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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라이프 오브 파이(Life of Pi)❺

[Economovie] 화사한 동화 잔혹한 다큐

2019. 05. 24 by 김상회 정치학 박사

우리는 수많은 ‘동화 같은 이야기’와 ‘다큐멘터리’의 혼재 속에서 살아간다. 동화 같은 이야기를 다큐멘터리처럼 신봉하기도 하고, 그것이 다큐멘터리이기를 기대하기도 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수많은 위인전은 대개는 파이의 표류기 같은 동화인 경우가 많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다큐멘터리처럼 믿고 싶어 한다.

우리는 ‘동화 같은 이야기’와 ‘다큐멘터리’의 혼재 속에서 살아간다. [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라이프 오브 파이’는 인도 소년 파이가 망망대해에서 무려 227일간 겪는 표류기다. 보통 표류기도 아니고 구명보트에 무시무시한 벵갈 호랑이와 동승한 표류기다. 사나운 호랑이를 길들이기도 하고, 어부처럼 낚시를 해서 호랑이와 사이좋게 나눠 먹기도 한다. 어떤 날은 갑자기 날치들이 하늘을 뒤덮을 듯 날면서 구명보트 가득 쌓이기도 한다. 표류 중 무인도를 만나 벵갈 호랑이 리차드 파커는 숲속으로 돌아가고, 파이는 항해를 계속해 결국 구조된다. 참으로 기적 같고 동화 같은 표류기지만 관객들은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에 ‘내셔널 지오그래픽’ 다큐멘터리를 보듯 영화를 따라 간다.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작가와 감독은 동화 같은 환상 속에서 헤매던 독자와 관객들을 냉정한 현실과 맞닥뜨리게 만든다. 모든 이야기는 파이의 상상력이 빚어낸 한편의 동화였다. 화물선이 난파해 가족을 모두 잃고 227일간의 표류 끝에 구조됐다는 사건의 시작과 결말은 동일하지만 그 과정은 모두 허구였다.

구명보트에 동승했다던 파이와 오랑우탄을 공격했던 하이에나는 아마도 채식주의자인 파이 가족을 모욕하고 상처 줬던 너절한 주방장이었던 듯하다. 상처 입은 얼룩말은 또 다른 선원이었고, 파이를 공격하는 하이에나와 결사적으로 싸우다 죽은 암컷 오랑우탄은 사실은 파이의 어머니였다. 아마도 식량이 떨어진 구명보트에서 주방장은 상처 입고 죽어가던 선원을 먼저 먹어치우고 파이까지 잡아먹으려 한 모양이다. 오랑우탄(어머니)이 아들을 지키기 위해 주방장과 ‘너 죽고 나 죽자’며 싸우다 주방장을 죽이고 자신도 죽는 비극이 벌어진다.

호랑이와 동승한 표류기는 파이의 상상력이 빚어낸 한편의 동화였다. [사진=더스쿠프 포토]
호랑이와 동승한 표류기는 파이의 상상력이 빚어낸 한편의 동화였다. [사진=더스쿠프 포토]

벵갈 호랑이 리차드 파커는 파이 자신이었다. 리차드 파커는 구명보트 속에 얼룩말(선원), 하이에나(주방장)를 모두 먹으며 227일을 버틴다. 오랑우탄(어머니)의 사체까지 먹었는지는 영화 속에서 끝내 분명치 않다. 파이는 비상식량 비스킷과 물고기를 잡아먹으며 생존한 것이 아니라 인육人肉을 먹으며 살아남았다는 것이 ‘다큐멘터리’다. 채식주의자 파이가 다른 고기도 아닌 사람의 고기를 먹으며 살아남는다.

구조된 후 캐나다 병원에 입원해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한 파이에게 화물선 선박회사 일본인 직원들이 찾아와 침몰사고와 생존의 시말始末을 탐문한다. 파이의 ‘동화’ 같은 진술은 선박회사 사고조사 전문가들에게 너무나 비현실적이다. 그러나 이들은 파이의 진술을 모두 수용하고 떠난다. 아마도 파이가 다른 선원들의 사체를 먹으며 생존했다는 것을 짐작하면서도 묻어둘 수밖에 없고, 묻어두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세월이 흘러 파이는 캐나다에서 가정을 꾸리고 품격 있는 종교철학자이자 교수로 자리 잡는다. 누군가로부터 파이의 동화 같은 표류기를 주워들은 한 소설가가 자료 수집을 위해 파이 교수를 방문한다. 일본 선박회사 조사관들과 마찬가지로 소설가 역시 파이의 동화 같은 표류기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파이는 소설가에게 “‘동화’를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아름다운 동화의 포장을 모두 걷어내고 듣고 보기에 불편한 ‘다큐멘터리’를 받아들일지는 온전히 각자의 몫”이라고 말한다. 다만 신과 함께하는 ‘동화’가 ‘다큐멘터리’보다 낫지 않겠느냐고 반문한다. 

'미투 열풍'과 '친일 논란'으로 우리 사회 많은 '동화'와 '신화'가 무너진다. [사진=뉴시스]
'미투 열풍'과 '친일 논란'으로 우리 사회 많은 '동화'와 '신화'가 무너진다. [사진=뉴시스]

우리는 ‘동화 같은 이야기’와 ‘다큐멘터리’의 혼재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동화 같은 이야기를 다큐멘터리처럼 신봉하기도 하고, 그것이 다큐멘터리이길 바라기도 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수많은 위인전은 파이의 표류기 같은 동화인 경우가 많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다큐멘터리라고 믿고 싶어 한다. 동화 같은 위인들을 롤모델로 삼아 살아가는 것이 나쁠 것도 없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수많은 동화들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지켜가기도 한다. 

‘미투 열풍’과 ‘친일 논란’으로 많은 우리 사회의 동화와 신화가 무너진다. 227일간 망망대해에서 살아남은 파이의 영웅적인 ‘생존 신화’가 사실은 채식주의자인 파이가 인육을 먹고 살아남았다는 끔찍한 다큐멘터리로 공개된다. 우리가 세계적으로 자랑하는 문인·음악가·영화감독들이 ‘위대한 전설’에서 하루아침에 파렴치한 성추행범이나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버린 친일매국노로 전락한다. 그들의 주옥같은 작품들도 모두 쓰레기통에 처박히고 우리의 자산목록에서 영구 삭제된다.
 
다큐멘터리도 소중하지만 우리 사회의 아름다운 동화와 위대한 신화도 필요하지 아니한가. 파이의 결론처럼 동화와 다큐멘터리 중에서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 
김상회 정치학 박사 sahngwhekim5353@gmail.com | 더스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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