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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이순신공세가 114

서애의 분노 순신의 분투

2016. 05. 20 by 이남석 발행인 겸 대표

조선에 들어온 명나라 장졸의 폭행과 약탈은 갈수록 심해졌다. 이들은 군자금이라 하여 날마다 조선 조정에 재물을 내라고 졸랐다. 한번이라도 응하지 못하면 황제에게 아뢰겠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명나라 졸병들까지도 민가에 무상출입해 부녀를 겁간하고 재물을 빼앗았다.

 
명나라 조정의 형부시랑 여곤呂坤이 조선에 관한 소를 올렸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조선이 우리의 팔꿈치와 겨드랑이처럼 가까우니 일본이 만약 빼앗아 차지한다면 일본은 그 백성들을 뽑아 군사로 삼을 것이며 그 땅을 취하여 군량을 돕게 할 것입니다. 그러면 1년도 되지 않아 북경이 앉은 채로 곤경을 당할 것이니 이것은 나라의 큰 걱정입니다. 전년에 조선이 청병하나 조정에서 두세번 말하여 원조를 허락하고도 기일을 늦추었으니 조선은 형세가 궁하고 힘이 꺾이어 조선으로 들어가 일본을 막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마땅히 일찍 큰 계책을 결정하여 힘을 합쳐 동정하십시오.”

이 글을 본 대명 신종황제神宗皇帝는 병부상서 형개를 정동총독征東總督으로 삼아 조선에 보내어 삼군을 총독하게 했다. 태자사보太子師保 진린에겐 광동廣東 절강浙江의 수군을, 마귀에겐 선부宣府 대동大同 육군을, 유정에겐 묘병苗兵을, 동일원董一元에겐 한상漢上의 육군을 제독하게 했다. 이렇게 수륙 4제독을 조선에 보낸 것이다.

선조는 경기ㆍ황해ㆍ평안ㆍ함경 제도의 군사 1만여인을 새로 모집하여 명총독 형개, 경략 양호, 제독 마귀 등의 절제를 받게 하고 명병과 합력해 한강의 각 여울목을 지키게 하였다. 양호의 부하 참장 설호신, 유격 진인陳寅의 무리가 남대문 밖 동록東麓에 관성묘關聖廟를 창건하자 조선 조정은 은을 내어 비용을 조달했다.

5월 13일은 관성關聖의 탄일이어서 관성묘에서 제사를 봉행하는데 다들 이렇게 말했다. “오늘 풍우가 있으면 신이 이르심이라 하더니 과연 오후에 뇌우가 크게 떨쳤다.”

▲ 지위가 높은 조선 장관마저 명나라 최하 졸병에게 모욕을 당했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이때 조선 군사는 명나라 군사에 비해 차별적인 대우를 받았다. 지위가 높은 장관급 조선 병사도 명나라 최하 병졸에게 모욕을 당하는 일이 많았다. 오직 영의정 유성룡이 몸소 강변 수비처를 순회하면서 조선장졸을 위문하고 나라를 위하여 고통을 견디고 분을 참으라고 말할 뿐이었다.

약탈 일삼는 명나라 수군

하지만 조선 측이 무기력하게 대할수록 형개ㆍ양호ㆍ마귀 이하 명나라 장졸의 폭행과 약탈은 더욱 심해져서 그칠 바를 몰랐다. 이들은 군자금이라 하여 날마다 조선 조정에 재물을 내라고 졸랐다. 만약 한번이라도 응하지 못하면 이렇게 호령했다. “너희가 재물을 숨기고 군자금을 아니 대니 황제께 아뢰어 죄를 내리게 하겠다. 너희가 그러면 우리는 돌아갈 테니 그리 알라.” 명나라 졸병들까지도 민가에 무상출입해 부녀를 겁간하고 재물을 빼앗았다.

저항하면 때리고 차고 하여서 그들의 눈에는 조선 대신이니 대장이니 양반이니 하는 것도 전연 보이지 아니하였다. 영의정 유성룡은 참다가 못 참아서 이러한 상소를 올렸다.

臣觀支供天兵之事 其間耗失之弊 不可紀極 雖竭國內之力爲之 其勢亦將難支 近自南下以後 遼?宣大之兵 沿途作拏 敺打官民 日以益甚 守令 不能支當 遠避山谷 其汎濫侵突 何所禁止 朝朝暮暮 相繼不絶 牛馬一空 其爲生民之厄 不可忍言 然 他無可救之策 只宜令接伴使李德馨 從便稟呈于提督 出令于管下諸將 庶可少?於萬一 亦未知如何 徒爲憫歎耳

 “신은 지방에서 명나라 군사를 이바지하는 일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동안 소모되어 없어지고 (거듭 받고 하는) 폐단은 끝이 없으니, 아무리 나라의 힘을 다 모아 대접한다 해도 그 형편이란 지탱하기 어렵겠습니다. 요즈음 남으로 내려오고 나서 요동ㆍ계주ㆍ선주ㆍ대원 등의 병사들은 길을 따라가면서 싸우고 관민을 때리고 (하인을 결박하고 술과 밥을 요구하니, 행패가) 날로 심합니다. 수령도 견디다 못하여 (마침내 구차하게 면할 생각으로) 멀리 궁벽한 곳으로 피해 버리고 (하인에게만 맡깁니다. 언어가 애당초 서로 통하지 못하고 곁에서 소통할 역관도 없으니) 그 무엄한 행패를 어떻게 금지하겠습니까. (심지어 역참의 말까지도 빼앗아 가서 주인에게 한 마리도 돌려주지 않는 일이) 아침저녁으로 끊임없이 계속됩니다. 민가에 우마라고는 다 없애 버리고도 (내놓으라 졸라대니) 백성들의 불행도 차마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달리 구제할 계책은 없고, 다만 접반사 이덕형을 시켜 사실대로 제독에게 고하여 예하 장수들에게 영을 내리게 해야만 겨우 만에 하나라도 단속이 될 것인지 어떻게 될지 몰라 한갓 탄식만 합니다.”

이 무렵, 이순신은 고금도로 남하했다. 명장 양호마귀와 권율의 무리가 울산성을 치다가 돌연 한양으로 물러났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분개하여 삼도 수군 제장을 호령해 보화도의 여막을 걷고 남하, 지금의 고금도에 도착한 거였다.

순신, 후퇴 소식 듣고 분개

이때 전라감사 황신이 이순신의 형세를 보려고 보화도에 있는 진중에 들어왔다. 이순신과 황신은 한산도에서 처음 만나 지기지우가 되었던 사이였다. 서로 병기兵機와 방략을 논의하고 황신은 이순신을 삼남의 해상 장성이라 하여 전라도 연해 19읍을 순신의 관하에 전속하게 하였다.

이순신은 고금도에 근거를 잡고 명장 진린이 남하하면 거처할 관아를 건설할 예정이었다. 고금도는 흥양반도를 돌아 좌수영을 통하는 요해처에 있는 섬이었다. 이 섬은 산이 조밀하고 물이 깊어 형세가 기이하고 큰 농장이 곁에 있어 군량을 농작하여 공급할 수 있었다. 이순신은 적군 소탕도 늦추지 않았다. 수하 제장을 강진 해남으로 보내 떠도는 적을 소탕하여 버렸다. <다음호에 계속>
정리 | 이남석 더스쿠프 발행인 겸 대표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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