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당 김기환 선생의 이순신공세가(李舜臣公世家) 제51회

이날 밤에 순신은 진린을 찾아보고 오늘이 가장 조수가 깊으니 총공격을 행하자고 청하였다. 그러나 적의 뇌물에 취한 진린은 순신의 말대로 움직이지를 아니하였다. 그러고 도리어 진린은 말하되 “나는 아직 행장은 그냥 두고 남해에 있는 적에게 항복한 반민을 먼저 칠까 하오”하고 딴소리를 한다. 명나라 함대를 물려서 행장이 달아날 길을 열어주자는 것이었다.

 
그 이튿날인 무술1598년 10월 4일에도 순신은 공격을 계속하여 적선 20척에게 파멸적 대타격을 입혀서 적군은 허둥지둥하다가 상륙 도주하였으나 진제독은 보고만 있었다. 6일에 도원수 권율이 순신에게 비밀서간을 보내어 명제독 유정이 적장 소서행장과 사신이 왕래한다는 말과 또 부유현에서도 더 퇴각하려 한다는 소식을 전하였다. 순신은 이 서간을 보고 그날 일기에 “통분통분痛憤痛憤”이라고 썼다. 또 이날에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도망해 나온 변경남邊敬男이란 이가 와서 고하되 풍신수길이 이미 죽고 그 자리를 다투는 사람이 많다는 말과 부산 울산 양산의 적진이 거두어져 들어갔다는 소식을 분명하게 말하였다. 그 이튿날인 7일에 유정의 군관이 진린의 진중에 와서 유정의 패문을 올렸다. 그 글에 “육군은 잠시 순천에서 퇴각하고 다시 정리하여 싸움에 나아간다” 하였다.

순신은 명장 진린의 방해와 저지로 왜교의 행장 의지 등 함대를 격멸하지 못하고 조수가 감하여져서 한을 머금고 또 반삭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순신은 진린을 데리고 그 동안에 고금도 본영으로 돌아왔다. 이번에 순신이 고금도로 간 것은 그 마음속에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로 물때가 조감潮減이 되어서 싸우려야 싸우지 못할 것, 둘째로 순신이 왜교 해문1)에 없고 보면 행장의 긴장했던 심리가 자연 완화되어 사천 기타 각처의 원병을 청해 오지 않게 될 것, 셋째로 명의 장수 진린이 장도에 오래 있고 보면 화친 좋아하는 행장의 뇌물에 현혹되고 매수되어 순신의 행동을 견제할 염려가 있는 것, 넷째로 본영에 돌아가 병기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고 그동안 싸움에 사상한 자를 장례 또는 치료하고 병사도 더 모집하여 다시 와서 건곤일척의 최후 일전을 결행하여 풍신수길이 죽은 뒤에 돌아갈 마음이 바쁜 적으로 하여금 한명의 군사, 한척의 전선일지라도 남기지 아니하고, 자기도, 품고 있던 평소의 염원을 수행하여 종묘가 능멸당한 분한을 풀자는 결심이었다.

이때에 명 육군제독 유정은 부유에서 또 순천으로 퇴각하였다. 그는 적장 소서행장에게서 많은 뇌물을 받고 싸울 의사가 전혀 없어진 것이었다. 그 뇌물 중에는 일본 미녀 1인까지도 있다고 하였다. 소서행장은 유정의 군사는 재물로써 물러가게 하였으나 본국으로 돌아갈 마음이 급하여 하루 지체하는 것이 일년과 같이 지루하였다.

일변으로 행장을 꾸리기에 바쁜 중에 유정의 군사가 또다시 쫓아 들어와서 공격을 한다. 그 이유는 유정의 접반사인 좌의정 이덕형이 유정의 감군監軍이 되는 명나라 참정參政 왕사기王士琦를 구례에 있는 것을 찾아보고 유정의 행동을 말하였더니 왕사기가 유정을 논책하되 무고하게 퇴각하였다 하여 엄형하려 하므로 유정은 부득이 진공하게 된 것이었다.

소서행장은 유정의 진으로 사자를 보내어 뇌물을 많이 쓰고 청하되 지금부터는 싸우지 않고 우리는 돌아갈 터이니 길을 빌려 달라고 애걸하다시피 말하였다. 유정은 또다시 많은 재보를 받고 매우 기뻐하여 대번에 허락하고 유정은 수군제독 진린에게 소서행장의 군사가 돌아갈 길을 빌려 달라고 통지를 하였다. 이런 때에 접반사 좌의정 이덕형의 비밀서간이 순신에게 왔다.

그 글에는 “적장 소서행장이 형세가 갈수록 곤란하거늘 유정이 간첩을 보내어 도망갈 길을 몰래 알려 주었다 하오. 그 상황을 알게 되어 통고하니 영공은 주요 항구에 복병을 두어 엄습 대파하게 하시오. 또 영공의 막하 제장 중에 누가 대장감이오? 마땅히 나라를 위해 추천하기로 작정하고 있소” 하였다.

순신은 그 답서에 잘 알겠다고 하고 대장이 될 만한 자격을 품은 장수는 이순신李純信과 유형이 제일 낫다고 하였다.

유정이 조선에 나와 싸움은 한 번도 옳게 아니하고 돈만 많이 챙겨 큰 재물을 가지고 난리가 끝난 뒤에 길림吉林의 건주호建州胡를 치라는 명 황제의 조칙을 받고 요동으로 들어갔다.

건주의 추장인 청태조淸太祖 노이합적奴爾哈赤이 유정에게 재물이 많이 있단 말을 듣고 사자를 보내어 뇌물을 주고 아무 날에 항복하겠다고 애걸하였다. 뇌물로 치부한 유정은 좋아서 허락하고 준비를 소홀히 하였더니 그날 밤에 습격하여 유정을 베고 재물을 모두 가져가 버렸다. 이것을 보라. 뇌물을 탐하면 뇌물에 죽는 결과를 짓는 것이었다.

무술1598년 11월 9일에 순신은 진린과 함께 전함대를 몰고 고금도 본영을 떠나 좌수영에 와서 인연이 깊은 여수 강산을 바라보며 비창한 마음을 머금어 하루 이틀을 머무르다가 11일에 배를 띄워 유자도柚子島에 다다라 진을 쳤다. 이번 보름의 조수를 타서 왜교의 적선에 총공격을 하려 함이었다.

진린도 그동안에 순신의 충의와 절개에 감화를 받아서 단단히 결심하여 힘을 대해 공격하기를 다짐하였다.
13일에 적선 10척이 장도 밖으로 나오는 것을 순신이 진린의 함대와 협력하여 격파하고 진지를 장도로 옮겼다. 유정으로부터 소서의 귀로를 빌려주라는 통지 패문이 진린에게 왔다. 진린의 회답에는 수군과 육군이 책임과 권한이 각기 다르니 우리 수군은 행동을 따로 할 터이니 육군에서는 간섭하지 말라는 뜻으로 답하였다. 소서행장은 이미 유정의 승낙을 받은지라 먼저 10척의 병선을 내어 묘도 앞바다를 지나는데 순신과 진린의 수군이 내달아 깨뜨려 분멸하여 버렸다.

소서행장은 분이 나서 명나라 포로 40명을 결박하여 앉히고 포로 두 명의 팔뚝을 끊어 유정에게 보내며 “너희 명나라 장수들이 우리를 속여 오기를 몇 해나 하였느냐? 이번에도 또 속이니 내가 가지 않고 기어코 사생결단을 하더라도 싸움을 속행하겠다” 하고 을러대었다.

적의 음식을 뿌리친 이순신

유정은 변명하기 위하여 회답하여 “우리 육군이 한 일이 아니라 수군이 한 행동이니 수군제독 진린에게 다시 길을 빌리게 하라” 하였다. 소서행장은 일이 그럴 듯하여 다시 진린에게 은 100냥과 보도 50자루를 보내고 길을 빌려 달라고 하였다. 진린도 금은에 정신이 현혹하여 두말 않고 허락하였다.

행장은 다시 8척의 병선을 길을 여는 선발대로 내어 보냈더니 이순신의 함대가 내달아 토벌하여 버렸다. 소서행장은 또 진린에게 그 약속을 위반한 것을 책하는 질문을 하기로 사자를 진린의 진으로 보냈다.

▲ 적의 뇌물에 미혹된 진린은 행장의 병선 두척이 나가는 것을 허락했다.
순신은 밤 술시나 되어 탐망군의 보고에 “적의 소선 한 척에 적장이 타고 수행원 7인을 데리고 장도에 들어와 도독의 진중으로 들어갔소” 하였다. 순신은 다시 정찰을 보내어 알아본즉 적장 오도순현이 술과 안주를 가지고 와서 무슨 비밀 담화를 하고 돌아갔다고 하였다. 아마 행장의 질문에 조선수군이 한 일이라고 변명한 말인 듯하였다.

이튿날 15일에 순신은 진린을 찾았다. 진린은 소서행장과의 강화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아니하였다. 이날도 적의 사자가 세 차례나 진린의 진중에 출입하였다. 16일에는 진린은 부하 진문陳文이란 자를 행장에게 답례사로 보냈다. 진문은 행장을 보고 이번 책망은 명나라 수군에 있지 아니하고 이순신의 함대가 한 일이라고 변명하였다. 진문이 간 지 얼마 아니하여 오도수五島守라는 적장이 병선 3척을 타고 준마와 창검 등을 실어다가 진린에게 바쳤다. 이로부터 적선이 빈번히 왕래하고 왕래할 때마다 무슨 상자 같은 물건이 진린에게로 자꾸 온다. 물때는 또 사리가 되었으나 뇌물에 팔린 진린의 마음은 변하였다. 순신은 국가대사가 다 틀어지는 것을 깊이 한탄하기를 마지 아니하였다.

중국인의 돈 좋아하는 버릇과 재물을 탐내는 마음이란 천하 만국 중에 특별히 우월하다. 「맹자」에 “왕은 ‘어찌하면 내 나라를 이롭게 할까’ 하고, 대부는 ‘어찌하면 내 집을 이롭게 할까’ 하고, 서민은 ‘어찌하면 내 몸을 이롭게 할까’ 하고” 하는 구절이 나오듯이 상하가 이욕만 추구하는 것이 중국인의 대명사이다. 그래서 이욕을 초월한 사람은 성현이라 한다. 진린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이공이 진도독의 견제와 저지가 없었으면 왜교의 대승첩이 있었을 것이며 사천과 한산도의 회복이 있었을 것이다. 아, 영웅의 말로사업末路事業이여. 단지 개탄을 더할 뿐이로구나.

16일 저녁에 진린이 순신을 자기 진중으로 청하였다. 진린은 진수성찬을 차리고 술을 부어 은근히 권하며 “이노야, 이것이 일본요리라오. 담백하고 푸짐하여 선미2)를 겸하였소. 나 혼자 먹을 수 있겠소. 한 잔 드셔보오” 하였다. 순신은 “소인은 적이 주는 음식을 먹을 수 없소” 하고 뿌리쳤다. 진린은 조금 무안하였으나 다시 청안3)을 띄우며 웃는 낯으로 “적장 행장이 여러 번 사자를 보내어 자기네는 속히 돌아갈 터이라고 화친을 청하니 저희가 돌아간다는 것을 구태여 싸울 것은 무엇 있소? 나는 이노야의 의향을 들어서야 대답한다고 말했소만 화친을 허하는 것이 좋을 듯도 하오” 하였다.

이것은 거짓말은 아니었다. 진린은 진정으로 순신을 경외하여 차마 순신 모르게 화친을 허락하지는 아니하였던 것이었다. 순신은 말을 아니 하고 지필을 당겨 글을 써보였다. “대장불가언화大將不可言和 수적불가종견讐敵不可縱譴”이라는 12자의 엄정한 글을 써서 진린의 앞에 돌려놓았다. 대장은 화친을 말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다, 또 원수를 그저 놓아 보낼 수 없다는 뜻이었다. 이 글을 본 진린은 참괴한 마음이 자연 솟아나서 안색이 변하며 아무 말도 못하였다. 순신은 그 자리를 떠나 “소인은 물러가오” 하고 나와 버렸다. 그날 밤에 행장의 사자가 왔는데 진린은 “나는 너희를 위하여 통제사 이공에게 말하다가 거절을 당하였으니 이제는 다시 말할 수 없다”고 회답을 하였다.

이글을 보고 그 당시의 일을 상상할 수 있다. 진도독은 이공을 자기마음대로 지휘명령을 하였다는 것보다도 도리어 그 의견을 존중히 하는 대우를 하였다. 그 경탄함을 이렇게 하였다.

진린의 회답을 본 소서행장은 일이 틀어지는 것을 깨닫고 한편으로 사천의 도진의홍과 남해의 송포진신의 무리에게 구원을 청하고 원병이 올 동안에 일종의 기미책4) 즉 창주양사5)의 계책이라는 수단을 사용하여 사자를 순신에게 보내어 조총 보도 및 방물6)을 바치고 한번 만나보고 의사를 교환하기를 간절히 애원하였다. 순신은 행장이 꾀가 많은 것을 잘 안다. 요시라를 시켜 권•김 양장을 우롱하던 것이 생각났다. 그 여러 가지 방물를 받지 아니하고 엄히 거절하여 “내가 임진 이래로 싸워서 얻은 전리품인 총검이 산과 같이 쌓였거든 너의 것을 받을 까닭이 있느냐? 또 만나기는 무엇 하려고 만난단 말이냐? 전장에서 만나면 나의 날랜 칼에 너희 대장의 수급밖에 쓸 것이 없다!” 하고 엄정하게 말하여 물리쳤다. 행장의 사자는 감히 말 한마디를 하지 못하고 물러갔다.

순신과 진린 사이를 이간하는 소서행장

소서행장은 순신이 이렇게 강직하고 엄정하여 어찌 할 도리가 없음을 알고 그다음의 계책으로 순신과 진린의 사이를 이간하려 하였다. 그래서 진린에게는 “조선군과 같이 진을 치고 있는 것이 상국의 위신에 관계되지 않소?” 하고, 또 순신에게는 “장군 같은 영무英武로 어찌 하여 일개 진린에게 그 절제를 받고 있소? 소장小將은 장군과 적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장군을 흠모하는 충정으로 이 말을 하는 것이오” 하여 각각 사자를 보내어 반간계를 시험하였다. 사자로 나선 사람은 일등 유세객이었다.

▲ 행세가 갈수록 곤란해진 소서행장은 유정에게 뇌물을 써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터달라고 애걸했다.
순신은 소서행장의 계교가 지극히 교활하여 정녕 구원병을 기다리는 일종의 기미책인 줄을 깨닫고 경상우수사 이순신李純信에게 병선 20척을 주어 노량목에 복병하게 하여 사천 및 남해로부터 올 적의 원군을 방비하게 하였다. 그리고 순신은 행장의 사자에게 답하여 보내기를 “명나라 수군이 우리 땅에 온 이상에는 우리의 뜻에 맡겨 움직이는 것이 바른 도리이니 너희가 아랑곳할 바가 아니다” 하여 좋게 말하여 물리쳤다. 행장의 생각에 진린이 이순신과 같이 있는 한은 진린을 매수 또는 농락하기가 어려움을 깨달아 백방으로 계교를 썼으나 효과를 보지 못하였다.

저술자는 애독 제씨에게 행장의 위인과 청정의 성격을 소개하고자 한다. 행장은 일본의 계堺(사카이)라는 지방에 호상豪商의 아들로 교활한 상인의 성질을 닮아 옛날 한나라의 장수 진탕陳湯이나 오나라의 장수 여몽呂蒙같은 사람이어서 청정과는 아주 딴판이다. 청정은 소박한 농가의 아들로 정직한 태도가 옛날 위상魏尙이나 조운趙雲과 같은 무장이었다. 청정은 불교 법화종法華宗의 감화를 받아 군자적인 무사도의 정화라 하며 행장은 그때 야소교의 감화를 받아 세계적 지식을 가진 까닭에 그 성질이 평화를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행장이 섭진수攝津守로 있을 때에 천초天草(아마쿠사)의 야소교도의 반란을 행장과 청정이 같이 평정한 뒤에 그 지방 사람들이 행장을 가리켜 소인배 같은 교활한 인간이라고 평하고 청정은 무사도의 정화라 하였다.

이날 밤에 순신은 진린을 찾아보고 오늘이 가장 조수가 깊으니 총공격을 행하자고 청하였다. 그러나 적의 뇌물에 취한 진린은 순신의 말대로 움직이지를 아니하였다. 그러고 도리어 진린은 말하되 “나는 아직 행장은 그냥 두고 남해에 있는 적에게 항복한 반민을 먼저 칠까 하오” 하고 딴소리를 한다. 순신은 진린의 말이 무슨 뜻인지를 깨달았다. 그것은 남해를 칩네 하며 명나라 함대를 물려서 행장이 달아날 길을 열어 주자는 것이었다. 순신의 계획한 왜교 총공격은 진린의 배신적 행동으로 하여서 다 차질이 생기고 말았다. 전에 한성 청파역에서 유성룡이 예언한 바와 부합이 되고 만 것이었다.

이로부터 순신은 좋은 물때에 적을 치지 못하고 도리어 앞뒤로 적을 맞이하게 된 판이었다. 순신은 진린에게 항언하기를 “남해에 있는 사람은 다 적에게 포로로 된 조선의 백성들이지, 어디 적이 있소?” 하였다. 진린은 답하여 “이미 적에게 붙었던 놈들이면 적이나 마찬가지요. 지금 가서 치면 힘 아니 들고 수급을 많이 벨 터인데 아니 칠 것이겠소?” 하고 오만한 태도를 보였다. 순신은 어이없어 정색하고 “천자께서 노야를 명하사 적을 치라 하심은 조선의 생민을 도탄지중에서 구하려 하심이거늘, 이제 적은 치지 아니하고 도리어 난중에 살려고 헤매는 불쌍한 조선의 인명을 살해한다 하면 아마 천자의 본의는 아닐 것이오. 또 나는 포로 1인을 살려서 빼앗아 오는 것을 적의 수급 하나를 베어오는 것보다도 귀중하다고 생각하오. 또한 그것이 우리 진중의 군율이오. 그러니 어찌 그런 잔학한 일을 자행하겠소?” 하였다.

진린은 순신의 이 꾸짖는 말에 대노하여 “황제폐하가 내게 상방검7)을 주셨소!” 하고 장검을 만졌다. 순신 역시 대노하여 대도를 잡으며 소리를 가다듬어 “나라를 위해 한번 죽음은 아깝지 아니하지만 나는 대장으로서 결코 적을 그냥 두고 우리 창생을 죽이지는 아니하겠소!” 하고 더 한 번 꾸짖었다. 진린은 분노한 중에도 순신이 정대하고 강직한 것을 잘 안다 그렇다고 순신 같은 위인을 일시적 감정으로 그 전후의 은의를 배반할 수는 없다. 순신도 진린의 탐욕스런 허물을 개선하기를 아무쪼록 바라므로 진린의 마음을 돌리려 하였다. 그는 국사를 위해서는 개인적 감정을 돌아보지 않는 것이었다. 오랫동안이나 두 영웅이 다툰 끝에 진린은 순신의 말을 복종하여 남해로 가기를 단념하였다.

그러나 적의 뇌물에 미혹이 된 진린은 행장의 병선 두 척을 장도 해문 밖으로 내어 보내고 치지 아니하였다. 즉 길을 열어 주었다. 순신은 이 소식을 듣고 곧 진린을 방문해 “어찌해서 적선 두 척을 나가기를 허락하였소?” 하고 질문하였다. 진린의 대답은 “저희 나라로 퇴군한다는 통지를 하러 보내는 것이라기에 허락하였소” 한다. 순신은 발을 구르며 “큰일 났소! 정녕코 사천과 남해로 청원하려 간 것이 분명하니 우리는 이제 여기서 앞뒤로 적을 맞이하게 되었소. 반드시 사천 기타 각처에 있는 적선이 행장의 위급한 청원을 받고 노량목으로 넘어올 터이니 곧 가서 맞아 싸우지 아니하면 우리는 앞뒤로 협공을 당할 것이오!” 하였다. 진린은 순신의 이 말에 깜작 놀라서 얼굴빛이 변하였다.

적의 뇌물에 미혹된 진린

“그럴까? 그렇다고 하면 곧 이노야의 말대로 노량으로 가지요” 하고 17일 밤에 순신은 병선 20척을 떼어 두어 왜교의 적진을 치게 하고 전함대를 끌고 노량으로 향하는데 진린의 함대도 같이 나왔다. 그러하여 순신의 후군은 왜교의 적진을 맹공격을 하다가 나와서 합세하였다. 이때에 사천의 도진의홍은 명나라 중로 제독 동일원의 군사를 대파하고 첩서를 명호옥의 대본영에 보고하였더니 뜻밖에 태합 풍신수길이 죽고 새 관백 풍신수뢰의 명령으로 군사를 거두어 들어오라 하였다. 이 철병 명령을 받은 도진의홍은 행장을 꾸려 가지고 일본으로 들어가려던 차에 소서행장 종의지 모리민부 오도순현 등의 청원이 왔다. 가는 길에 구원하여 데리고 동행할 셈으로 사천에서는 아예 전군을 거두어 가지고 밤 조수를 타서 순천으로 가다가 노량에서 이순신의 복병장 이순신李純信의 병선과 한바탕 맹렬히 싸우고 간신히 빠져서 왜교로 들어가게 되었다.

명 제독 진린은 바로 노량목을 막아 진을 치고 순신의 함대는 남해 관음포 어구에 있는 섬 그늘에 숨어서 진을 쳤다. 당초에 순신은 자기가 노량목을 막고 지키다가 넘어오는 적군을 일거에 무찌르려 하였으나 진린은 공을 탐하는 마음에 순천에서 나오는 행장의 군사보다는 뇌물도 받지 않은 넘어오는 적을 친다는 뜻으로 그를 자기가 맡겠다고 한 것이었다. 순신의 생각에는 만일에 도진의홍의 함대가 노량을 넘어선다 하면 왜교에 있는 소서행장은 그동안 싸움에 부서진 병선의 부족을 보충하여 가지고 의홍과 합세하여 형세가 다시 커질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순신은 이것을 우려하였다. 진린의 생각에는 순신으로 왜교에서 나오는 행장의 함대를 막게 하고 자기는 노량의 지형을 의지하여 남해 저쪽에서 넘어오는 적을 격파하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진린은 도진의홍의 사천 함대를 섣불리 싸워서 왜교로 빠져가게 하였다. 도진의홍은 밤중에 순천에 들어가 왜교의 소서행장 종의지 모리민부 등을 구원하여 군사를 각선에 갈라 실을 때에 순신과 진린의 후군이 들어와 엄습하였다. 소서행장과 도진의홍의 두 진을 합한 군사가 습격을 해오는 순신의 후영장 안위의 군사를 겨우 격퇴하고 새벽녘이 되어서야 남해 관음포 앞바다에 이르렀다.
정리 | 이남석 더 스쿠프 대표 cvo@thescoop.co.kr 자료제공 | 교육지대(대표 장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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