深層인터뷰 | 이상윤 스쿨푸드 대표와의 6교시

▲ 이상윤 대표는 맨발로 뛰면서 지금의 스쿨푸드를 만들었다. 강남 청담동 스쿨푸드 사옥에서 직원들과 포즈를 취한 이상윤 대표. (사진=지정훈 기자)
중학교 중퇴에 전과자, 대마초를 피운 딴따라, 음식에 ‘음’자도 모를 것 같은 외식업체 창업주. 이 사람, 참 씹기 좋은 스펙을 갖고 있다. 실제로 창업 초기에 많이 씹혔고, 괜한 오해도 샀다.

하지만 그는 세상의 편견 앞에 무릎을 꿇지 않았다. ‘열정’ 하나로 버텼고, ‘맨발’ 하나로 자신이 창업한 ‘스쿨푸드’를 연매출 800억원대 외식업체로 키웠다. 이상윤(45) 대표, 그의 숨은 인생스토리다.

# 작은 아이, 엄마를 잃다

11살, 작은 아이. 그 작은 등을 누군가 두드렸다. 따뜻한 엄마의 손길이었다. 그리곤 쓸쓸한 한마디. “조금만 기다리거라. 금방 데리러 올게. 밥 잘 먹고 있어.” 아이는 환한 미소로 답했지만 엄마의 모습을 본 건 그날이 마지막이었다. ‘계契’를 잘못 운영해 가계 재산을 몽땅 날려버린 엄마는 아버지의 미움을 샀고, 이혼을 당했다.

제법 큰 여행사에 다니던 아버지는 빚 독촉에 시달리다가 사우디아라비아로 도주 아닌 도주를 했다. 5살 터울의 형은 돈을 벌기 위해 일찌감치 가족을 떠나 사회로 나갔다. 작은 아이, 졸지에 기댈 언덕을 모두 잃었다. 눈칫밥을 먹으며 끼니를 때우는 일이 잦아졌다. 작은 아이의 인생은 그렇게 좌표를 잃고 있었다. 다른 아이를 괴롭혔고, 돈을 뜯었다. 배고픔과 외로움 앞에 ‘양심’과 ‘도덕’은 사치에 불과했다.

# 소년, 교도소를 넘나들다

1982년, 작은 아이는 중학교 2학년 ‘소년’이 됐다. 그가 빠진 ‘방황의 늪’은 더 깊어졌다. 어린 나이에 교도소 담벼락을 두 번이나 넘었다. 학교에선 문제아로 낙인 찍혀 사실상 퇴학을 당했다. 1983년, ○○교도소에서 출소하던 날. 소년은 새벽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와 형이 있는 이태원으로 갔다. ‘방황의 늪’에서 더 이상 허우적거릴 수만은 없었다. 나이트클럽에서 일하던 형의 추천으로 소년은 이태원의 작은 카페에 들어갔다.

청소ㆍ설거지 등 허드렛일이 주된 임무였지만 소년은 최선을 다했다. 노력과 땀은 칭찬을 불렀다. 소년은 난생처음 ‘잘 한다’는 말을 들었다. 신바람이 났다. 특히 라면만은 끝내주게 끓인다는 소리를 들었다. 누군가에게 자신이 만든 먹을거리를 주는 것, 소년의 취미가 됐다. 소년은 그렇게 건강한 청년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 악성루머를 먼저 듣다

‘이상윤’. 이 사람의 이름을 처음 들은 건 2010년 가을께다. 어느 모임에서 누군가 ‘스쿨푸드(SCHOOL FOOD)’라는 카페형 분식전문점 얘기를 꺼냈고, 그 분식점 창업자 ‘이상윤’의 남다른 과거가 도마에 올랐다. 말은 누가 퍼뜨리느냐에 따라 달라지듯 사실관계는 확인된 게 없었다.

“… 그 사람 말이지. 중학교도 졸업하지 못했다던데. 딴따라였는데, 대마초를 피웠다고 하더군. 스쿨푸드의 히트제품인 작은 김밥 ‘마리’는 유흥가 아가씨들에게 팔던 거고. 별(전과)도 있다던데….” 이 사람, 참 씹기 좋은 스펙을 갖고 있다. 중학교 중퇴에 전과자, 대마초를 피운 딴따라, 음식에 ‘음’자도 모를 것 같은 외식업체 창업주. 이를 무기 삼아 일부 나쁜 언론이 스쿨푸드의 문을 두드렸다. ‘주홍글씨’, 이 무서운 녀석이 스쿨푸드를 괴롭히고 있는 듯했다.

이럴 때 CEO의 반응은 두가지로 나뉜다. 더 깊숙한 곳으로 숨어 들어가 과거를 세탁하거나 옛일을 쿨하게 인정하거나다.

그는 후자 쪽이었다. The Scoop 취재진과 만난 자리에서 그는 과거를 애써 포장하지도, 감추지도 않았다. “자라온 환경이 썩 좋지 않은데 아무런 탈 없이 성공한 사람들을 보면 대단해 보입니다. 전 환경에 지배를 당했어요. 그렇다고 창업자로서, CEO로서 결격사유가 있다고 보진 않아요. 벌을 달게 받았으니까요. 지금까지 열심히 살았고, 지금도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조금 억울한 면도 있어요. 유흥가 사람들에겐 김밥을 팔면 안 되나요? 그 사람들은 먹을 권리가 없나요?”

그래, 억울할 법도 하다. 이상윤 스쿨푸드 대표처럼 역경을 보란 듯이 이겨낸 이는 드물다. 한해 수백억원의 매출을 올리고, 직원만 200명이 훌쩍 넘는 스쿨푸드의 모태는 일개 ‘배달전문점’이었고, 이상윤 대표는 ‘배달의 기수’였다.

그런 그를 강남 청담동에 있는 스쿨푸드 본사에서 만났다. 콘셉트는 ‘맨발의 전사’로 잡았다. 오랜만에 상남자를 만나겠거니 싶었다. 그런데 그는 예상과 달랐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정제된 말을 구사했다. 기자 앞에 서 있는 그는 엄마를 잃은 작은 아이, 동네에서 돈을 뜯던 소년, 음식 하나로 칭찬을 받던 청년이 아니었다. CEO ‘이상윤’이었다.

♬ 1교시=이태원 벤의 추억

- 대표를 두고 별 말이 다 돕니다.
“(웃으며) 들어봤습니다.”

- 누군가는 CEO의 결정적 흠이라더군요.
“글쎄요. 스쿨푸드를 창업한 다음에 나쁜 짓을 했다면 모를까, 조금 과한 지적 아닌가요. 전 환경에 지배를 당했을 뿐입니다.”

- 어떤 환경이었기에….
“초등학교 3학년 이후로 편안했던 기억이 없어요. 어머니가 계를 잘못 운영한 게 화근이었죠. 장교 출신인 아버지는 어머니의 잘못을 납득하지 못했어요. 그렇게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혼했고, 저는 혼자 남았죠.”

- 형이 있지 않았나요? [※ 이 대표의 형은 스쿨푸드 공동창업자인 이상현 회장이다.]
“네, 저보다 5살 많아요.”

- 형이 도움을 줄 수도 있었을 텐데요.
“그때는 가족이 모두 뿔뿔이 흩어졌어요. 드라마에서나 보던 빨간 딱지가 우리 집 구석구석에 붙었죠. 형도 돈을 벌기 위해 사회생활을 일찍 시작했어요.”

- 방황을 시작했겠네요.
“그렇죠. 배고프니까 무언가를 훔치고 빼앗았어요. 환경에 지배당하기 시작한 거죠.”

- 그러다 교도소에 수감된 건가요.
“한번은 합의금 30만원을 마련하지 못해서 들어갔어요. 다른 한번은 아이들 신발 빼앗았다가 걸렸죠. 처음엔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어요.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그곳 생활은 정말 지옥 같았어요. ‘다시는 들어오지 말아야지’라며 입술을 깨문 게 한두 번이 아니에요.”

- 출감해도 삶이 막막했을 것 같은 데요.
“○○교도소를 출감한 시간이 새벽 5시인가 그래요. 무궁화호를 탔는데, 제 자신이 그렇게 한심할 수 없었어요. ‘다른 애들은 공부하러 가는데, 나는 뭔가’라는 자괴감이 들었죠. 무작정 형을 찾아가 ‘도와 달라’고 했죠. 그랬더니 형이 이태원에 있는 작은 카페에 데려갔어요.”

- 어떤 카페였나요.
“주방까지 포함해 99㎡(약 30평) 정도 되는 카페였어요. 음악이 나왔고 해장국, 포크커틀릿(일명 돈가스), 라면 등을 팔았어요.”

- 뭘 했나요.
“허드렛일이죠. 설거지하고 청소하고, 주방장이 없을 땐 해장국을 끓였어요. 밤에 직원들이 배고프다고 하면 라면을 끓여주기도 했죠. ‘요리솜씨가 제법이다’ ‘라면 기막히게 끓이네’라는 소리를 종종 들었어요. 아마, 귀빠지고 처음 듣는 칭찬이었을 겁니다.”

운명運命. 사전적 정의는 ‘모든 걸 지배하는 초인간적인 힘, 그것에 의해 정해진 목숨이나 처지’다. 운명은 정의만큼이나 구속력이 강하다. 정치사상가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운명의 힘을 절대 무시해선 안 된다”고 했다. 이 대표 역시 “운명의 수레바퀴에 끌려 지금까지 온 것 같다”고 말했다. “이태원 카페에 찾아갔을 때 저는 만신창이나 다름없었어요. 그런데 그곳에 가지 않았다면 지금의 저도, 스쿨푸드도 없을 겁니다.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 희망을 발견한 셈이죠. 운명, 참 기막혀요.”

그 작은 카페 이름은 ‘벤(BEN)’이다. 1980년대 사람들은 이곳에서 음악을 듣고 대화를 나눴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카페 ‘벤’은 이 대표에게 중요한 영감을 불어넣었다. 2002년 배달전문점을 창업한 그는 2005년 첫 길거리 매장을 론칭했는데, 콘셉트는 음악과 뮤직비디오가 흐르는 ‘카페형 분식점’이었다. 절망의 복판에서 만난 ‘벤’을 스쿨푸드의 모델로 삼았다는 얘기다.

♬ 2교시=춤꾼, 뮤지선, 그리고 실패 

- ‘벤’에선 춤도 췄나요.
“아니에요, 벤은 그냥 카페였어요. 벤에 다니면서 ‘춤’을 접한 건 사실이에요. 벤에서 일할 때 만난 사람 중에 유명한 DJ가 있었어요. 그분처럼 되고 싶어 DJ보조로 들어갔죠.”

- 그러면서 춤도 추게 된 거군요.
“네, 저한텐 신천지나 다름없었어요.”

- 춤꾼을 많이 알겠네요.
“박남정, 현진영, 이주노 등이죠.”

- 여담이지만 누가 춤을 제일 잘 췄나요.
“단연 주노형(이주노)이죠. 춤꾼이 인정하는 춤꾼이었어요.”

- 본인 실력은 어땠나요.
“손가락에 꼽힐 만큼은 아니었어요. 하지만 누구보다 춤 연습을 열심히 한다는 소리는 들었죠. 말하자면 노력파? 그랬어요.”

- 먹고살 만했나요.
“천만에요. 당시 유니온이라는 브레이크댄스팀(지금의 비보이)에 속해 있었는데, 일급이 5000원이었어요. 재주는 춤꾼이 부리고 돈은 건달이 가로채는 구조였죠.”

어떤 사람은 ‘연예인이라는 헛꿈을 꾼 대가’라고 꼬집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인생에서 가장 ‘귀한 시간’이었다고 털어놨다. 그는 진짜 ‘춤꾼’을 꿈꿨다. 뒤꿈치가 까질 때까지 춤연습을 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노력을 인정받아 유인촌ㆍ김완선ㆍ박상원 등이 출연한 공중파 단막극(국물 있사옵니다ㆍ1986)에 조연배우로 발탁된 적도 있다. 좀도둑 역이었다. 1990년대 중반엔 월 300만원을 버는 춤꾼이 됐고, 음반까지 냈다. ‘컴포지션4(C4)’라는 혼성 4인조 그룹이었는데, 1세대 아이돌그룹 ‘젝스키스’와 함께 데뷔했다. 자신감이 넘쳤고, 멋에 취했다. 그러다 ‘큰 일’을 저지르는 우를 범했다. 

- 대마초를 피운 게 그 즈음인가요.
“데뷔를 한 다음에 그랬어요. 음악을 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다고 폈어요. 집행유예를 받았고, 반성도 많이 했어요.”

- 유혹은 없나요.
“잠깐 그랬을 뿐이에요. 담배를 끊은 지 10년이 훨씬 넘어요. 술은 즐기지 않고요.”

그는 춤꾼으로, 뮤지션으로 성공하지 못했다. 데뷔 무대에 함께 섰던 잭스키스는 10대의 우상이 됐지만 C4는 ‘무명의 탈’을 끝내 벗지 못했다. 그러나 이 대표는 꿈을 내려놓지 않았다. 음반기획자로서, 안무가로서 활동을 계속했다.

그 바닥에서 이 대표의 열정은 유명했다. 1997년 결핵에 걸렸을 때도 음반작업을 할 정도로 ‘독종’이었다. 하지만 야속한 세상은 기회를 주지 않았다. 떠나야 할 때가 왔음을 ‘몸’으로 직감한 그는 백기를 들었다. 목표를 잃은 배는 어디로 가든 역풍을 맞게 마련이다. 평생의 꿈을 잃은 이 대표는 어땠을까. 

- 벼랑에 몰렸다는 생각이 들진 않았나요.
“담담했어요. 먹고살 걱정뿐이었죠.” 

- 그래도 좋아하는 일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그만둔 상황이었잖아요.
“흔히 이런 말을 하잖아요.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요. 저는 이 말에 동의하지 않아요.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은 따로 있다고 봐요. 저는 하고 싶은 일을 그만뒀을 뿐이었어요. ‘해야 할 일’을 할 차례였죠.”

- 어떤 일을 했나요.
“다단계 화장품 판매원, 파티 매니저, 나이트클럽 영업부장 등이요.”

- 그러다 김밥을 팔게 된 건가요.
“서울 관악구 봉천동에서 파티 매니저로 일할 때였어요. 점심을 늘 김밥으로 때웠는데, 맛이 기가 막힌 거예요. 만든 사람을 찾아가 봤더니 보따리 할머니더라고요.”

- 어떤 김밥이었나요.
“단순했어요. 계란말이 김밥에 장아찌가 밑반찬으로 들어 있었어요. 궁합이 최고였죠. 이 궁합을 조금만 바꾸면 ‘먹고 살 수 있는 아이템’이 되겠다 싶었어요. 요리만은 자신이 있던 터라 ‘한번 해보자’고 형에게 말했죠.”

- 그랬더니?
“형도 별 대안이 없었어요. 형이 운영하던 나이트클럽에서 큰 사고가 터져서 직장을 잃은 상태였거든요.”

- 곧바로 김밥을 팔기 시작했나요.
“네, 무슨 일이든 빨리 해야 돈을 벌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무언가 따지는 순간 도전은 물거품으로 끝나요.”

- 종잣돈이 필요했을 것 같은데요.
“서울 남대문에서 카드깡으로 1200만원을 만들었어요. 종잣돈이었죠.”

♬ 3교시=춤꾼, 경영에 손 대다

‘181-11 B02.’ 그는 암호 같은 숫자를 되뇌었다. 스쿨푸드가 탄생한 49.5㎡(15평) 규모의 반지하방 주소였다. 형제는 이곳에서 인생을 담보로 승부를 걸었다. 콘셉트는 작은 김밥, 이름하여 ‘마리’. 브랜드는 ‘노다지 김밥(이하 노다지)’이라 정했다. 기존 김밥의 3분의 1 크기에 분홍 소시지ㆍ시금치ㆍ단무지를 속재료로 넣었고, 겉은 계란으로 둘렀다. 반찬은 봉천동 할머니의 김밥을 벤치마킹해 ‘장아찌’를 넣었다. 2002년 여름 어느 날, 오후 4시. 이 대표는 접이식 포장지에 넣은 ‘마리(1인분에 3줄ㆍ4000원)’ 100개를 들고 논현동 골목으로 향했다. 

- 왜 논현동을 거점으로 삼은 건가요.
“당시 논현동 골목에는 미용실이 많았어요. 밤업소 아가씨들 때문이었죠. 이들을 공략하면 금세 입소문이 날 것으로 판단했어요.”

- 새벽이 아닌 오후 4시에 장사를 시작한 것도 그 때문인가요.
“그렇죠. 형은 나이트클럽, 저는 미용실을 맡았죠.”

- 반응은 괜찮았나요.
“처음엔 쌀 한가마니 양쯤은 홍보용으로 나눠줄 생각이었어요. 반응을 따질 여력도, 생각도 없었죠.”

- 그래도 반응이 온 시점이 있었을 텐데요.
“10여 일쯤 흐른 뒤였어요. 갑자기 주문전화가 밀려오기 시작하더라고요. 마리 1000개쯤을 돌린 것 같은데, 전화량은 그 두 배는 됐어요. ‘됐다’ 싶었죠.”

- 성공요인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밤에 일하는 사람들의 특성을 잘 알고 있었다는 것, 그게 첫째 요인이에요. 주로 밤에 일하는 이들은 야식을 혼자 먹지 않아요. 두런두런 앉아서 함께 먹죠. 한 배달전문점의 음식맛이 좋으면 전화번호를 공유하는 경우도 많아요. 우리의 작은 김밥이 빠르게 소문난 이유죠.”

창업에 성공하려면 경쟁자를 압도할 만한 무기가 있어야 한다. 이 대표의 무기는 작은 김밥 ‘마리’였다. 마리는 ‘허기를 채우는 데 최적화된 커다란’ 김밥의 본질을 단숨에 무너뜨렸다. ‘한입에 쏙 들어가야 한다’는 걸 제1원칙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적은 양의 재료를 ‘최적의 비율’로 섞어 만들었다. 스쿨푸드 대표 메뉴 ‘오징어먹물마리’의 재료가 ‘양념 오징어’ ‘먹물로 비빈 밥’ 두개뿐인 것처럼 말이다. 브랜드 전문잡지 「유니타스 브랜드」는 마리를 이렇게 분석했다. “평균두께 3.25㎝, 재료 본연의 맛을 위해 4가지 이상을 섞지 않는다.”

어디서 본 듯한 전략이다. 그렇다. 스티브 잡스의 ‘아이폰 전략’과 비슷하다. 잡스는 3×2 황금비율의 3.5인치 화면을 고집했다. 엄지손가락의 활동범위를 넘어선 플랫폼을 원치 않았다. 작은 화면에 충분한 양의 소프트웨어를 심기 위해 잡스는 ‘최적의 배치’를 고민했다. 탁월한 성능의 소프트웨어라도 크기가 맞지 않으면 아이폰에 채택될 수 없었다.

혁신, 알고 보면 별게 아니다. 아이폰과 마리처럼 새롭게 만들어 시장에 영향을 끼쳤다면 혁신이다. ‘IT기기는 혁신제품이고 음식은 그렇지 않다’는 발상은 편견이다. 혁신과 창조는 생각보다 가까운 데 있다. 어찌됐든 배달전문점 ‘노다지’는 대박이 났다.

개업한 지 1년 반 만에 전체 인원이 10명으로 늘어났다. 마리밖에 없던 메뉴는 국물떡볶이ㆍ꿀떡맛탕ㆍ학교냉면 등 8개가 됐다. 하루 매출이 300만원을 훌쩍 넘었으니, 주머니 사정도 좋아졌다. 이 대표는 이때 배달전문점의 이름을 노다지에서 ‘스쿨버스’로 바꿨는데, 이유가 재미나다. 

- 자료를 찾아보니까 2003년 배달전문점의 명칭이 노다지가 아니라 스쿨버스더군요.
“네, 맞아요. 스쿨버스(웃음).”

- 제법 자리를 잡아갈 때인데, 가게 이름을 바꿀 필요가 있었나요.
“배달전문점은 이름보단 맛과 신뢰가 중요해요. 이름을 바꿔도 단골들조차 잘 몰라요(웃음). 당시는 메뉴가 자꾸 늘어날 때예요. 그래서 메뉴를 카테고리별로 묶을 필요가 있었죠. 고민 끝에 1교시는 마리, 2교시는 꿀떡맛탕, 3교시는 학교냉면, 이런 식으로 분류했어요. 학교수업 같아서 가게이름을 스쿨버스로 바꿨죠.”

- 스쿨푸드가 ‘학교 앞 분식점’이라는 콘셉트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군요.
“하하, 정말 재밌는 일이 있었어요. 이름을 스쿨버스로 바꾸니까 자꾸 ‘버스회사 아니냐’며 전화가 오는 거예요. 어쩔 수 없이 스쿨푸드로 다시 변경한 거예요.”

▲ 1. 스쿨푸드 본사에서 직원들과 포장 패키지 관련 미팅을 하는 모습. 2. 2008년 스쿨푸드 일본1호점 진출 당시 모습. 왼쪽에서 두번째가 이상윤 대표, 세번째가 이상윤 대표의 친형 이상현 회장. 3. 주방에서 신메뉴를 개발 중인 이상윤 대표. 4. 이상윤 대표가 스쿨푸드 주방에서 아줌마 직원에게 마리를 맛있게 싸는 방법을 알려주는 모습. 5. 스쿨푸드의 새로운 지점 오픈을 준비하는 이상윤 대표. 6. 스쿨푸드 홍콩지점에 현지 고객들이 줄을 서있는 모습. 7. 스쿨푸드 자카르타점. 8. 스쿨푸드의 대표 메뉴 마리.

♬ 4교시=스쿨푸드를 길에 세우다

배달전문점으로 이름을 제법 알린 이 대표는 2005년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가두매장 오픈이었다. 그는 강남구 신사동 가로수길에 스쿨푸드 첫 매장을 내기로 했다. 보증금 5000만원에 월세 480만원짜리 매장을 얻었다. 지금이야 강남의 새로운 명소로 손꼽히는 가로수길이지만 그때만 해도 별 인기가 없었다. 더구나 스쿨푸드 매장은 사람이 1시간에 7~8명밖에 다니지 않는 외진 곳에 있었다.

그런데도 이 대표는 ‘베팅’을 서슴지 않았다. 카페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 인테리어 비용에만 2억원을 넘게 들였다. 음식은 플라스틱이 아닌 도기陶器에 담았다. 

- 첫 매장을 열었을 때 신선하다는 반응이 있었을 것 같은데요.
“(웃음을 띠며) 매장이 외딴섬 같았어요. 사람들이 알 턱이 없었죠.”

- 리스크가 컸네요.
“물론이죠. 하지만 리스크의 반댓말은 기회입니다. 리스크를 감당할 능력이 있으면 기회를 노릴 수 있죠. 우리에겐 그럴 만한 능력이 있었어요.”

- 그게 무엇인가요.
“스쿨푸드는 당시 배달전문점으로 꽤 많은 수익을 올리고 있었어요. 때문에 매장에서 손실이 발생해도 헤징(hedgingㆍ위험회피)할 수 있었죠. 1년만 버텨보자 싶었어요.”

- 첫 매장은 언제쯤 성과를 내기 시작했나요.
“론칭 후 1년쯤 지났을 때부터요. 카페형 분식전문점이라는 콘셉트가 세상에 조금씩 알려지면서 손님이 늘어났어요. 이때부터 가맹사업에 도전해도 되겠구나 싶었어요.”

♬ 5교시=가맹이 아닌 물류를 팔아라 

- 가두매장에 성공한 다음 많은 게 바뀌었을 것 같아요. 무엇보다 가맹사업 문의가 늘지 않았나요.
“그럼요. 하루에도 수십여통의 전화를 받을 정도였어요.”

- 그런데 생각보다 매장수가 많지 않은 듯해요. [※ 참고: 스쿨푸드의 매장수는 올 11월 현재 78개(해외매장 제외)다.]
“프랜차이즈 기업은 가맹사업으로 돈을 벌어선 안 됩니다. 물류를 수익원으로 삼지 않으면 본말이 전도되게 마련이죠.”

여기서 말하는 물류는 ‘원재료 공급과 유통’을 말한다. 스쿨푸드는 경기도 남양주에 물류•소스공장이 있다. 직접 개발한 소스와 중요한 원재료를 직영ㆍ가맹점에 보낸다. 물류를 외부기업에 맡기는 다른 프랜차이즈 기업과 차별화되는 부분이다. 이 대표는 “본사의 경영효율성이 떨어지더라도 물류를 외주로 돌리면 안 된다”며 “국내시장 특성상 가맹점이 필요하기 때문에 소스ㆍ원재료엔 우리 색이 짙게 묻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 스쿨푸드 매장의 영업이익률이 7~8%밖에 되지 않더라고요. 소스와 원재료에 신경을 많이 쓴다는 방증인가요.
“외식기업에 원재료와 소스는 기본입니다. 이익률을 높이기 위해 원재료 기준을 낮춰선 안됩니다.”

- 가맹점은 더 많은 이익을 바랄 텐데요.
“우리는 스쿨푸드의 철학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과만 가맹계약을 맺습니다. 영업이익을 늘리고 싶다면 많이 팔면 됩니다.”

- 그러기 위해선 맛과 서비스가 좋아야 합니다. 문제는 가맹점 관리가 어렵다는 점인데요.
“옳은 지적입니다. 그래서 가맹사업으로 돈을 벌어선 안 된다는 겁니다. 매장수는 적절해야 합니다. 너무 많으면 관리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가치가 떨어집니다.”

- 매장에도 ‘희소성의 원칙’이 적용돼야 한다는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스쿨푸드는 ‘프리미엄 분식전문점’입니다. 다른 분신전문점과는 콘셉트가 다르죠.”

- 스쿨푸드의 적정 매장수는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십니까.
“90~100개 선으로 봐요.”

스쿨푸드는 분식전문점이지만 매장수로 경쟁하지 않는다. ‘양’이 아닌 ‘질’로 승부를 보겠다는 게 이 대표의 전략이다. 흥미롭게도 이 전략은 전례 없는 경기침체를 극복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2008), 유로존 재정위기(2011)도 스쿨푸드의 성장을 막아서지 못했다.

경기침체가 생각보다 장기화되면서 많은 소비자가 지갑을 닫았지만 스쿨푸드는 성장일로를 달렸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진 2008년 8개에 불과했던 스쿨푸드 매장은 2013년 11월 현재 78개(해외매장 제외)로 9배 이상 늘어났다. 매출은 2008년 44억원에서 2012년 813억원으로 18.5배가 됐다. 

- 경기침체에도 성장하는 원동력이 뭔가요.
“가격 포지셔닝을 잘 한 것 같아요.”

- 스쿨푸드는 분식점치고는 비싸다는 평을 받지 않나요. [※ 스쿨푸드의 길거리표 떡볶이(기본)는 433g에 5000원이다. 스페셜마리(3줄ㆍ337g)는 7000원이다.]
“우리는 값이 아니라 퀄리티를 따집니다. 원가에 맞게 가격을 책정했을 뿐이죠. 스쿨푸드 음식에 ‘거품’은 없습니다. 그래서 흥미로운 반응이 나올 때가 있습니다.”

- 어떤 반응이죠?
“일부 소비자는 ‘6000원짜리 분식은 비싸지만 6000원짜리 요리는 비싸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게 경기침체 와중에 스쿨푸드가 성장할 수 있었던 첫째 원동력입니다. 스쿨푸드가 값비싼 레스토랑에서 외식을 하길 바라는 소비자까지 흡수했으니까요. 분식점치곤 가격이 비쌌지만 역설적으로 다른 쪽에서 가격경쟁력이 생긴 겁니다.”

흥미로운 말이다. 브랜드 전문잡지 「유니타스 브랜드」는 스쿨푸드의 가격경쟁력을 이렇게 비평했다. “프리미엄에 대한 소비자의 의식적ㆍ무의식적 요구는 가격 민감도를 낮추며 고급화 시장을 넓히는 데 기여한다. 2002년 론칭한 본죽은 그런 전략으로 성장했다. 스쿨푸드의 전략도 궤를 함께한다.”

♬ 6교시=변수까지 경영하라

- 스쿨푸드가 이 정도로 성장할 줄 알았나요.
“당연히 몰랐죠.”

- 부담스럽지 않나요.
“스쿨푸드, 햇수로 12년째예요. 회사가 성장한 만큼 스트레스는 늘었죠. ‘스쿨푸드를 더 성장시킬 수 있을까’라는 고민이 커져요.”

- 지속가능한 성장을 생각하는군요.
“중국 속담에 ‘변하지 않으려고 변한다’는 구절이 있더라고요. 저도 그래요. 무언가를 지속가능하게 만드는 것, 어려운 과제입니다.“

- 그런데 요즘 너무 벌이는 것 아닌가요.
“브랜드 론칭을 두고 하는 말인가요?”

스쿨푸드에 전념하던 이 대표는 2011년 이후 모퉁이(2011년 1월)ㆍ에이프릴마켓(2011년 3월)ㆍ리맨즈(2012년 7월) 등 브랜드를 론칭했다. 세 브랜드의 매장수는 모두 합쳐 8곳에 불과하지만 이 대표가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삼고 있는 건 분명하다.

- 스쿨푸드에 올인하는 게 옳지 않나요.
“기업의 정체성과 비전을 지키기 위해선 새로운 수익모델이 필요합니다. 대박을 터뜨릴 것 같다고 아무 메뉴나 스쿨푸드에 적용하면 안 됩니다. 그 순간 스쿨푸드의 정체성이 불분명해지죠. 그렇다고 수익만 늘리기 위해 새 브랜드를 론칭하는 건 아닙니다.”

- 그럼 무엇 때문인가요.
“스쿨푸드를 위해 열심히 일한 사람들에게 보상을 해주고 싶습니다. 가까운 미래에 스쿨푸드 직원들에게 매장을 선물할 겁니다. 다양한 브랜드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 해외진출의 성과는 어떤가요. [※ 참고: 스쿨푸드는 2009년 미국 LA점을 오픈하며 해외시장에 첫발을 내디뎠다.]
“홍콩ㆍ일본ㆍ인도네시아 등에 10여개의 매장을 냈어요. 초반 반응이 좋아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점에는 하루 300명의 현지인이 찾아요. 이를 발판으로 얼마 전 인도네시아 2호점을 열었어요. 올 8월에 오픈한 홍콩 지점의 한 달 매출은 2억원이 훌쩍 넘죠. 때론 60여명이 기다릴 때도 있어요. 내년 6월과 8월에 각각 2ㆍ3호점을 추가로 오픈할 예정이에요.”

- 중국진출도 준비 중인가요.
“시장조사를 하고 있어요. 첫 매장은 상하이上海가 될 것 같아요. 하와이에도 진출을 계획하고 있어요. 하와이에선 유독 스시가 인기가 있는데, 정면승부 한번 해볼 참이에요.”

- 스시를 넘어설 수 있을까요.
“그럼요, 이제 한국 음식이 세계시장을 이끌 겁니다.”

이 대표는 요즘 말로 ‘무척 잘나간다’. 스쿨푸드를 더 성장시키는 데 별다른 장애물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위기의 씨앗은 잘나갈 때 싹트는 법이다. CEO가 ‘이상징후’를 읽느냐, 그러지 못하느냐에 따라 기업의 운명이 달라진다. CEO가 기업 안팎에 도사린 변수까지 경영하고, 많은 이들과 소통해야 하는 이유다. 이 대표 역시 ‘위기의 씨앗’을 소통을 통해 제거하길 원한다. 그래서 그는 오늘도 ‘길’을 뛴다. ‘배달의 기수’ 이상윤의 숙명이다. 스쿨푸드의 수업은 아직 많이 남아 있다. [더스쿠프 copyright] 
이윤찬 기자 chan4877@thescoop.co.kr

☞ Issue in Issue | 스쿨푸드 CEO의 창업論 ①

창업비법보다 중요한 건 경험

스쿨푸드는 전문가들이 말하는 ‘속설’과는 다른 방식으로 창업을 했다. 무엇보다 유동인구가 많지 않은 논현동을 거점으로 택했다. 음식판매시간도 다소 애매한 오후 4시로 정했다. 어떤 전문가는 ‘강남역에서 새벽 직장인을 상대로 장사를 시작했다면 더 빨리 성공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과연 그랬을까. 이상윤 스쿨푸드 대표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형과 저는 새벽ㆍ오전의 삶을 잘 몰랐어요. 직장인의 삶은 더더욱 몰랐죠. 둘 모두 오랫동안 ‘밤’에만 활동했거든요. 경험이 없다는 소리는 소비자의 패턴을 제대로 읽지 못한다는 말이에요.” 겉만 번지르르한 창업비법보다 중요한 건 경험이라는 얘기다.

☞ Issue in Issue |  스쿨푸드 CEO의 창업論 ②

“벌려도 될 때 벌려라”

이상윤 스쿨푸드 대표는 ‘배달’이라는 주무기를 밑바탕에 깔고 ‘가두매장’ 론칭을 시도했다. 매장 론칭이라는 리스크를 ‘배달’로 헤징한 것이다. 경제전문가들은 “CEO에게 리스크를 조각하는 능력은 무척 중요하다”며 “이런 측면에서 이 대표의 선택은 옳았다”고 말했다.

새로운 사업에 도전하는 CEO를 보면 ‘리스크’를 분산하는데 역점을 둔다. 영민한 CEO는 신新사업에 실패하더라도 다른 사업이 지장을 받지 않을 때 도전을 결정한다. 대보그룹이라는 곳이 있다. 국내에서 가장 많은 고속도로 휴게소를 보유ㆍ운영하는 기업이다. 시공능력 55위의 대보건설, 한국 10대 명문 골프장 서원밸리GC도 보유하고 있다. M&A로 계열사를 늘렸음에도 1981년 창업 이래 지금까지 ‘무차입 경영’ 중이다. 남의 돈을 빌려 몸집을 키웠다가 ‘승자의 저주’에 빠진 다른 기업들과 완전히 다르다.

이런 경영전략은 최등규 대보그룹 회장의 철학과 맞닿아 있다. 최등규 회장은 2년 전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M&A는 양날의 검이다. 성공하면 득이 되지만 실패하면 손해를 가늠키 어렵다. 자기자본이 충분할 때에만 M&A에 도전해야 하는 까닭이다.” 이 대표의 가두매장 진출 전략과 맥락이 같다.
이윤찬 기자 chan4877@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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