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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이순신공세가 115

진린의 갑질에 용안이 붉어졌다

2016. 05. 27 by 이남석 발행인 겸 대표

고금도에서 세력을 회복한 이순신은 명나라 수군이 이곳으로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순신은 그들의 병영을 짓기 시작했다. 명나라 대장인 제독의 아문도 건설했고, 중국 병선의 정박처를 택하여 선창 방파제도 지었다. 하지만 명나라 제독 진린은 이순신의 운명을 바꿔놓을 인물이었다.

 
이순신은 고금도에 근거를 잡고 명장 진린이 남하하면 거처할 관아를 건설할 예정이었다. 고금도는 흥양반도를 돌아 좌수영을 통하는 요해처에 있는 섬이었다. 이 섬은 산이 조밀하고 물이 깊어 형세가 기이하고 큰 농장이 곁에 있어 군량을 농작하여 공급할 수 있었다. 이순신은 적군 소탕도 늦추지 않았다. 수하 제장을 강진 해남으로 보내 떠도는 적을 소탕하여 버렸다.

이때 순천 삼일포三日浦에는 모리민부毛利民部라는 일본 적장이 함대를 정박시키고 있어 순천 왜교의 소서행장을 지키고 있었다. 모리민부는 이순신이 고금도에 온 지 얼마 안 된 탓에 군량이 부족할 것을 미리 알았다. 그래서 군량의 길을 끊으려고 하고 있는데, 척후병이 다음과 같은 보고를 올렸다. “이순신이 동백도冬柏島에 군량을 쌓아두었습니다.” 이를 들은 모리민부는 자신의 정예함대 40여척을 거느리고 동백도로 쳐들어갔다.

당시 이순신은 고금도 앞에 동백도가 있고 그 뒤에 우장곶佑將串이란 땅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바다 밑에 암초가 많이 있는 땅이었다. 그래서 이순신은 우장곶에는 기치를 많이 꽂고 동백도에는 나무를 쌓아 양식을 하는 듯한 모양새를 만들었다. 동백도로 쳐들어온 모리민부는 이를 알 리 없었다. 단지 양식을 하는 것으로 알고 쳐들어오다가 물 밑에 있는 암초에 배가 부딪쳐 병선 몇척이 부서졌다. 간신히 동백도에 상륙했지만 군량은 없고 나무뿐이었다.

▲ 명군의 횡보를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유성룡은 하늘을 원망했다.[사진=더스쿠프]
섬 그늘에 복병하고 있던 이순신 함대는 대기하고 있다가 요격하여 적선 10여척을 풍우와 같이 깨뜨려 불살랐다.

이순신의 모습을 멀리서 본 모리민부는 겁을 먹고 암초를 피하여 달아났다. 이순신은 우레와 질풍같이 뒤를 추격하여 절이도折爾島를 지나 장흥 첨산도尖山島 앞바다에 다다랐다. 순신은 이 바다에서 승리한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 대연습을 거행하였다. 모리민부의 패잔군은 쫓기는 길에 소서행장의 구원을 얻어 몸을 간신히 피했다. 하지만 이순신이 그날 밤 새벽 야습을 감행하여 병선 10여척을 깨뜨려 불사르고 곤한 잠을 자던 적병 100여급을 베었다.

새벽 틈타 일본 병선 대파

이 싸움에 가장 큰 공로를 세운 장수는 이순신李純信ㆍ안위우치적배흥립유형송희립김응함송여종이기남조계종이언량황정록 등 제장이었다. 이순신은 승전고를 울리며 군을 거두어 고금도로 돌아왔다. 적장 모리민부는 낙담하여 삼일포를 버리고 순천 왜교로 달아나 소서행장의 진과 합세하였다. 한산도의 대세력을 회복한 이순신은 병위를 크게 떨쳤다.

이순신이 대승첩을 거듭하자 구름이 용을 따르고 바람이 범을 따르듯 의용 장정들이 모여들어서 벌써 8000명이 넘었다. 하지만 이순신의 걱정은 이만저만 아니었다. 첫째는 군량이었는데, 이순신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일종의 계책을 냈다. 충청전라경상 삼도를 통행하는 선박에 통행첩지를 주고 통행첩이 없이 다니는 배는 적국의 간첩과 탐정선으로 단정해 일체 통행을 금지하였다. 또한 배의 대소를 분간하여 대선은 쌀 3섬, 중선은 쌀 2섬, 소선은 쌀 2섬을 받고 통행첩을 주었다.

백성들은 이순신의 백전연승하는 해군을 믿고 쌀을 갖다 바치고 통행첩을 얻었다. 이렇게 하여 받은 쌀이 불과 10일 동안에 1만여석에 달하였다.

군량의 걱정을 덜은 이순신은 각 지방에 명령을 내려 구리와 철을 모으게 했다. 백성들은 밥주발과 숟가락까지 바쳤다. 이순신은 고금도에 병기제조 공장을 세우고 천지현자 삼종 대포, 조총 화전, 대장군전 진천뢰 등 무기를 만들고 칼도끼를 만들었다. 또한 연해 각처의 목재를 실어와 병선 짓기를 시작하였다. 상인, 어민까지 모여들어 고금도는 한달이 채 안 돼 번창한 도시가 됐다.

이순신은 또 명나라 수군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의 병영을 짓기 시작했다. 명나라 대장인 제독의 아문도 건설했고, 중국 병선의 정박처를 택하여 선창 방파제도 지었다. 고금도의 군항화 계획이 조금씩 성취돼 갔다.

이때에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이 5000 이상의 수군과 병선 70여척을 끌고 강화도로부터 내려온다고 소식이 왔다. 명목은 청병請兵이었지만 실제로는 이순신의 행동을 견제 또는 간섭하는 게 목적이었다.

명 수군제독 진린이 서울을 떠날 때에 선조는 제신을 거느리고 청파역靑坡驛까지 나와 은근한 전송을 하였다. 이날 진린의 부하는 이 지방 성주인 양주목사를 차고 때리고 청파찰방靑坡察訪 이상규李尙規를 바오라기(삼이나 칡 따위로 굵게 엮어 만든 오랏줄)로 목을 매어 땅바닥에 꿇려서 유혈이 땅을 적셨다. 진린은 성품이 원래 오만하고 사나운 인물이었다.

이순신, 군량 걱정 덜었지만…

영의정 유성룡은 진린에게 “청파찰방 이상규를 용서하여 주시오”라고 청하였으나 진린은 이렇게 호령했다. “너희 조선 관원들은 이렇게 하여야 버릇을 고친다. 너희 놈들이 하는 일이 다 무엇이냐? 적이 오면 너희 놈들은 다 도망하고 우리 대명 군사더러 죽을 땅에 나가 싸우게 하지 않느냐.” 진린은 도리어 기세를 부렸다. 좌석에 앉아 있던 선조는 용안이 붉어져 주홍빛같이 변하였다.

유성룡은 따라 나온 재상들을 돌아보며 한탄했다. “가석하다. 이순신이 또 낭패하겠군. 순신은 혼자라도 일본 수군을 넉넉히 이기거든 무엇 하러 명나라에 또 청병을 한단 말이오? 순신이 진린과 한 군중에 있게 되면 순신은 하고 싶은 일을 못하게 될 것이요, 도리어 순신에게 원치 아니하는 일을 시킬 것이요, 순신이 만일에 거스르면 노할 것이니, 이러고야 아니 패하고 어찌하오?” 하였다. 선조와 여러 대신은 유성룡의 말에 “참 그렇겠소” 하고 이순신에게 이런 뜻을 알리라 하였다. <다음호에 계속>
정리 | 이남석 더스쿠프 발행인 겸 대표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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