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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이순신공세가 118

“이순신의 정사 제갈량 못지않다”

2016. 06. 17 by 이남석 발행인 겸 대표

명나라 제독 진린은 이순신을 존경했다. 자신이 탄 가마가 이순신의 가마를 앞서가지 못하도록 엄명을 내릴 정도였다. 진린은 명나라 황제에게 이순신의 장재와 훈공을 보고하여 ‘이순신은 경천위지經天緯地(천하의 체계를 세워 바르게 경영한다는 의미)의 재주와 보천욕일補天浴日(하늘을 깁고 해를 목욕시킨다는 뜻)의 공이 있는 장수’라고 상주하였다.

고금도에 정착한 진린의 군사들은 조선 백성을 학대하고 재물을 약탈하면서 난리를 쳤다. 그래서 백성들은 ‘견딜 수 없다’며 이순신에게 제소를 했다. 명나라 장수들의 버르장머리란 어쩔 수 없었다.

이 소문을 들은 명 제독 진린은 이순신에게 통역관과 아장을 보내 그 이유를 물었다. 이순신은 얼굴에 불편한 노기를 띠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조선 군민이 명나라의 도독이 오는 것을 보고 부모와 같이 우러러 보았더니 이제 명군이 폭행과  약탈하기를 일삼아 백성과 군졸이 이를 견딜 수 없어서 모두 다른 곳으로 피하려 하오. 내가 대장이 되어 홀로 이곳에 있을 수 없은즉 나도 역시 진을 옮겨 보화도로 가고자 하오!”

진린이 이 말을 듣고 놀라 이순신의 손을 잡고 간곡히 만류하였다. 진린은 그 자리에서 명군 진중을 조사하여 약탈한 군사를 일일이 순신에게 보냈다. 이순신이 논책하고 골라내어 명병을 징계하였다. 명병은 그후부터 순신을 자기 도독보다도 더 무서워하여 약탈을 못했다.

8월 6일 탐망군의 보고를 받은 이순신은 적선 100여척이 기고당당하게 절이도 밖에서 들어온다고 경고하였다. 이순신은 몸소 선봉이 되어 적선 중으로 돌진하자 대전쟁이 일어났다. 이순신의 거북선은 좌충우돌했고, 각 병선의 대포소리는 산악을 흔들었다. 격전을 치른 지 수시간 만에 적선 50여척을 당파했다. 온 바다에는 적선이 불타는 연기가 가득했다. 적은 견딜 수 없어 남은 배를 돌려 동쪽으로 달아났다.

▲ 진린은 무슨 일이든 이순신을 찾아와 물은 후 행동에 옮겼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이순신은 승전하고 돌아와 적의 머리 140급을 진린에게 바치고 적선 50척을 당파한 공을 전부 진린에게 돌렸다. 진린은 매우 기뻐하여 이날로부터 진린은 무슨 일이 벌어지든 반드시 이순신에게 물어본 연후에 행동에 옮겼다.

이순신을 부를 때에는 반드시 노야라고 부르고 가마를 타고 어디를 갈 때에도 감히 앞서가지 아니하였다. 명나라 제장들 역시 이순신을 진도독 대하는 듯이 경대하며 신뢰했다. 진린은 명나라 황제에게 이순신의 장재와 훈공을 보고하여 ‘이순신은 경천위지經天緯地(천하의 체계를 세워 바르게 경영한다는 의미)의 재주와 보천욕일補天浴日(하늘을 깁고 해를 목욕시킨다는 뜻)의 공이 있는 장수’라고 상주하였다.

적선 격파에 기여한 거북선

황제는 이순신의 전후 훈공을 살펴보고 수군도독이라는 명나라 벼슬을 봉하고 도독의 인수印綬와 호두영패虎頭令牌, 귀도鬼刀, 참도斬刀, 독전기督戰旗, 남령기藍令旗, 홍령기紅令旗, 곡나팔曲喇叭의 여덟가지 물건을 하사하였다.

명사明史 여복지輿服誌에는 이런 기록이 실려 있다. “수군도독은 문무대신 및 속국의 번왕과 동등한 지위다.” 그런즉 ‘유명수군도독有明水軍都督’이라 하면 어떤 의미로 보면 조선 국왕과 동등한 지위였다. 그러므로 조선에서는 이순신에게 죄를 물을 사람은 없는 것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벽파진의 대승첩의 보고를 받은 명나라 황제는 초유문招諭文과 면사첩免死帖이라는 단서철권(대대로 죄를 면하게 하는 것)을 이순신에게 전하였다. 이것을 가진 사람은 자기 당대뿐만 아니라 자손까지도 사형을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순신은 명나라의 수군도독으로 자처하거나 자칭하는 일은 없었다.

진린은 늘 이순신의 군을 다스리는 제도와 백성을 돌보는 정사가 옛날의 이윤이나 제갈량을 방불케 한다고 말하였다. 또한 대소 군무를 반드시 찾아와 자문하면서 이렇게 탄식하기도 했다. “이순신은 소국 인물이 아닌즉 중국에서 벼슬을 하면 마땅히 천하의 으뜸 장수가 될 것이거늘 어찌 소국에서 몸을 구부려 스스로 곤궁하리오.”

진린은 순신의 맹산서해시盟山誓海詩를 차운하여 순신을 흠모하였다. 진린도 이순신과 같이 신장 8척에 위신이 당당하여 중국에서 문무재를 겸한 장수라 하였다. 광동성廣東省 사람으로 성품이 웅장하고 사나우며 무용이 천근을 드는 장사였다. 자는 조작朝爵이오 호는 용애龍厓였다. 벼슬은 도독부동지수군제독都督府同知水軍提督이오 동쪽으로 온 이래로는 이순신을 처음 보는 대인물이라고 하여 동심협력하기로 스스로 맹세하였다. 순신도 또한 진린의 찬시를 받고 다시 시를 지어 답하였다.

이 무렵 조선 안팎에선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조정에서는 임진란 이래로 7년이나 난마와 같은 국가사를 경영한 영의정 유성룡을 파면했다. 선조가 이이첨李爾瞻, 유영경, 이산해의 무리의 참소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이원익을 영의정, 이덕형을 좌의정, 이항복을 우의정을 삼았다.

풍신수길은 자신의 조카이자 양자인 풍신수차에게 내정을 맡겨놓고 있었다. 하지만 풍신수차는 관백이 된 후 방탕하고 음란하며 사치를 숭상했다. 급기야 풍신수길이 장만하여 놓은 취락聚樂의 창고를 헐고 보물을 끄집어내었다. 이것이 들통 날까 두려워했던 풍신수차는 기주紀州의 고야高野로 들어가 자살하여 버렸다. <다음호에 계속>
정리 | 이남석 발행인 겸 대표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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