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등 켜진 한국 미래기술

 

‘기술력만은 우리가 1등이다.’ 알게 모르게 우리가 갖고 있는 자부심이다. 반도체, 이동통신, IT기술, 조선 등 관념적으로 우리가 ‘1등’이라고 알고 있는 기술도 수두룩하다. 과연 그럴까. 답은 충격적이다. 우리나라 기술력 가운데 ‘세계 1등’은 단 한 개도 없는 것으로 조사됐다. 미래기술에 비상등이 켜졌다.

조선, 디스플레이, 자동차, 반도체, 이동통신기술. 흔히 우리가 이야기하는 ‘대한민국 1등 기술’들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사실일까. 아쉽게도 답은 “그렇지 않다”이다. 미래창조과학부가 최근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과 함께 분석한 우리나라 과학기술 기본계획상의 10대 분야 120개 국가전략기술을 살펴본 결과, 그런 답이 나왔다.

[※참고| 10대 분야는 ①전자·정보·통신 ②의료 ③바이오 ④기계·제조·공정 ⑤에너지·자원·극한기술 ⑥항공·우주 ⑦환경·지구·해양 ⑧나노·소재 ⑨건설·교통 ⑩재난·재해·안전].

이번 조사는 한국·미국·유럽(EU)·일본·중국 등 주요 5개국의 기술수준과 격차를 평가한 것이다. 이 가운데 최고 기술국의 기술력을 100%로 보고, 다른 국가의 격차를 비교했다.

그 결과를 보면, 기술 최강국은 미국이었다. 친환경 사양기술 및 사료 개발기술(영국), 맞춤형 신재배기술, 환경친화 자동차 기술, 생산시스템 생산성 향상 기술, 고부가가치 선박기술(독일), 고효율 전지기술(일본), 열에너지 네트워크기술(독일), 폐자원 에너지화기술(독일), 풍력발전기술(영국) 등 23개 분야를 제외한 나머지 97개 분야에서 미국이 최고의 기술력을 갖춘 것으로 드러났다.

그다음은 13개 분야에서 최고 기술력을 입증받은 EU, 일본(최고기술분야 9개), 중국(1개) 순이다. 우리나라의 기술력은 단 1개 분야에서도 ‘최고’라는 평가를 받지 못했다. 특히 우리나라의 기술력 중 선도그룹은 37개로, 전체(120개)의 30.8%에 그쳤다. 추격그룹과 후발그룹에 속한 기술력은 각각 82개, 1개였다. 선도그룹은 기술 수준이 80%를 초과해 최고의 수준은 아니지만 각 분야를 선도하는 그룹에 속해 있다는 뜻이다. 추격그룹은 기술 수준이 60~80% 해당을 의미한다. 후발그룹은 40~60% 수준의 기술을 말한다.

 

최고 기술국 미국 대비 기술력 수준의 결과는 조금 달랐다. 78.4%를 기록한 우리나라는 EU(95.5%), 일본(93.1%)에 이어 4위에 올랐다. 69.7%에 그친 중국이 최하위를 기록했다. 5개 국가를 순위로 매기면 미국→EU→일본→한국→중국 순이다. 우리나라의 기술력은 기간으로 따지면 미국엔 4.4년, EU와 일본엔 각각 3.3년, 2.8년 뒤져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최근 한국을 바짝 추격하고 있는 중국엔 1.4년 정도 앞서 있다.

그렇다면 국내 기술력의 분야별 수준은 어떨까. 10대 분야 중 우리나라가 세계 최고 수준에 근접한 기술은 인간친화형 디스플레이 기술(91.2%·이하 미국 대비), 초정밀 디스플레이 공정 및 장비기술(90.8%), 스마트그리드 기술(90.3%)인 것으로 드러났다. 전자·정보·통신 분야의 기술력이 83.2%에 그친 건 아쉬운 대목이다. 반면 재해·재난·안전(73.0%)은 상대적으로 낮은 수준을 기록했다. 우리나라에 안전사고가 끊이지 않는 이유가 ‘통계적’으로 입증된 셈이다.

주목할 점은 국내 기술력이 ‘향상 추세’를 보이고 있다는 거다. 2년 전에 비해 전체 120개 분야 중 74개 분야에서 기술수준이 향상됐다. 수준이 높아진 기술은 전자·정보·통신 분야(13개), 에너지 자원·극한 기술 분야(14개) 등이었다.  먼저 전자·정보·통신 분야의 현주소를 살펴보자. 이 분야에는 미래성장동력산업에 해당하는 5세대 이동통신, 심해 해양플랜트, 스마트자동차, 지능형로봇, 웨어러블 스마트 디바이스, 실감형 콘텐트, 맞춤형 웰니스 케어, 재난안전관리 스마트 시스템, 신재생 에너지 하이브리드 시스템, 지능형 반도체, 융복합 소재, 지능형 사물인터넷, 빅데이터 등 기술이 집중돼 있다.

기술수준은 미국 대비 83.2%로 선도그룹에 속한다. 미국과의 기술격차는 2.7년이다. 예상만큼 ‘세계 최고 수준’은 아니지만 부정적인 결과도 아니다. 특히 데이터 분산처리 시스템 기술, 가상·증강현실 기술 등은 이전보다 기술수준이 가파르게 향상됐다.  최근 이슈를 끌고 있는 5세대 이동통신의 기술수준은 미국 대비 84.7%다. 미국과의 기술격차는 약 2년이다. 증강현실 등 실감형 콘텐트, 웨어러블 스마트디바이스도 각각 83.1%, 82.5%를 기록해, ‘선도기술력’으로 꼽혔다.

기술최강국으로 가는 길 만만치 않다. [사진=SK하이닉스제공]
기술최강국으로 가는 길 만만치 않다. [사진=SK하이닉스제공]

반면 사물인터넷 기술수준은 77.7%에 그쳐, 더 많은 연구·개발(R&D) 투자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사물인터넷 기술력이 미국을 쫓아가려면 약 4년 이상이 걸릴 전망이다.  우리나라가 IT 관련 분야에 못지않게 선도기술을 많이 보유하고 있는 분야는 에너지·자원·극한기술이다. 특히 스마트그리드기술, 환경친화형 고성능 전력수송기술, 고효율 전지기술, 열에너지 네트워크기술, 태양에너지 기술, 원자력 기술 등에서 비교적 선도적인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최근엔 차세대 가속기 기술 수준이 가파르게 향상되는 추세다.
 
2년 전에 비해 기술 수준이 7%나 향상됐고, 최고 기술국과의 격차는 1년 안팎으로 좁혀졌다. 차세대 가속기 기술은 포항 제4세대 방사성 가속기를 비롯해 현재 구축 사업이 진행중인 한국형 중이온 가속기에 적용된 기술들을 말한다.  이밖에 첨단플랜트 원천기술(건설교통·6.2% 상승), 고부가가치 선박기술(기계·제조·공정 분야·5.6% 상승) 등의 기술력이 가파르게 개선됐다. 지능형 물류체계 기술, 이산화탄소 포집·저장·이용기술, 지능형 무인 비행체기술은 추격그룹에서 선도그룹으로 새롭게 진입했다.

반면 초고집적 반도체 공정 및 장비 기술, 유전자 치료기술, 줄기세포치료기술, 스마트그리드기술, 첨단소재기술 등의 기술력 수준은 2년 전보다 퇴보한 것으로 드러나, 대책 마련이 시급할 것으로 보인다. 

이제 마지막 질문을 풀어야겠다. 기술력만은 최고라고 자부하던 우리나라엔 왜 ‘1등 기술’이 없는 걸까. 미래부 관계자는 “이번 국가전략기술 수준 평가는 1999년 이후 2년에 한번씩 진행, 지금까지 총 6번 평가를 실시했다”며 “여기에 나온 기술은 우리가 잘 하는 기술이 아니라 향후 5년간 집중 육성해야 하는 필요성이 있는 것들”이라고 강조했다.

다시 말해 기술수준 평가 결과를 반영해 R&D 전략을 마련하는 참고자료로 활용할 거라는 얘기다. 하지만 이런 주장에도 ‘1등 기술’이 없는 건 사실이다. 기술강국을 자부하던 우리나라로선 멋쩍은 결과임에 분명하다. 전문가들의 평가는 더 냉정하다. 익명을 원한 과학기술계 전문가는 이렇게 꼬집었다. “1등 기술은 없지만 우리나라의 기술력이 선도그룹에 속한 건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건 이마저도 긍정적으로 봐선 곤란하다는 거다. 원천기술을 얼마나 보유하고 있느냐가 중요한 데, 이 자료에는 그게 없다.”

다른 전문가는 “국가전략기술 평가는 미래의 잠재력을 가늠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는 만큼 실증적인 가치를 가지려면 산업 내에서 우위가 있는 기술과 그렇지 않은 기술을 분석해야 한다”고 말했다. 중장기적 관점에서 꾸준하면서도 구체적으로 분석·검증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분석내용과 항목이 변하는 것도 문제다. 기업이 국가와 진지한 파트너십을 맺고 R&D에 집중하기 어렵다는 볼멘소리가 나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익명을 원한 재계 관계자는 “국가의 기술력은 장기플랜을 토대로 진행하는 작업인 만큼 일관성 있고 긴 안목에서 안정적으로 진행돼야 한다”며 “그래야 국가플랜이 서고, 기업도 장기적 관점에서 R&D 계획을 짤 수 있다”고 말했다. 언젠가 우리는 ‘기술최강국’이라며 샴페인을 터뜨렸다. 하지만 축제는 벌써 끝났고, 과제만 수두룩하게 남았다. ‘기술최강국’으로 가는 길, 그리 만만치 않다. 장기플랜, 그게 필요하다. 

김은경 더스쿠프 기자
kekisa@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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