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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시산 변의현 대표와 신수균 어르신

30대 창업가와 70대 바리스타 “나이스 투 밋 유!”

2018. 08. 29 by 이윤찬 기자, 오상민 사진작가
변의현 대표(오른쪽)와 신수균 매니저는 아름다운 동행을 하고 있다. [사진=오상민 작가]
변의현 대표(오른쪽)와 신수균 매니저는 아름다운 동행을 하고 있다. [사진=오상민 작가]

명분과 실리는 다르다. “진정한 가치는 영원하다”는 말도 있지만 멋진 명분이 생존과 지속가능성을 담보하는 건 아니다. 그래서 냉정한 시장에서 명분만큼 중요한 건 ‘매력’이다. 

2015년 창업한 ‘우시산(울산의 옛 이름)’은 요즘 주목 받는 사회적기업 중 한곳이다. 실버 바리스타를 고용하고, 사회적 약자에게 희망을 펼칠 공간(갤러리)을 선뜻 제공하며, 날로 사라지는 ‘고래자산’을 보호하는 문화 콘텐트를 만들고 있으니, 이목을 끌 만하다.

우시산의 매력은 ‘사람’이다. 실버인력·경단녀·청년인력·자원봉사자들이 연출하는 하모니는 아름답고 경쾌하다. 그 중심엔 30대 창업가 변의현(39) 대표와 70대 바리스타 신수균(71) 매니저가 있다. 더스쿠프(The SCOOP)와 천막사진관이 두 사람을 만났다. 12번째 주인공이다.

청년과 실버도 세대를 뛰어넘은 ‘동반자’가 될 수 있다. [사진=오상민 작가]
청년과 실버도 세대를 뛰어넘은 ‘동반자’가 될 수 있다. [사진=오상민 작가]

# 1장. 용접공의 슬픈 은퇴

“따르릉~따르릉~.” 찐득한 바람이 불던 늦은 오후, 어르신의 전화벨이 울렸다. 2015년 초여름, 어르신은 작은 엔지니어링 업체의 면접을 봤고, 당락當落을 기다리고 있었다. 1년여 참여했던 큰 프로젝트가 끝나 새 일자리가 필요했다.

2005년 대기업 용접공으로 정년퇴임한 후 벌써 4곳의 회사를 더 다닌 그였다. 그사이 나이가 육십고개를 넘어섰지만 어르신은 여전히 곳곳에서 ‘부름’을 받았다. 용접이면 용접, 제도製圖(기계 도안을 그리는 것)면 제도, 못하는 게 없었다. 심성도, 평판도 더할 나위 없었다. 내심 그도 자신있었다. 건강만 허락한다면 무슨 일이든 OK였다.

“신수균님이신가요?” 기다리던 전화였다. 어르신은 경쾌하게 답했다. “네! 맞습니다.” 하지만 기다리던 답이 돌아오진 않았다. “이번엔 함께 할 수 없게 됐습니다. 다음에 연락 드리죠.”

어르신은 얼결에 걸음을 멈췄다. 다리도, 머리도 굳었다. ‘이러다 뒷방 늙은이가 될 수도 있겠구나, 어떻게 살아온 인생인데’라는 상념이 심장을 때린 탓이었다. 찐득한 바람이 비를 몰고 왔다. 어르신의 마음에도 ‘비悲’가 내렸다.

신수균 매니저의 첫 인상은 강하다. 하지만 신 매니저만큼 여리고 정이 많은 사람은 드물다. [사진=오상민 작가]
신수균 매니저의 첫 인상은 강하다. 하지만 신 매니저만큼 여리고 정이 많은 사람은 드물다. [사진=오상민 작가]

#2장. Nice To Meet You

며칠밤을 지새웠다. “그래도 아직은.” “아니야, 가당찮은 욕심이지.” 서로 다른 생각이 밤마다 뒤엉켰다.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낸다’는 섭리를 깨우치는 건 고된 일이었다.

한달여 만에 집에서 나왔다. 지독하게 살아온 인생이었다. 허무하게 끝낼 순 없었다. 우쿨렐레·라인댄스·바리스타 등 구청(울산 동구) 무료교육을 힘껏 수강했다. 돈‧자존심‧명예…. 이런 것들 때문이 아니었다. 누군가를 위해 우쿨렐레 연주를 하더라도, 또 누군가에게 커피 한잔을 대접하더라도 ‘제대로’ 하고 싶었다. 이게 그가 생각하던 ‘어른의 몫’이었다.

그로부터 100여일, 어르신은 라인댄스·바리스타 자격증을 땄다. 우쿨렐레 연주 솜씨도 부쩍 좋아졌다. 틈만 나면 복지관 행사에 참여했다. 힘없는 노인들에게 향긋한 내음의 커피를 대접하고, 댄스를 가르쳤다. 아름다운 헌신獻身이었다.

하지만 순탄치만은 않았다. 댄스강사·바리스타는 대부분 젊은 데다 수도 많았다. 봉사활동을 자원해도 꽃 같은 젊은이들에게 자리를 내줘야 했다. 혹여 자리가 나도 ‘노욕老慾’으로 비칠까봐 한걸음 물러섰다.

그 무렵이었다. 어르신에게 뜻밖의 제안이 들어왔다. “어느 30대 젊은이가 ‘노인 일자리 창출을 위한 사회적기업’을 만들었다고 하더군요. 그곳에서 실버 바리스타를 찾는데, 운 좋게도 제가 추천을 받았어요. 산전수전 다 겪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도 그렇게 설렐 수가 없더라고요.”

2015년 11월, 면접 전날. 어르신은 손수 만든 명찰을 가슴에 달고 거울 앞에 섰다. 예행연습을 위해서였다. “첫인사는 어떻게 할까.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아니야, 나이스 투 밋 유! 그래 이게 좋겠어.” 설렘이 마음을 흔들었다. ‘신수균’이라는 이름이 적힌 명찰에 햇살이 쏟아졌다.

우시산의 분위기 메이커는 신수균 매니저다. 그는 항상 먼저 인사하고, 먼저 웃는다. [사진=오상민 작가]
우시산의 분위기 메이커는 신수균 매니저다. 그는 항상 먼저 인사하고, 먼저 웃는다. [사진=오상민 작가]

#3장. 30대 에디터의 고민

글을 쓴다는 건 아픔이었다. 글 한줄 때문에 다치는 사람이 숱했다. 그건 쾌감이 아니었다. 짐이었다. 2005년부터 지역지와 통신사에서 일했던 그에겐 탈출구가 필요했다. 왠지 모를 죄의식 탓에 견딜 수가 없었다. 남몰래 사회복지사 공부를 했다. 주말이면 독거노인을 돌봤다. 에디터와 복지사, 그는 한동안 ‘양립하기 힘든’ 경계선에서 고민했다.

통신사에 사표를 던진 건 에디터 생활을 시작한 지 10년째 되던 2014년 봄이었다. ‘운명에 이끌려서…’ 이런 거창한 이유 따윈 없었다. 10년간 힘있는 사람들을 감시했으니, 다음 10년은 힘없는 사람들을 보듬고 싶었다. 이 또한 그에겐 정의正義였다.

현장은 생각보다 열악했다. 복지사의 손은 늘 부족했다. 복지서비스는 다양했지만 알맹이가 없었다. 숱한 실버교육들은 허울뿐인 자격증만 줬지 일자리를 제공하진 못했다. “자격증은 있는데 써먹을 곳이 없다니.” 웃지 못할 모순이자 실속 없는 쇼잉(전시행정)이었다.

우시산의 성장세는 주목할 만하지만 풀어야 할 과제도 많다. 변의현 대표의 어깨는 늘 무겁다. [사진=오상민 작가]
우시산의 성장세는 주목할 만하지만 풀어야 할 과제도 많다. 변 대표의 어깨는 늘 무겁다. [사진=오상민 작가]

그렇다고 뒷방에서 불평만 늘어놓을 순 없었다. 그건 ‘행동하지 않는 양심’이었다. 시간만 나면 자격증과 일자리를 매칭할 방법을 고민했다. 관련 행사를 추진한 적도 있다. 2015년 가을엔 울산 남구청이 주관한 ‘사회적경제 창업팀 공모사업’에도 참여했다. 

그는 공모사업 신청서에 이런 글을 남겼다. “현장과 정책의 간극을 해소하려면 무료강의 등 서비스를 받는 어르신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해야 한다. 어르신과 신진작가들이 함께하는 ‘갤러리카페’를 만든다면 일자리 해소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는 신청인 서명란에 ‘변의현’이라고 썼다. 펜끝이 따뜻하게 감겼다. 새로운 인연이 찾아오는 신호였다.

#4장. 인연이 날아오르다

말 그대로 ‘덜컥’이었다. 구청 공모전에 냈던 ‘갤러리카페’가 핵심사업으로 선정됐다. 기대가 쏟아진 만큼 할 일도 태산이었다. 구청의 컨설팅을 받아 사회적기업 ‘우시산(울산의 옛 이름)’을 설립했다(2015년 10월). 카페 이름은 ‘실버와 신진작가의 꿈을 잇는다’는 의미를 담아 ‘연緣’이라 지었다.

하지만 걸리는 게 있었다. ‘연’에 꼭 맞는 실버 바리스타를 찾는 일이었다. 2015년 11월, 변의현 우시산 대표는 한 어르신을 소개받았다. 대기업 용접공으로 정년퇴임한 분이었다. “어떤 분일까. 괜찮을까.” 면접 전날 변 대표는 잠을 설쳤다. 설렘 때문이 아니었다. 걱정 탓이었다.

변의현 대표는 차분하지만 에너지가 넘친다. 그는 “우시산을 사회적기업을 돕는 사회적기업으로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사진=오상민 작가]
변의현 대표는 차분하지만 에너지가 넘친다. 그는 “우시산을 사회적기업을 돕는 사회적기업으로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사진=오상민 작가]

면접날 아침, 그날따라 햇빛이 쏟아졌다. 변 대표는 맑은 기운을 느꼈지만 감정을 추슬렀다. ‘적임자를 쉽게 만날 것이란 기대를 품지 않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이었다.

그날 오후, 회의를 마친 변 대표가 갤러리카페 ‘연’으로 들어섰다. 짙은 선글라스를 낀 어르신이 기다리고 있었다. ‘신수균’이란 명찰이 눈에 들어왔다. 

“나이스 투 밋 유!” 술술, 막힘 없는 인사말. 여러번 연습한 티가 났다. 변 대표는 환하게 웃었다. 30대 창업자와 70대 바리스타의 첫 만남. 작은 카페 ‘연’에 인연因緣이 날아올랐다.

# 5장. 명분과 실리의 경계

명분과 실리는 다르다. 훌륭한 명분이 생존을 보장해주는 것도 아니다. 열에 아홉은 문을 닫는다는 카페사업, 하물며 ‘실버카페’였다. “과연 누가 오겠는가.” 사회적기업 우시산은 이런 우려 속에 설립됐다. 실버 바리스타는 편견의 문제이자 현실의 과제였다. 신진작가들이 뛰놀 수 있는 공간을 주겠다는 구상도 실속 없는 명분에 가까웠다.

갤러리카페 ‘연’은 지역민들과의 교류를 이어간다. 신수균 매니저가 경로당 어르신들을 모시고 라인댄스를 추고 있다. 박수와 웃음이 쏟아졌다. [사진=오상민 작가]
갤러리카페 ‘연’은 지역민들과의 교류를 이어간다. 신수균 매니저가 경로당 어르신들을 모시고 라인댄스를 추고 있다. [사진=오상민 작가]
카페 ‘연’에는 작은 갤러리가 있다. 생애 첫 작가전, 중증장애인 작품전 등 뜻깊은 전시회가 열린다. [사진=오상민 작가]
카페 ‘연’에는 작은 갤러리가 있다. 생애 첫 작가전, 중증장애인 작품전 등 전시회가 열린다. [사진=오상민 작가]

하지만 우시산은 창업 2년여 만에 우려를 기우杞憂로 바꿔놓고 있다. 갤러리카페 ‘연’은 단골손님들로 북적인다. 이곳이 다른 사회적기업의 탐방코스로 떠오른 건 예상치 못한 소득이다.

생애 첫 작가전, 중증장애인 작품전, 사회적기업 제품전 등 뜻깊은 전시회도 열린다. 카페의 한편에 있는 ‘마을행복공방’에선 고래쟁반‧고래컵 등 크고 작은 수공예품들이 만들어진다. 지역민들과 ‘콜라보 제품’을 제작하기도 한다. 


지난해부턴 관광사업으로 보폭을 조금 넓혔다. 울산 장생포 고래마을에서 진행하는 ‘옛날 우체국서 편지 부치기(느린 우체통)’는 우시산의 대표 체험 프로그램이다. 옛 모습을 재연한 장생포 국민학교에선 고래학습교실(고래랑놀자)을 운영하고 있다. 사라져가는 장생포의 ‘고래자산’을 문화 콘텐트로 개발한 셈이다.

성과도 뚜렷하다. 우시산은 올 4월 한국관광공사의 예비관광벤처기업에 선정됐다. 마을행복공방은 2017년 행자부 영남권 지역공동체 우수사례로 꼽혔다. 지난해 1억원을 갓 넘긴 매출도 올해 4억원으로 껑충 늘어날 전망이다.

우시산은 고래자산을 활용한 수공예품을 제작한다. 서미연 사원(청년), 이순희 바리스타(실버), 구경순 자원봉사자 등 우시산 식구들이 밝게 웃으며 작업하고 있다. [사진=오상민 작가]
우시산은 고래자산을 활용한 수공예품을 제작한다. 서미연 사원(청년), 이순희 바리스타(실버), 구경순 자원봉사자 등 우시산 식구들이 밝게 웃으며 작업하고 있다. [사진=오상민 작가]
갤러리카페 ‘연’의 한편에 있는 마을행복공방에선 각종 수공예품이 만들어진다. 우해진 팀장(왼쪽)과 이은정 사원이 수공예품을 만들고 있다. 두 이는 경단녀다. [사진=오상민 작가]
‘연’의 한편에 있는 마을행복공방에선 각종 수공예품이 만들어진다. 우해진 팀장(왼쪽)과 이은정 사원이 수공예품을 만들고 있다. 두 이는 경단녀다. [사진=오상민 작가]

우시산의 매력은 ‘사람’이다. 실버인력(4명), 청년인력(2명), 경단녀(3명), 자원봉사자(15명) 등 25여명이 아름다운 하모니를 연출하고 있다. 그 중심에 신수균 어르신(실버 바리스타·매니저)이 있다. 어르신은 ‘분위기 메이커’다. 그게 누구든 먼저 인사하고, 먼저 웃고, 먼저 돕는다.

갤러리카페를 찾아온 손님들에겐 ‘만능 재주꾼’으로 통한다. 손님이 원하면 기타를 치면서 옛 노래를 불러주고, 때론 라인댄스를 신명나게 춘다. 이젠 마술까지 한다. 베테랑 마술사에게 60만원이나 주고 마술 25가지를 배웠다.

마음도 특별하다. 어르신은 한여름에도 흰 와이셔츠, 베스트(vest), 앞치마, 베레모를 착용한다. 사비를 털어 마련한 의상으로, 카페를 찾아온 손님에게 ‘진심을 바치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배려配慮
도와주거나 보살펴 주려고 마음을 씀.

배려는 비움과 낮춤의 철학이다. 무거운 의미만큼 남을 배려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애써 마음을 쏟았는데, 상처 만 받는 경우도 많다. 어르신은 말했다. “왜 마음이 안 좋을 때가 없겠어요. 저도 사람인데요. 하지만 이 세상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정말 많아요. 따뜻한 말 한마디를 기다리는 이들도 생각보다 숱하죠. 어쩌면 저도 그런 관심을 바랐을지 몰라요.”

어르신이 눈을 천천히 감았다. 폭탄이 떨어지는 전장戰場이 스쳤다. 1969년 베트남 전선. 몸을 바짝 수그리고 있는 일병 수균이 보였다. 짙은 선글라스 속에 감춰진 어르신의 눈이 떨렸다.

우시산은 울산 장생포 고래마을에서 옛 모습의 ‘우체국’을 운영한다. 옛날 방식으로 편지를 부치는 ‘느린 우체통’ 프로그램은 흥미롭다. 배으뜸 사원(청년), 김호 바리스타(실버) 등 우시산 식구들이 ‘느린 우체통’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사진=오상민 작가]
우시산은 울산 장생포 고래마을에서 옛 모습의 ‘우체국’을 운영한다. 배으뜸 사원(청년), 김호 바리스타(실버) 등 우시산 식구들이 ‘느린 우체통’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사진=오상민 작가]

# 6장. “잘됐네, 잘 갔다 온나”

낮밤이 따로 없었다. 저기 저 언덕의 곡사포에서 날아오는 폭탄은 목숨줄을 끊을 듯했다. 폭탄은 꼬리를 물었고, 폭음은 귀청을 찢어댔다. 아우성과 신음…, 광적인 파괴의 현장.

그래, 수균은 베트남 전선 ‘캄란(Cam Ranh Bay)’에 있었다. 갓 스물, 일병이었다. 수균을 괴롭힌 건 폭음만이 아니었다. 밤이면 들려오는 작은어머니(새어머니)의 건조한 목소리가 더 두려웠다. 환청幻聽이었다.

수균이 소속된 부대의 파병이 결정됐을 때, 그곳은 곡소리가 뒤섞인 눈물바다가 됐다. ‘보내지 말라’는 아우성도 가득했다. 그 와중에도 수균은 혼자였다. 5형제 중 막내였지만 그는 감정적 외톨이였다. 친엄마가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은 초등학교 때부터였다.

아버지는 냉정했고, 형들은 저 살기 바빴다. ‘미술을 하겠다’면서 대학(건축학)을 맘대로 때려치운 다음엔 아버지의 미움까지 샀다. 엄마의 안방을 차지한 작은어머니도 그에게 정을 줄 리 없었다. 그래도 집에 전화 정도는 해야 했다. 마지막 인사가 될지도 몰랐다.

“따르릉!” “여보세요.” 건조한 목소리, 작은어머니였다. “저 베트남에 가게 됐습니다.” 수균이 입을 떼자 ‘비수 같은 말’이 날아왔다. “그거 잘됐네. 잘 갔다 온나.” 
참담했다. “베트남에서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나쁜 생각이 머리를 휘감았다.

수균은 또 잠에서 깼다. “잘 됐네, 잘 갔다 온나”라는 환청 탓이었다. 폭탄이 굉음을 내며 날아들었다. 동료들이 참호 속으로 몸을 던졌다. 수균은 혼자였다.

신수균 매니저는 햇빛을 보면 눈물을 흘린다. 수십년 용접의 후유증이다. 그가 짙은 선글라스를 쓰는 진짜 이유다.[사진=오상민 작가]
신수균 매니저는 햇빛을 보면 눈물을 흘린다. 수십년 용접의 후유증이다. 그가 짙은 선글라스를 쓰는 진짜 이유다.[사진=오상민 작가]

# 7장. 눈 내리던 어느 날

1970년 1월 한겨울, 베트남 캄란항에서 귀향선을 탔다. 베트남 전선에 투입된 지 13개월. 수균은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남았고, 군복을 벗었다. 배에서 바라본 베트남은 슬펐다. 산에도, 들에도, 바다에도, 하물며 하늘에도 ‘전쟁의 상흔’이 남아있었다. 수균의 가슴에도 지울 수 없는 생채기가 새겨졌다.

폭탄이 날아올 것 같아 ‘짧은 잠’을 청하는 것도 어려웠다. 툭하면 들려오는 작은어머니의 환청은 지긋지긋했다. 강박强迫이었다. 일주일여, 배는 부산항에 닻을 내렸다. 돌아온 사람들과 기다린 사람들이 엉켜 눈물을 흩뿌렸다. 수균은 또 혼자였다. 익숙한 외로움이 밀려왔고, 헛웃음이 터졌다. 전쟁터에서 얻은 버릇이었다.

그날 오후 2시께. 고향인 대구에 도착했다. 수균의 마음처럼 겨울바람엔 날이 서있었다. 이윽고 집. 그런데 아버지도, 작은어머니도 없었다. 옆집에 물어보니 가슴을 때리는 답이 되돌왔다.

“고성(경남)으로 이사가셨어. 몰랐어?” 헛웃음이 또 터졌다. 어쩔 수 없이 형님댁을 전전했다. 몸도, 마음도 편할 리 없었다. 형수 눈치 보느라 구멍 뚫린 양말까지 신경 쓰였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돌아왔지만 이 역시 ‘죽을 맛’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신문의 귀퉁이에 실린 ‘구인광고’를 접했다. “○○중공업 훈련원에서 노동자를 뽑습니다. 도전하세요.”

신수균 매니저는 “아픈 사람들에겐 말 한마디라도 따뜻하게 건네야 한다”면서 “누구든 같은 처지에 놓일 수 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사진=오상민 작가]
신수균 매니저는 “아픈 사람들에겐 말 한마디라도 따뜻하게 건네야 한다”면서 “누구든 같은 처지에 놓일 수 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사진=오상민 작가]

이것저것 따질 필요가 없었다. 곧바로 대구에서 울산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무슨 일이든 홀로 서야 했다. 울산에서 갈아탄 낡은 버스는 방어진(울산 방어동 항구)으로 가는 비포장도로를 질주했다. 폭설이 내렸고, 도로는 금세 눈으로 덮였다. ‘다신 돌아오지 말라’는 인사 같았다. 눈(雪)이 시야를 가렸다. 눈물이 흘렀다.

# 8장. 꽃향기 가득한 날

살기 위해 일했다. 잊기 위해 고생을 샀다. 훈련원 과정을 마친 수균은 조선제도과를 거쳐 ‘용접일’을 했다. 노동권이 보장되지 않던 시절. 그는 하루 반나절 이상 불꽃과 씨름했다. 쉬는 날도 없었다. 고됐다. 시력이 날로 나빠졌지만 멈출 수 없었다.

1976년엔 내친김에 사우디로 떠났다. 중동의 뙤약볕에서 고속도로를 만들고, 체육관을 지었다. 고생도 그런 고생이 없었지만 몸을 더 험하게 내쳤다. 물 대신 기름이 철철 나오는 곳, 먼지 탓에 날마다 언덕 모양이 달라지는 곳, 물이 없어 레몬즙을 빨아먹는 곳에서 원망을 털어내고 싶었다.

그렇게 5년, 어느덧 30줄에 접어든 그는 여유와 폭이 다른 사람이 됐다. 명절이면 아버지 생각에 잠을 설치는 날이 늘어났다. 귀국을 결심했다. 이리저리 꼬인 운명, 누군가는 풀어야 했다. 마침 평생을 함께할 이도 만났다. 1980년 봄, 고성을 찾았다. 꽃향기가 가득한 날이었다. “얼굴 뵌 지 벌써 10년이 넘었네. 많이 늙으셨겠구나.”

신수균 매니저는 어떤 일이든 웃으면서 한다. 그가 공연에 앞서 폭죽을 터뜨리고 활짝 웃고 있다. [사진=오상민 작가]
신수균 매니저는 어떤 일이든 웃으면서 한다. 그가 공연에 앞서 폭죽을 터뜨리고 활짝 웃고 있다. [사진=오상민 작가]

# 9장. 너절한 세숫대야

늦은 오후, 고성에 도착했다. 처음 와보는 아버지의 고성집. 작은 마당이 있는 한옥이었다. 마당 한복판엔 세면장이 있었고, 크고 작은 대야들이 흐트러져 있었다. “정리 좀 하시지.” 혼잣말을 머금은 수균은 큰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저 왔습니다. 아내 될 사람과 함께 왔습니다.”

두 분과 마주 앉았다. 떨어져 지낸 세월만큼 어색한 침묵이 길게 이어졌다. 작은어머니는 눈을 맞추지 않았다. 아버지가 힘없이 말을 건넸다. “하룻밤 자고 가거라.”

반려자 앞에선 덤덤한 척했지만 서운함을 쉽게 떼치진 못했다. 사라진 줄 알았던 불면증이 다시 찾아와 괴롭혔다. 뜬눈으로 밤을 새운 그날 새벽. 수균은 울산으로 돌아갈 채비를 마치고 문밖에서 아버지에게 인사를 드렸다.

작은어머니가 세면장에서 걸어나왔다. 손에는 너절한 세숫대야가 들려 있었다. “이거나 가져가라. 너한테 줄 건 이게 전부다.” 물려줄 재산은 이것뿐이니 다신 찾아오지 말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신수균 매니저는 여기저기 흠집이 나있는 낡은 세숫대야를 평생 간직해 왔다. 자신처럼 아프지 말라는 의미였을까. [사진=오상민 작가]
신수균 매니저는 여기저기 흠집이 나있는 낡은 세숫대야를 평생 간직해 왔다. 자신처럼 아프지 말라는 의미였을까. [사진=오상민 작가]

“허 참~.” 헛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분기憤氣 대신 다른 뭔가가 떠올랐다. “난 다른 사람에게 어땠나. 누군가를 원수처럼 생각하고 원망만 하진 않았나.” 그건 자기반성이자 깨달음이었다. 세숫대야를 가슴에 품은 수균은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나도 누군가에게 외로움과 상처를 줬을지 모른다. 베풀자. 그렇게 살자.”

1981년 수균은 ○○중공업에 ‘용접공’으로 복귀했다. 예나 지금이나 일벌레인 건 같았지만 달라진 게 있었다. 배려였다. 무엇보다 동료 용접공들이 겪는 어려움을 매일 정리해 회사에 제안했다. ‘선박 엔진룸 진동 잡는 시스템’ ‘용접공 통행로 대책’ 같은 거였다. 선후배 용접공들의 안전을 위해서였다.

수균은 ‘사랑의 제안왕’이란 별칭을 얻었고, 1992~1995년엔 ‘사내 제안왕’에 올랐다. 밖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독거노인단체를 남몰래 도왔고, 지체장애인단체에도 진심을 보냈다. 특히 버림받은 아이들은 끔찍하게 챙겼다. 2005년 정년퇴임한 이후에도 그에게 ‘함께 일하자’는 제안이 쏟아진 건 이런 실력과 심성 때문이었다. 2015년 그가 ‘단 한번의 거절’을 잠시나마 쿨하게 받아들이지 못한 까닭도 비슷했다.

신수균 매니저는 사비 60만원을 들여 마술 25가지를 배웠다.[사진=오상민 작가]
신수균 매니저는 사비 60만원을 들여 마술 25가지를 배웠다. 손님들에게 웃음을 주기 위해서다. [사진=오상민 작가]

어르신은 말했다. “쇳덩어리만 만지던 제가 바리스타가 될지 누가 알았겠어요. 가족에게 외면을 받았던 제가 약자弱子를 위해 ‘한몫’하고 있는 건 축복받은 일이죠. 어쩌면 변의현 대표와 우시산 가족들, 그리고 저는 ‘운명의 자락’이 같을지도 몰라요.” 그는 ‘집에서 가져왔다’면서 낡은 세숫대야를 보여줬다. 여기저기 긁힌 자국이 선명했지만 희고 빛났다. 어르신 같았다.

# 10장. 다시 꺼낸 꿈

어르신은 요즘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준비하고 있다. 필기시험은 합격했고, 실습과정만 남았다. 올해 안에 사회복지사가 되는 게 목표다. 다른 꿈도 있다. 내년초 ‘생애 첫 전시회’를 우시산 갤러리에서 여는 것이다. 베트남에 파병되면서 접었던 화가의 꿈을 50년 만에 다시 꺼내들었다.

“인생 참 희한해요. 저보다 30살 넘게 어린 변의현 대표를 보면서 제 인생의 방향을 다시 설정했어요.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따야겠다고 결심한 것도, ‘첫 전시회’를 열겠다고 다짐한 것도 변 대표 덕이죠. 일흔이 넘었는데, 이런 복福이 없죠.”

변 대표가 화답했다. “어르신을 만나지 못했다면 지금의 우시산은 없었을 거예요. 청년·경단녀 등 우시산의 식구들을 융합시켜준 주인공은 누가 뭐래도 어르신이죠. 저야말로 복이죠.”

30대 창업가가 싱긋 웃었다. 70대 바리스타가 미소를 지었다. 20대 대학생이 갤러리카페 ‘연’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두 사람이 함께 인사했다. “나이스 투 밋 유!”

글=이윤찬 더스쿠프 기자
chan4877@thescoop.co.kr

사진=오상민 천막사진관 작가

studiotent@naver.com

​아름다운 동반자 변의현 대표와 신수균 매니저는 마치 세대를 뛰어넘은 친구 같다.[사진=오상민 작가]​
​아름다운 동반자 변의현 대표와 신수균 매니저는 마치 세대를 뛰어넘은 친구 같다.[사진=오상민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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