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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기생충❹

[Economovie] 우린 정의로워졌나

2019. 08. 02 by 김상회 정치학 박사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의 대립과 갈등은 영화나 소설, 드라마의 질리지 않는 레퍼토리다. 부자는 악이고 가난한 자는 선인 명확한 선악 구도가 설정된다. 봉준호 감독은 전작 ‘설국열차’에서 이같은 방식으로 계급의 대립과 갈등을 그려냈다. 그러나 ‘기생충’은 빈부나 계급의 문제를 다루는 전형적인 방식에서 많이 벗어난다. 
 

공자는 “정의롭지 못한 사회에서는 부가 부끄럽다”고말했다.

많은 작품 속에서 대개 부자들은 속물 근성에 찌들어 있고, 강자에 약하고 약자에 강한 이중성을 보이며, 누리고 있는 부와 지위에 비하여 터무니없을 정도로 지적 능력이 부족하고 천박하기 이를 데 없는 ‘놈’들이다. 반면 가난한 사람들은 자존심, 양심, 상식, 교양을 두루 갖춘 ‘분’들이다. 부자놈들은 악이고 가난뱅이분들은 선인 명확한 선악 구도가 설정된다. 

선악 구도란 단순명료하고 공감도 쉽다. 당연히 관객들은 못 가진 자들의 편에 서서 영화를 따라간다. 계층의 부당함에 같이 분노하고 정의가 실현되기를 함께 갈망하며 감독이 부자를 불행과 파멸로 이끌어주면 기뻐한다.

그러나 영화 ‘기생충’은 이런 방식에서 벗어난다. 전작 ‘설국열차’에서 전형적인 구도로 계급의 대립과 갈등을 그려낸 것과는 다르다. 같은 감독의 작품이라는 사실이 조금 당황스러울 정도로 전혀 다른 시각을 보여준다.  

아무래도 세상에는 가진 자들보다는 못 가진 자들이 다수를 점하고 있으니, 흥행을 고려하면 작가나 감독들은 못 가진 자들의 편에 서는 것이 현명하다. 비행기나 호화유람선이야 같은 비행기나 배를 타고도 티켓 가격이 서너 배에서 수십 배 차이가 나지만, 영화 관람료나 책값은 가진 자에게나 못 가진 자에게나 동일하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가난하게 사는 기택이네 모습은 전혀 부당해 보이지 않는다. [사진=더스쿠프 포토]
가난하게 사는 기택이네 모습은 전혀 부당해 보이지 않는다. [사진=더스쿠프 포토]

가장을 비롯한 가족 구성원 모두가 백수인 기택네는 허름한 동네의 좁아터진 반지하 방에 모여 산다. 가난한 주인공은 대개 정의로운 데 비해, 이들은 분명 가난하나 한결같이 모두 게으르고 양심적이지도 않다. 자존심도 없고 성실하지도 않으며 상식과 교양과는 담을 쌓은 인물들이다. 이들이 가난하게 사는 모습은 전혀 부당하지 않아 보인다. 이 가족이 그나마 하는 일이라곤 피자 상자 접는 일인데 이마저도 불성실하기 그지없어 일감이 끊긴다. 

삼수 끝에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빈둥거리던 기택의 아들은 우연한 기회에 부잣집 박사장네 가정교사로 사기 취업한다. 명문대 재학증명서를 위조하는 데 일말의 주저함이나 죄의식도 없다. 가장인 기택은 그런 아들을 고무하고 격려·찬양한다. 쌍욕을 입에 달고 사는 백수 딸은 박사장네 늦둥이의 미술치료사로 역시 위장 취업한다.

이들 가족사기단은 박사장네서 멀쩡히 일하던 운전기사와 가정부를 함정에 빠트려 해고당하게 하고 기택과 기택의 처가 각각 그 자리를 차지할 정도로 영악하면서도 자신들의 행위에 일말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반면에 박사장네는 노블레스 오블리주까지는 아니지만 최소한 신문방송에 흔히 떠도는 ‘갑질’을 한다거나 과도한 거드름을 피우고 ‘아랫것’들을 눈 내리깔고 보지는 않는다. 기택네 가족사기단의 마수에 걸려 해고당하게 된 운전기사와 가정부에 일말의 안쓰러움도 느낄 줄 안다. 심지어 박사장의 아내는 기택네가 보기에도 순진하고 착한 구석까지 있다. 부자를 향해 분노하고 가난뱅이를 동정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있는 관객들을 당황하게 한다. 

기생충은 빈부나 계급의 문제를 다루는 전형적 구조에서 많이 벗어난다. [사진=뉴시스]
‘기생충’은 빈부나 계급의 문제를 다루는 전형적 구조에서 많이 벗어난다. [사진=뉴시스]

영화를 따라가다 문득 공자님의 한 말씀이 떠오른다  “제대로 된 사회에서는 가난이 부끄러운 것이고, 정의롭지 못한 사회에서는 부가 부끄러운 것이다.”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공정한 게임이 불가능한 사회에서 부를 이뤘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부정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했다는 말이 된다. 그러므로 부가 부끄러운 것이다.

그런 사회에서 가난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얼마든지 사회의 책임으로 돌릴 여지가 있다. 반대로 공정한 게임이 지켜지는 사회에서 가난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면 그는 게을렀거나 무능하다는 것밖에는 안 된다. 그러므로 가난이 부끄러운 것이다. 

그동안 우리 사회가 정의롭지 못했기 때문에 부자를 조롱하고 가난한 자를 동정하는 영화가 주류를 이뤘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 사회는 제법 공정하고 정의로워진 걸까.

그래서 봉준호 감독이 반지하 방에 사는 기택네 일가족으로부터 동정적인 시선을 거두고 마음 편하게 그들을 조롱하고 질타하게 된 것일까. 우리 사회가 이젠 변명의 여지없이 가난을 부끄러워해야 할 만큼 정의로운 사회가 되었을까. 그렇다면 퍽 다행이다. 
김상회 정치학 박사 sahngwhekim5353@gmail.com | 더스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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