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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에뜨 양차민 대표

고개를 들렴 너희들은 별이란다

2019. 08. 16 by 이윤찬 기자, 오상민 사진작가

첫째는 태어난 직후 별이 됐다. 둘째는 폐렴 탓에 하늘로 올라갔다. 청소년 미혼모(한부모)의 쌍둥이 딸은 그렇게 세상과 작별했다. 엄마는 어디 있는지 모른다. ‘조신하지 않다’는 주홍글씨가 새겨진 채 숨을 죽이고 있을지 모른다. 

사회적기업 마리에뜨㈜는 청소년 미혼모에게 ‘쉼터’를 제공하는 사업을 한다. 쉼터에 장기체류한 미혼모가 성인이 되면 정직원을 보장해준다. 원한다면 ‘사이버대’에 진학할 수도 있다. 

문제는 마리에뜨가 이 아름다운 사업을 언제까지 맘놓고 펼칠 수 있느냐다. 청소년 미혼모, 우린 그들을 어떻게 보듬고 있는가. 더스쿠프(The SCOOP) 16번째 천막사진관 양차민(41) 마리에뜨 대표 편이다. 

양차민 대표는 청소년 미혼모를 ‘별’, 쉼터를 ‘숲’이라 묘사했다. 그는 “별 같은 엄마들이 숲에서 꿈을 키웠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사진=오상민 작가]
양차민 대표는 청소년 미혼모를 ‘별’, 쉼터를 ‘숲’이라 묘사했다. 그는 “별 같은 엄마들이 숲에서 꿈을 키웠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사진=오상민 작가]

# 1장. 별이 된 아기  

2005년 5월 13일 늦은 오후, 시간은 쏜살 같았다. 공주 부근 성당에서 방금 전 출발한 것 같았는데, 벌써 석양이 물들고 있었다. “따르릉!” 전화벨이 울렸다. 병원(강남성모병원)에서 갓난아기를 함께 돌보던 언니의 전화였다. “차민아, 어디쯤 왔어?” 급한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거의 다 왔어요, 언니.” 병원까진 대략 5㎞ 남아있었다.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죠?”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불규칙한 숨소리만 전화선을 타고 넘어왔다. “언니!” 이번에도 답은 없었다. 
 
3일 전이었다. 아기의 상태가 더 나빠졌다. 태어난 지 100일이 갓 지난 아기, 그 작은 몸을 ‘몹쓸 병(폐렴)’이 괴롭히고 있었다. “정성이 부족해서 그런가….” 아기의 보호자였던 차민은 자책했다. ‘기도라도 하겠다’며 성당을 찾아간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윽고 병실. 아기는 보이지 않았다. 서둘러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도착했어요, 아기 어딨어요?” 언니의 목소리는 낮게 깔려있었다. “응급실로 오렴.” 
 
불길함이 머리를 휘감았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여유도 없었다. 비상계단을 타고 응급실로 빠르게 내려갔다. 아기가 보였다. 자기 몸보다 몇 갑절이나 큰 침대에 덩그러니 누워있었다. 차민이 손수 만든 예쁜 옷을 입고 있었다. 
 
싸늘했다. “왜 여기에… 이 옷을 입고….” 언니가 등을 토닥이면서 말했다. “네가 만든 옷 입고 막 하늘로 올라갔어. 하늘에선 예쁨 많이 받을 거야.” 

차민은 아기를 안았다. 온기溫氣가 남아있었다. 방금 전까지 심장이 뛴 듯했다. 눈물을 흘릴 틈도 없었다. 아기를 보듬어야 했다. 삭막한 응급실에 외롭게 놔둘 순 없었다. 

태어나자마자 음성 꽃동네에 버려진 아기는 아빠도, 엄마도 없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꽃동네로 내려가 장례를 치러주는 게 아기를 위한 길이었다. 그날 밤, 차민은 고속도로를 달렸다. 별이 쏟아졌다. 아픔이 쏟아졌다. 

교희가 하늘로 떠난 날, 양차민 대표의 삶은 망가졌다. 하지만 어둠의 끝에도 빛은 있었다. [사진=오상민 작가]
교희가 하늘로 떠난 날, 양차민 대표의 삶은 망가졌다. 하지만 어둠의 끝에도 빛은 있었다. [사진=오상민 작가]

#2장. 삶의 변곡점  
  
사진을 전공했다. 대학 졸업(1998년) 후엔 영상벤처회사를 다녔다. 재주가 남달랐고, 부지런했다. 1시간 일찍 출근하는 건 일상이었다. 2003년 창업한 사진관도 제법 잘됐다. 돌사진 전문이었는데, “잘 찍는다”는 소문이 동네에 자자했다. 누가 보더라도 괜찮은 삶이었다. 
 
정작 차민은 그렇지 않았다. ‘모든 일을 잘해야 하고, 모든 사람에게 행복을 줘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다. ‘행복 바이러스’ 콤플렉스였다. 

가고 싶은 ‘길’도 따로 있었다. 약자를 살뜰하게 보살피는 일이었다. 누군가를 도울 땐 상념이 사라졌다. 영혼 없는 거짓 웃음을 지을 필요도 없었다. 
 
2005년 3월 말, 차민은 모든 걸 접고 ‘꽃동네(사회복지시설)’로 내려갔다. 대학생 때 주말이면 내려가 봉사를 했던 곳이었다. ‘숭고한 헌신’까진 아니더라도 ‘강박’ 쯤은 뿌리치고 싶었다. 

꽃동네에 도착한 바로 다음날, 평소 알고 지내던 수녀님이 차민을 불렀다. “(꽃동네) 병원에 아픈 아기가 있어요. 병세가 심상치 않아서 서울에 있는 큰 병원으로 보내야 할 것 같아요. 며칠간 봐줄 수 있겠어요?” 차민은 “당연하죠”라고 답했다. 
 
특별한 게 없는 대화. 수녀님은 조심스럽게 부탁했고, 차민은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삶의 변곡變曲은 ‘사소하고 하찮은 지점’에서 시작되게 마련이다. 


그때까진 누구도 몰랐다. 이 짧은 대화가 차민의 삶을 180도 바꿔놓을지 말이다. 수녀님의 부탁을 흔쾌히 수용한 날, 차민의 인생은 ‘색깔’이 달라지고 있었다.

양차민 대표는 대학생 때부터 음성 꽃동네에서 봉사를 했다. 오랜만에 찾은 교희의 묘에서 함께 생활했던 수녀님을 우연히 만났다. 꼭 잡은 손이 애틋하다. [사진=오상민 작가]
양차민 대표는 대학생 때부터 음성 꽃동네에서 봉사를 했다. 오랜만에 찾은 교희의 묘에서 함께 생활했던 수녀님을 우연히 만났다. 꼭 잡은 손이 애틋하다. [사진=오상민 작가]

# 3장. 2005년 5월 13일 

아기는 의료기구(상자 모양)에 누워있었다. 눈이 달처럼 동그랗고, 콧날이 오뚝한 여자 아기였다. 아기에게 안쓰러운 눈길을 보내던 의사가 말문을 열었다. 

“태어나자마자 (꽃동네)병원에 왔어요. 감기였는데, 낫질 않네요. 폐렴기가 있어요. 성모병원으로 갈 거예요. 참, 이름은 교희예요.” 
 
차민은 두달간 교희를 정성껏 돌봤다. 엄마처럼 품고, 보듬었다. 교희도 차민의 품을 떠나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교희는 조금씩 기력을 되찾았다. 차민도 들떴다. 퇴원하는 날 입힐 생각으로 예쁜 옷을 한땀한땀 만들었다. 


교희가 태어난 지 100일이 됐을 땐 잔치도 열어줬다. ‘병원에선 잔치를 여는 게 아니다’는 말을 들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교희에게 모든 걸 다해주고 싶었다. 애틋한 두달이었다. 교희는 그렇게 딸이 됐고, 차민은 엄마가 됐다. 

“퇴원하면 입양할 생각이었어요. 까다로운 조건이 있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죠. 많은 이들이 ‘배 아파 낳은 자식도 키우기 힘든데…’라면서 걱정했지만 전 괜찮았어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두달은 교희와 저를 이어주기 충분한 시간이었어요.”  

교희의 100일 잔치 때 선물로 줬던 하마 인형. 양 대표는 이 인형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사진=오상민 작가]
교희의 100일 잔치 때 선물로 줬던 하마 인형. 양 대표는 이 인형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사진=오상민 작가]

하지만 행복은 봄꿈처럼 짧았다. 퇴원을 이틀 앞둔 날. 교희의 몸이 난데없이 뜨거워지더니, ‘코마(의식불명)’ 상태에 빠졌다. 잠시 회복되면 복수腹水가 차올라 배가 몸집보다 부풀었고, 또 코마가 왔다. 

차민은 죄책감에 시달렸다. 100일 잔치를 병원에서 해주는 게 아니라는 주변 사람들의 말이 마음에 걸렸다. ‘잘 보살펴주지 못했나’라는 잡념도 심장을 울렸다.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하늘에 ‘애걸’이라도 해야 했다. 언니가 뜯어말렸지만 차민은 고집을 피웠다. “성당에 며칠만 다녀올게요. 잠깐 회복됐으니까 교희도 괜찮을 거예요.”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교희에게도 인사를 했다. “딸, 금방 올게. 조금만 기다려줘.” 그게 마지막 인사였다. 교희는 별이 됐고, 차민은 딸을 잃었다. 
 
며칠 후 교희의 장례식. 차민은 수녀님에게 슬픈 이야기를 들었다. “엄마는 청소년 미혼모였답니다. 쌍둥이 언니는 태어나자마자 별이 됐고요. 동생도 오래 살지 못했네요. 그래도 차민씨와 함께여서 마지막은 행복했을 거예요.” 
 
차민은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입을 굳게 다물고 하늘만 응시했다. 교희에게 약속을 하기 위해서였다. “딸, 네 친구들은 허망하게 죽는 일이 없도록 할게. 어린 미혼모도 잘 보살필게. 약속할게.” 감정적 동요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그의 손가락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교희를 찾아온 양차민 대표는 말없이 푯돌(묘비)을 바라봤다. [사진=오상민 작가]
오랜만에 교희를 찾아온 양차민 대표는 말없이 푯돌(묘비)을 바라봤다. [사진=오상민 작가]
양차민 대표는 교희의 사진을 여전히 지갑에 넣고 다닌다. 그에게 교희는 ‘딸’, 그 이상의 존재다. [사진=오상민 작가]
양차민 대표는 교희의 사진을 여전히 지갑에 넣고 다닌다. 그에게 교희는 ‘딸’, 그 이상의 존재다. [사진=오상민 작가]

#4장. 미혼모를 위한 선물  

약속約束  
다른 사람과 앞으로의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미리 정하여 둠.  

마리에뜨㈜. 2016년 창업한 사회적기업이다. 천연디퓨저‧방향제‧베이비화장품 등을 제조‧판매한다. 사업목적은 ‘청소년 미혼모에게 쉼터를 제공하는 것’이다. 쉼터는 안양에 있는 ‘어느집(2채)’이다.[※ 참고: 마리에뜨는 미혼모의 사생활을 위해 정확한 위치를 공개하지 않았다.]

청소년 미혼모라면 누구든 이용할 수 있다. 모든 비용은 마리에뜨가 지불한다. 재원財源은 후원금이 아니다. 천연디퓨저 등을 팔아서 남긴 수익금으로 충당한다. 

혜택은 이뿐만이 아니다. 쉼터에 오랫동안 체류한 미혼모가 성인이 되면 정직원(마리에뜨)으로 채용한다. 사이버대에서 공부할 수 있는 시스템도 갖춰놨다. 조건은 단 하나, ‘미혼모가 원한다면’이다. 
 
마리에뜨의 창업자는 양차민 대표다. ‘교희’의 죽음이 그를 여기까지 이끌었다. “교희는 엄마가 누군지도 몰랐어요. 그러다 하늘나라로 갔죠. 미혼모의 아기가 어이없는 죽음을 맞지 않으려면 그 엄마부터 보살핌을 받아야 해요. 제가 청소년 미혼모를 위한 사업을 펼치는 이유입니다.”  

삶에 지칠 때, 꿈을 포기하고 싶을 때, 양 대표는 교희와의 약속을 곱씹으면서 버텼다. 더이상 허망하게 아이들을 잃지 않겠다고 하늘에 약속했다. [사진=오상민 작가]
삶에 지칠 때, 꿈을 포기하고 싶을 때, 양 대표는 교희와의 약속을 곱씹으면서 버텼다. 더이상 허망하게 아이들을 잃지 않겠다고 하늘에 약속했다. [사진=오상민 작가]

혹자는 양 대표와 교희의 관계를 ‘운명’이라 단정짓는다. 원했든 원치 않았든 하늘이 둘을 엮었다는 거다. 그렇지 않다. 둘을 이어준 건 단순한 운명이 아니다. 약속이다. 

삶에 지칠 때, 꿈을 포기하고 싶을 때, 양 대표는 교희와의 약속을 곱씹으면서 버텼다. “네 친구들이 교희처럼 죽는 일은 없도록 만들게.” 이건 맹세이자 의지意志였다. 
 
“마리에뜨의 창립기념일은 5월 13일, 교희가 별이 된 날이죠. 마리에뜨에서 파는 실생활용품의 브랜드도 ‘교희(kyohee)’예요. 교희는 제게 잊을 수도 없고, 잊어서도 안 되는 존재입니다.” 
 
양 대표는 말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2005년 교희의 장례식 다음날, 마음에 상처를 입은 차민이 보였다. 그는 어두운 방에 웅크리고 앉아있었다.   

# 5장. 부채와 희망  

장례식 다음날 새벽. 차민은 안양집으로 올라왔다. 내색하진 않았지만 슬픔의 골이 깊었다. 그는 짐을 풀자마자 모든 불을 껐다. 집에도, 마음에도 어둠이 밀려들었다. 눈물샘이 터졌다. 여린 속내가 긁혀나갔다. 
 
교희의 내음이 코끝을 맴돌았다. “더 안아줄걸…” “더 곁에 있을걸…” 뒤늦은 후회였다. 날이 밝아도 커튼을 걷을 수 없었다. 하늘을 보면 교희가 떠오를 것 같았다. 피말리는 감정이었다. 
 
그렇게 한달여, 차민은 마음을 간신히 추슬렀다. 약속 때문이었다. 교희의 일을 ‘과거의 일’로 묻어버릴 순 없었다. 교희에게 진 빚을 희망으로 돌려놔야 했다. 그는 다시 꽃동네로 갔다. 그날도 별이 반짝였다. 

음성 꽃동네는 양차민 대표에게 마음의 고향과도 같다. 교희를 하늘로 보내고 다시 찾은 곳도 꽃동네였다. [사진=오상민 작가]
음성 꽃동네는 양차민 대표에게 마음의 고향과도 같다. 교희를 하늘로 보내고 다시 찾은 곳도 꽃동네였다. [사진=오상민 작가]
꽃동네에서 생활할 때 양차민 대표가 매일 걸었던 길. 그는 걸으면서 많은 상념과 욕심을 지워버렸다고 말했다. [사진=오상민 작가]
꽃동네에서 생활할 때 양차민 대표가 매일 걸었던 길. 그는 걸으면서 많은 상념과 욕심을 지워버렸다고 말했다. [사진=오상민 작가]

# 6장. 웃지 못할 모순  

“앙앙~” 몇몇 아기가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아토피 때문이었다. 맘껏 긁지 못하니, 아기가 할 수 있는 건 우는 것뿐이었다. 봉사자들도 안타까움을 삼켜야 했다. 2005년 당시만 해도 아토피 비누·로션은 귀한 제품이었다.

꽃동네 ‘천사의 집’ 영유아방을 맡은 차민도 울컥했다. 부모가 없어서, 약자弱者의 자식이어서, 돈이 없어서 차별을 받게 할 순 없었다. 
 
차민은 그날로 천연비누·로션을 만드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천사의 집’ 모든 아기에게 천연비누를 나눠주기 위해서였다. 
6주 코스를 밟기 위해 학원이 있던 안양과 음성을 수시로 오갔다.

사비를 털어 ‘비누공방’도 차렸다. 작은 공방이었지만 희망을 키우기 충분했다. 사진관도 다시 열었다. 아기들을 제대로 도우려면 어쨌거나 ‘밑자금’이 필요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청소년 미혼모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미혼모쉼터(화곡동)’를 직접 찾아갔다. 매주 월요일 이곳 쉼터에서 봉사하면서 청소년 미혼모의 애환을 마음으로 깨쳤다. 


“대부분의 미혼모가 죄인 취급을 받더라고요. 모든 책임을 미혼모에게만 덧씌우는 사람도 많았어요. 모순도, 이런 모순이 없었죠.” 
 
묵인할 수 없었다. 어린 미혼모와 아기의 삶을 위해 작은 힘이라도 보태야 했다. 월요일 쉼터, 화‧수‧목‧금요일 공방과 사진관, 주말엔 꽃동네…. 차민은 몸을 돌보지 않고 일했다.

온몸을 부스럼이 괴롭혔지만 교희와의 약속을 지키는 것만큼 중요한 건 없었다. 
그럴수록 목표도 뚜렷해졌다. “청소년 미혼모와 아기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쉼터’를 만들 거야. 그들에게도 행복해질 권리가 있으니까….” 차민은 겹으로 쌓인 숙제를 하나씩 풀고 있었다. 

양차민 대표는 천사의 집 아이들에게 천연비누를 나눠주기 위해 사비를 털어 비누공방을 만들었다. 지금은 마리에뜨 쉼터로 찾아오는 미혼모들에게 비누공예를 가르치고 있다. [사진=오상민 작가]
양차민 대표는 천사의 집 아이들에게 천연비누를 나눠주기 위해 사비를 털어 비누공방을 만들었다. 지금은 마리에뜨 쉼터로 찾아오는 미혼모들에게 비누공예를 가르치고 있다. [사진=오상민 작가]

#7장. 고됨의 대가  

변심은 포기를 부른다. 변덕은 단념을 부추긴다. 그래, 인생은 ‘삶의 고됨’을 참고 배기는 사람의 몫이다. 꽃동네에 다시 온 지 벌써 7년여(2012년). 지칠 법도 했지만 차민은 그대로였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영유아를 돌보고, 비누를 만들고, 사진을 찍었다. ‘삶의 고됨’을 용케 참아낸 대가인지, 차민에게도 기회가 찾아왔다. 사회적기업이었다. 

2012년 여름, 꽃동네에 종종 오던 한 지역팀 봉사회장이 차민에게 ‘깜짝제안’을 했다. “천연비누 제조법 알려줄 수 있겠어요?” 

이 지역팀은 특색이 있었다. 한마을에 사는 아이들을 위한 ‘공부방’을 부모가 갹출한 비용으로 운영하고 있었다. 교육과 복지, 마을을 한데 묶은 흥미로운 모델이었다. 

문제는 운영비였다. 갹출만으론 한계가 분명했다. 지역팀 봉사회장이 차민에게 러브콜을 보낸 이유였다. “차민씨, 천연비누로 수익사업을 펼쳤으면 해요. 그럼 우린 복지·교육·제조 기반의 ‘마을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을 거예요.” 

차민은 흥미를 느꼈다. 봉사회장이 종종 입에 담은 ‘마을기업’ ‘사회적기업’ 등 낯선 용어도 호기심을 자극했다. 차민은 비누공방·사진관 운영을 지인에게 맡기고, 그곳으로 내려갔다. 맡은 일은 마을기업의 기틀을 잡는 거였다. 마을 공부방에 천연비누사업을 덧대는 형식이었다.

마리에뜨가 입주한 경기중소기업성장지원센터 1층 로비. 천연디퓨저 등 마리에뜨 제품이 전시돼 있다. [사진=오상민 작가]
마리에뜨가 입주한 경기중소기업성장지원센터 1층 로비. 천연디퓨저 등 마리에뜨 제품이 전시돼 있다. [사진=오상민 작가]

더할 나위 없는 기회였다. 마을기업의 초석을 세우면서 사회적기업의 원론原論을 배울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청소년 미혼모를 위한 쉼터를 사업화할 수 있겠구나’란 확신을 얻었다.

용기를 북돋아주는 멘토들을 만난 것도 행운이었다. 
차민은 조금씩 자신의 지향점을 찾아갔다. “청소년 미혼모에게 쉼터를 제공하는 사회적기업을 만들겠다.” 그의 꿈은 점점 단단해지고 있었다.  

#8장. 창업과 모순 

2014년부터 차민은 수많은 육성사업에 ‘도전장’을 던졌다. 아이템은 청소년 미혼모와 아기들의 쉼터를 사회적기업 형태로 운영하는 거였다. 

반응은 기대와 달랐다. 따가운 질책이 잇따랐다. ‘애도 낳아보지 않은 사람이 무슨 미혼모 사업을 하느냐’는 이유에서였다. 차민에겐 명백한 모순이었지만 딱히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모순은 반박과 반론을 막는 ‘장벽’이었다.   

“이 길을 걸으면 꽃동네 시절이 생각나요. 생각도 정리되고요.” 양차민 대표는 종종 마리에뜨 안양 작업장 근처에 있는 숲길을 걷는다. 상념을 정리하기 위해서다. [사진=오상민 작가]
“이 길을 걸으면 꽃동네 시절이 생각나요. 생각도 정리되고요.” 양차민 대표는 종종 마리에뜨 안양 작업장 근처에 있는 숲길을 걷는다. 상념을 정리하기 위해서다. [사진=오상민 작가]

작은 열매가 맺힌 건 그로부터 2년이 훌쩍 흐른 2016년이었다. 숱한 실패 끝에 차민의 아이템은 ‘경기도 사회적기업가 육성사업’에 선정됐다. 자금을 지원받은 차민은 그해 5월 13일 마리에뜨를 설립했고, 미혼모 쉼터사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가시밭길은 끝나지 않았다. 쉼터 설립을 위한 밑자금이 좀체 모이지 않았다. 천연디퓨저·방향제를 제조해 판매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알음알음 올리는 수익으론 어림없었다. 

돈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미혼모 쉼터’의 운영을 차일피일 미루는 것도 걱정이었다. ‘집도 방도 없는데, 무슨 쉼터를 운영한다는 말인가’라는 비판이 갈수록 날카로워졌다. 절박한 마음으로 마리에뜨에 전화를 걸었다가 실망하는 미혼모도 늘어났다. 좋지 않은 신호였다.  

2017년 차민은 결단을 내렸다. 대출 5000만원을 받아 집 두채를 월세로 얻었다. 방이 두칸 딸린 집이었다. 크기는 작았지만 ‘잠깐의 쉼’이 절실했던 청소년 미혼모와 아기에겐 충분한 공간이었다. “집을 마련하자마자 일주일에 2~3통의 전화가 걸려왔어요. 대부분 청소년 미혼모였죠.” 
 
그렇다고 모든 문제가 풀린 건 아니었다. 쉼터는 쉼터였고, 현실은 현실이었다. 별 이유도 없이 죄인 취급을 받는 미혼모는 여전히 많았다. 버려지는 아기도 숱했다. 힘없는 엄마와 아기에게 세상은 잔인한 존재였다. 

양차민 대표의 아버지는 든든한 후원자다. 아버지는 “경기도 광주에 있는 물류창고에 마리에뜨 제품을 배송해주겠다”면서 직접 핸들을 잡았다.[사진=오상민 작가]
양차민 대표의 아버지는 든든한 후원자다. 아버지는 “경기도 광주에 있는 물류창고에 마리에뜨 제품을 배송해주겠다”면서 직접 핸들을 잡았다.[사진=오상민 작가]

#9장. 서글픈 악순환의 고리 

“애가 애를 뱄구먼” “조신하지 못해서” “가정교육을 어떻게 받았길래”. 대부분의 청소년 미혼모는 억울한 주홍글씨를 감내하며 산다. 

아기 아빠들에겐 비교적 관대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불공평하기 짝이 없지만 이게 현실이다. 가족과 인연을 끊은 채 음지로 숨는 미혼모가 많은 건 이 때문이다. 이들을 위해 여러 단체가 ‘쉼터’를 운영하는 것도 맥이 같다. 

하지만 이곳도 때론 불편하다. 어린 미혼모들이 예민하게 여기는 신상身上을 기록하는 경우가 많아서다. 번듯한 쉼터가 있음에도 미혼모들이 모텔·여관을 전전하는 이유다. 이 과정에서 재임신 가능성이 높아지는 건 서글픈 악순환이다.  

차민은 이런 현실을 납득할 수 없었다. 청소년 미혼모를 품겠다면서 왜 그들을 옥죄는 ‘기록물’을 만드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서류부터 없앴다. 청소년 미혼모가 찾아오면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집처럼 편한 공간을 선물하고 싶었다. 

마리에뜨의 쉼터에 있는 아이들 장난감. 뭉쳐 있기도, 흩어져 있기도 한 블럭의 모습이 미혼모의 어지러운 처지를 보여주는 듯하다. [사진=오상민 작가]
마리에뜨의 쉼터에 있는 아이들 장난감. 뭉쳐 있기도, 흩어져 있기도 한 블럭의 모습이 미혼모의 어지러운 처지를 보여주는 듯하다. [사진=오상민 작가]

그렇게 2년여, 마리에뜨를 찾아오는 청소년 미혼모는 한달에 10명 남짓으로 늘어났다. 절차와 규칙을 없앤 게 ‘신뢰’로 이어진 결과였다. 혹자는 ‘최소한의 규율과 서류가 필요하다’고 말하지만 규칙이 없는 게 ‘무질서’를 뜻하는 건 아니다. 

마리에뜨를 찾은 청소년 미혼모 중 상당수는 “또 올게요”라면서 고마움을 표한다. 잠깐 묵었더라도 방과 화장실을 깨끗하게 청소하는 미혼모도 생각보다 많다.

차민은 조용하게 입을 뗐다. “청소년 미혼모가 모두 문제아라는 인식은 고정관념입니다. 사회가 먼저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해요.” 

#10장. 풀지 못한 숙제들  

마리에뜨 사람들은 보금자리와 미혼모를 독특하게 부른다. 보금자리는 ‘숲’, 미혼모는 ‘별’이다. 어쩔 수 없이 희망을 버렸더라도 이곳에서 꿈을 함께 키워보자는 뜻이다. 

문제는 역시 ‘재원’이다. 쉼터엔 많은 비용이 투입될 수밖에 없다. 마리에뜨의 허약한 수익구조로는 미래를 담보하기 어렵다. 

쉼터를 ‘월세’로 운영해야 한다는 점도 고민거리다. 계약기간이 끝나면 집값 인상 등을 이유로 쉼터를 이리저리 옮겨야 할 가능성이 높아서다.[※ 참고: 실제로 안양에 있는 쉼터 2곳은 7월 중순 계약이 만료돼 이사를 준비하고 있다.] 

그럼에도 차민은 희망을 잃지 않는다. “판로를 넓히기 위해 수원시의 도움을 받아 자체 쇼핑몰을 만들었어요. 해외 바이어들도 만나고 있고요. 어려움이 있더라도 잘 극복해 낼 겁니다.”

3년 만에 찾아온 교희의 묘. 교희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양차민 대표를 반기는 듯 바람 한줄기가 불어온다. [사진=오상민 작가]
3년 만에 찾아온 교희의 묘. 교희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양차민 대표를 반기는 듯 바람 한줄기가 불어온다. [사진=오상민 작가]
‘2005년 1월 12일~5월 13일 오교희’ . 짧아도 너무 짧은 삶이었다. [사진=오상민 작가]
‘2005년 1월 12일~5월 13일 오교희’ . 짧아도 너무 짧은 삶이었다. [사진=오상민 작가]

하늘이 유난히도 파랗던 7월 초. 차민은 교희의 묘를 찾았다. 2016년 마리에뜨를 창업한 후 처음이었다. ‘자리 잡으면 다시 올게’라고 각오를 다진 지 3년 만이었다. 

그는 푯돌(묘비)을 정성스럽게 닦았다. ‘2005년 1월 12일~5월 13일 교희’라는 비문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4개월, 참 짧은 삶이었다. “딸, 엄마 왔어. 거긴 어떠니. 엄마는 첫걸음 잘 뗐단다.” 

차민이 언덕에 앉았다.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푯돌 옆에 홀로 핀 꽃이 속삭이는 듯했다. “엄마 힘내요.” 차민이 미소를 머금었다. 햇살이 눈부셨다. 별처럼 반짝였다. 
 
글=이윤찬 더스쿠프 기자  
chan4877@thescoop.co.kr 

사진=오상민 천막사진관 작가  
studiotent@naver.com

교희의 묘 옆엔 작은 풀꽃이 피어 있었다. 오랜만에 찾아온 양차민 대표를 반기는 듯했다. [사진=오상민 작가]
교희의 묘 옆엔 작은 풀꽃이 피어 있었다. 오랜만에 찾아온 양차민 대표를 반기는 듯했다. [사진=오상민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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