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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이순신공세가113

시끄러운 총성 멎자 울산 울다

2016. 05. 13 by 이남석 발행인 겸 대표

울산성의 상황은 갈수록 나빠졌다. 식수는 끊겼고, 먹을거리는 떨어졌다. 더구나 명병이 에워싸고 있어, 돌진할 틈도 없었다. 일본군 참모총장인 흑전효고는 각처로 통지해 구원병을 불러 울산으로 보냈다. 소조천수추, 모리수원, 흑전장정, 협판안치, 과도직무, 가등가명 등의 무리가 언양, 밀양으로부터 길게 달려 울산으로 합류했다.

울산성을 지키던 가등청병위는 명병에게 이렇게 곤란을 당하고 있었다. 때마침 천야행장을 맞아들여 성 안의 병사를 지휘하게 하니 명나라 장수들은 천야행장을 가등청정으로 잘못 알고 더욱 맹렬하게 공격했다. 이 와중에 명군 역시 1000여명 죽었고, 그러자 명병 역시 내성 가까이까진 들이치지 못했다. 그때 이방춘, 해생의 군사는 도산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도산성은 깊은 산속의 험고한 암벽에 새로 쌓은 옹성이었다. 하지만 해생과 이방춘의 마병馬兵은 발을 붙일 데가 마땅치 않아서 결국은 실패하고 쫓겨 나왔다. 이것을 본 제독 마귀 및 모국기의 무리가 쳐들어가서 도산성을 함락하였다. 이렇게 도산성이 점령되고 울산성 안에는 군량이 떨어져 일본군의 형세가 말이 못 되었다. 명군이 울산성을 에워싼 지가 벌써 10여일.

성 안에 있는 천야행장, 가등청병위는 기장에 있는 가등청정에게 통지를 하려고 몇번이나 시도했다. 하지만 울산에서 기장까지의 거리가 이틀길이 되는 데다 성 밖에는 명병이 겹겹이 에워싸서 있어 통지를 보낼 방법이 거의 없었다. 천야행장은 기장에 보낼 장사를 물색하여 구하는데 부하장사 목촌뢰무木村賴毋가 자원하고 나서더니 창 한 자루와 말 한 마리로 교묘히 울산성을 빠져나갔다. 그 이후 밤낮 이틀 만에 기장에 도착하였다. 가등청정은 그제야 울산성의 위급한 소식을 듣고 곧 울산으로 가려 하였다. 하지만 가등청정의 부하들은 이렇게 간했다. “울산성을 10만이 넘는 명병이 에워싸고 있습니다. 우리의 군사로는 대적하지 못합니다. 차라리 울산성을 버리는 게 낫습니다.”

하지만 가등청정은 이런 주장을 물리치면서 이렇게 말했다. “울산성을 지키는 천야행장이 거의 죽게 되었다. 의리상 구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그의 부친인 천야장정淺野長政(아사노 나가마사)이 내게 부탁한 것이 있다. 자신의 아들 천야행장을 잘 봐달라는 거였다. 그런데 내가 그를 구하지 않는다면, 다른 날에 무슨 면목으로 천야장정을 대하겠는가.”

▲ 울산성 전투를 진두지휘한 양호는 명나라 황제에게 은 등을 하사받았다.[사진=더스쿠프 포토]
가등청정은 날랜 부하 장수 편강마우片岡馬祐, 가등미작加藤美作 2인에게 군사 1500명을 주어 서생포를 지키게 했다. 자신은 도한 삼본森本, 반전飯田, 산전山田, 길촌吉村 등 일기당천의 수하 장사 500명을 거느리고 울산으로 향하였다. 울산성 입구에 도착한 가등청정의 무리는 명나라 군사를 물리쳤다. 날이 샐 무렵에 상륙을 감행, 울산성으로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자 명나라 장병의 공격은 더욱 거세졌다. 대포소리는 강산을 흔들었다. 명군의 총대장 양호는 참모 정경강鄭景岡의 계획을 받아들여, 성안에서 먹는 식수의 상류를 파주목사 김응서를 시켜 끊어버렸다. 성 안에 먹을 물이 없게 되자 가등청정의 군사는 배고프고 목이 말라 종이를 씹어 삼키고 말똥을 짜서 마셨다.

그러던 어느날, 명군에게 포로로 잡혀 있던 일본군 한명이 성 밖에 나타나서 이렇게 외쳤다. “양호가 가등청정에게 강화를 하려 한다. 서로 만나기를 청하니 가등청정은 성 밖에 나와서 100보 거리를 사이에 두고 양호와 만나보라.” 위급한 상황에 처했던 가등청정은 성 밖으로 나가려 했다. 하지만 천야행장은 “양호의 간계일지 모르니 가벼이 나갈 일이 못 된다”면서 자신이 대신 나가보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번엔 천야행장의 부하들이 만류해 화의는 없던 일이 되었다.

상황은 갈수록 급박해졌다. 일본군 참모총장인 흑전효고는 각처로 통지해 구원병을 불러 울산으로 보냈다. 소조천수추, 모리수원, 흑전장정, 협판안치, 과도직무, 가등가명, 봉수하가정, 등당고호의 무리가 언양, 밀양으로부터 길게 달려 울산으로 합류했다. 이렇게 울산으로 모여든 군사가 합 5만명이요, 울산성 안에 들어 있는 군사는 6000명 정도였다. 실제로 조명연합군의 수에 비교한다면 가등청정의 군사는 7, 8분의 1에도 불과한 소수였다.

하지만 양호는 이덕형, 권율을 불러 “성은 험하고 적의 원병이 많아 앞뒤로 적을 맞아야 할 듯하니 포위를 풀고 후퇴하였다가 다시 도모하자”라면서 일보 후퇴를 택했다. 그 무렵, 울산에 들어온 일본 장수들은 명군과 크고 작은 싸움을 벌였다. 5000군의 무리를 거느린 과도직무는 명장 오유충, 모국기의 군사를 쳐서 물리쳤다. 소조천수추 이하 여러 장수들이 과도직무의 뒤를 이어 나가며 명병의 진을 쳐들어가고 가등청정의 군사가 성 안에서 나와 뒤를 받쳐줬다.

어찌 됐든 양원의 군사는 울산에서 물러나 한양으로 돌아왔다. 양호와 마귀의 무리는 명나라 조정에 승전하였다는 첩서를 올려서 대명황제는 양호 이하 제장에게 은 10만냥을 하사하였다.

일보 후퇴 선택한 명군

이번 울산 싸움에서 죽은 명나라 군사는 1400여인이요, 부상한 자는 3000인에 가까웠다. 일본 군사는 4000여인이 죽었고, 부상한 수는 3000~4000명이었다. 이때에 명나라 조정의 형부시랑 여곤呂坤이 조선에 관한 소를 올렸는데 그 글은 아래와 같다.

朝鮮近我肘腋 日本若取而有之 日本藉其衆爲兵 就其地資食 進則斷我山東 漕運之路 退則窺我遼東 防備之域 不及一年 北京坐受其困 此大憂也 前年朝鮮請兵 朝廷二三其說 許援延援 朝鮮勢窮力屈 不折入爲日本 其勢不止 宜早決大計 幷力東征

조선이 우리의 팔꿈치와 겨드랑이처럼 가까우니 일본이 만약 빼앗아 차지한다면 일본은 그 백성들을 뽑아 군사로 삼을 것이며 그 땅을 취하여 군량을 돕게 할 것입니다. 그러면 1년도 되지 않아 북경이 앉은 채로 곤경을 당할 것이니 이것은 나라의 큰 걱정입니다. 전년에 조선이 청병하나 조정에서 두세번 말하여 원조를 허락하고도 기일을 늦추었으니 조선은 형세가 궁하고 힘이 꺾이어 조선으로 들어가 일본을 막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마땅히 일찍 큰 계책을 결정하여 힘을 합쳐 동정하십시오. <다음호에 계속>
정리 | 이남석 더스쿠프 발행인 겸 대표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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