몇 건축가와 시공사와 제휴를 맺고 있었지만 2차 분양부터는 모든 형식이 자유로워져 입주자들의 입맛에 따라 외부 건축가와 시공사도 공사에 참여했다. 입주자의 선택을 받은 건축가와 시공사로선 소비자 입장에서 집을 지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더 꼼꼼하게 집을 만들어야 한다. 입주자들의 평가가 워낙 냉정하기 때문이다.

숲속마을의 시공사로 참여하고 있는 우든하우징 장지호 대표는 “건축주(입주자)가 여러 명이라는 건 좀 힘들다”면서도 “하지만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놓으니 여기저기서 공사를 의뢰해 긍정적인 면이 더 많다”고 말했다. 장 대표는 “분양된 것들만 지으면 되니까 쓸데없이 비용을 들이고 결재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것도 큰 장점”이라고 덧붙였다. 선분양이나 마찬가지여서 공사만 끝나면 대금이 들어온다는 거다. 이전의 건설업계 시스템에서는 꿈도 못 꿀 얘기다.

설계사로 참여한 이재혁 건축가는 “이런 방식은 정말 독특한 경우”라며 이렇게 말했다. “시행사 입장에선 이윤이 줄어들고, 제각각인 건축가와 시공사까지 관리해야 하니 일은 더 많아진다. 하지만 설계사 입장에선 실보다 득이 많다.

물론 주택마다 건축주(입주자)가 달라서 각각 접촉해야 하고 다들 비전문가라서 가르쳐가며 일을 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하지만 건축가들끼리 좀 더 멋진 집을 지어야겠다는 경쟁심이 생긴다. 또 대부분 젊은 세대이고, 집에 대한 그들의 시각이 독특해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는 데도 도움이 된다.”

▲ 양평 숲속마을은 분양률이 100%다. 입주자가 있는 땅에만 집을 짓기 때문이다.(사진=메종 드 라파미 제공)
떡값 사라지고 경쟁 생겨

주목할 점은 시행사의 작은 시도로 입주자도, 건축설계사도, 시공사도 활짝 웃었다는 거다. 과연 이런 집짓기가 건설업계에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을까. 건설업계의 고질병을 고치는 데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장지호 대표는 “집 짓는 방식을 살짝 바꾸자 모두가 행복해졌다”며 “작은 시도가 점점 더 많아지면 큰 변화를 불어오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렇다. 작은 개미구멍 하나가 단단한 둑방을 송두리째 허물어뜨리는 법이다. 한 시행사가 변화의 물꼬를 텄고, 성과는 제법 알차다. 변화의 바람이 깃드는 ‘개미구멍’은 이미 열렸다. 
김정덕 기자 juckys@thescoop.co.kr|@juckys3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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