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스쿠프 전쟁과 문학 53편
「2차 세계대전의 민중사」
연합국과 주축국의 2차 대전
선과 악의 전쟁이란 프레임
독재세력들과 손잡은 연합국 
포장된 전쟁 속 가려진 진실
불의 맞선 민중 짓밟은 전쟁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제2차 세계대전의 이미지는 고정돼 있다. 연합국들은 런던의 전몰장병 기념비 같은 공공기념물을 세워 승리를 기억하고, ‘밴드 오브 브라더스’ 같은 TV 시리즈와 영화에서 나치와 군국주의 일본에 맞서 승리한 사실을 끊임없이 재구성한다.

2차 세계대전은 과연 정의로운 전쟁이었을까.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한 장면.[사진 | 더스쿠프 포토]
2차 세계대전은 과연 정의로운 전쟁이었을까.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한 장면.[사진 | 더스쿠프 포토]

지금까지 제작된 전쟁 영화의 거의 절반은 2차 세계대전을 다루고 있다. 영국 역사학자 도니 글룩스타인은 이런 전형적인 기억에 의문을 제기한다. 2차 대전은 어떤 전쟁보다도 민간인의 피해가 컸다. 이를테면 중국의 민간인 사망자는 제1차 세계대전의 영국ㆍ프랑스ㆍ독일의 사상자를 모두 합친 것보다도 많았다. 

그런데도 이런 사실은 별로 주목받지 않는다. 전쟁 중 대다수 독일인이 히틀러를 지지한 것은 사실이지만, 독일인 중 300만명이 히틀러에 반대하다가 정치범으로 몰린 사실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그저 영국ㆍ미국ㆍ소련 등 ‘선한’ 연합국이 ‘악당 국가’인 독일과 일본을 물리치고 정의가 승리한 전쟁으로만 기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도니 글룩스타인은 자신의 저서 「2차 세계대전의 민중사(오월의봄ㆍ2021년)」에서 2차 대전의 전형적인 기억에 반론을 펼친다. 이 책에서 글룩스타인은 ‘평행 전쟁’이라는 개념으로 2차 대전을 새롭게 설명한다. 2차 대전은 연합국과 추축국(독일ㆍ일본ㆍ이탈리아 등 연합국에 맞서 싸운 국가들)이 치열하게 다툰 제국들의 전쟁인 동시에 파시즘과 야만, 압제, 독재 정권에 맞서 민중이 수행한 ‘민중전쟁’이기도 했다. 

글룩스타인은 연합국이 민주주의를 지키려고 파시즘에 맞서 싸웠다는 신화를 반박한다. 연합국들은 파시즘이 발흥하던 때에 방관했고, 추축국이 자국의 이익을 위협하자 비로소 움직였다. 연합국의 목표는 오직 자국의 욕심을 채우는 데 있었다. 

1945년 승전한 이후 미국은 나치가 몰락한 뒤 독일에서 생긴 100여개의 자치권력단체들을 무시하고 나치의 잔존세력을 그대로 방치했다. 전쟁 초반 독일과 함께 폴란드를 침공했던 소련군은 종전 무렵 나치에 맞서 봉기를 일으킨 바르샤바 시민들을 고의적으로 외면해 나치의 학살을 방치했다.

소련군은 저항조직이 무너진 폴란드를 쉽게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소련은 대외적으로 동유럽을 ‘해방’시켰다고 선전했지만, 실제로는 동유럽 국가들을 위성국가로 만들어 서방과의 냉전에서 방어벽으로 활용했다.

나치의 점령은 그에 맞선 저항을 불렀는데, 저항에 나선 각국의 민중은 나치에 맞서 저항하면서 사회의 질서를 바꾸려는 염원도 갖고 있었다. 연합국은 그런 염원을 결코 반기지 않았다. 그리스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발칸반도의 끝에 위치한 그리스는 중동과 인도를 향하는 중간 루트였고 소련ㆍ영국ㆍ프랑스ㆍ오스트리아ㆍ독일ㆍ오스만 제국의 이해가 첨예하게 엇갈리는 지역이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수에즈 운하의 안전과 중동의 석유, 아시아의 자원 확보에 협조하는 그리스의 파시스트 정권을 묵인했다.

그리스의 파시스트 독재자 이오아니스 메탁사스(1871~1941년) 장군은 약 5만명의 국민을 구금하고 구타와 고문을 자행했다. 그리스는 파시스트 국가임에도 2차 대전 때 이탈리아가 침공해오자 연합국 편에 섰다. 

영국의 윌슨 장군은 파시스트 정부에 맞서 다른 파시스트 정부를 지원하는 상황을 두고 명백한 역설이라고 탄식했다. 나치의 점령 기간 그리스는 인구의 8% 이상이 사망하는 피해를 입었다. 저항조직(레지스탕스)을 결성한 그리스 민중들은 나치에 맞서 싸우면서 종전 이후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열망을 갖고 있었다

1944년 12월, 그리스를 해방시킨 영국군은 기갑부대를 동원해 나치와 싸운 그리스 저항조직들을 소탕했다. 이 과정에서 영국은 그리스 저항조직을 잘 아는 나치의 도움을 받았다. 이것은 영국이 소련과 맺은 ‘퍼센트 협정(percentages agreement)’ 때문이었다.

1944년 6월 소련군이 ‘바그라티온 공세’의 성공으로 독일 중부집단군을 몰아내고 동유럽에 들어오자 다급해진 처칠은 소련과 약소국들의 지분을 조정하는 협상을 벌였다. 

두 국가는 그리스에서 영국이 90%의 지분을 갖는 대신 루마니아에서 소련 지분을 100%로 인정했고, 유고슬라비아와 헝가리는 절반씩, 불가리아에서는 소련이 75%, 영국이 25%의 지분을 갖기로 협의했다. 이 협정으로 동유럽과 발칸반도 국가들의 운명이 결정됐고, 나치에 맞서 싸웠던 민중들의 열망은 허망하게 무너졌다.

독일이 항복했을 때도 연합국은 ‘질서 유지’를 위해 나치 잔존세력과 협력하는 방안을 선호했다. 독일에서 나치 전범 처벌은 알려진 것처럼 철저하지 않았다. 이것은 훗날 독일에서 ‘68혁명’이 일어나는 중요한 요인이 됐다.

아시아에서 인도네시아인들은 독립을 쟁취하고자 일본군과 싸웠지만, 종전 후에 식민 지배를 지속하려는 영국ㆍ네덜란드와 싸워야 했고, 베트남 민중들도 일본군을 몰아낸 후 프랑스와 전쟁을 벌였다. 전쟁 내내 소련ㆍ미국과 협력한 중국은 일본이 항복한 후 바로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에 내전이 이어졌다. 미국과 소련은 각각 국민당과 공산당을 지원하며 대리전을 펼쳤다.

그리스는 파시스트 대통령이 지배했지만, 연합군 편에 섰다. 그리스 레지스탕스 조직원들.[사진 | 위키미디어 제공]
그리스는 파시스트 대통령이 지배했지만, 연합군 편에 섰다. 그리스 레지스탕스 조직원들.[사진 | 위키미디어 제공]

글룩스타인은 흔히 알려진 ‘정의로운 전쟁’으로 포장된 2차 대전의 허상을 비판한다. 공식적인 역사는 ‘나치즘과 파시즘을 파괴한 좋은 전쟁’으로 기록하지만, 그 이면에는 민중들의 끈질긴 투쟁이 있었다.

열강의 지배자들이 자기들만의 이익을 냉소적으로 추구하는 동안 그 주민들의 다수는 매우 다른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평범한 병사들, 레지스탕스 전사들과 민간인들은 ‘더 좋은 세상’을 위해 싸웠다. 글룩스타인은 그들의 싸움을 기록하면서 영웅담으로 가득한 전쟁의 기억에 균열을 낸다. 

이 책은 한반도를 다루지 않았지만 우리의 역사를 다시 돌아보게 한다. 일본이 패망한 후 친일파는 대부분 살아남았다. 반면 목숨을 걸고 더 좋은 세상을 위해 싸웠던 사람들의 꿈은 처절하게 무너졌다. 그리고 우리는 분단과 참혹한 내전을 겪었다. 그것은 우리의 선택이 아니었다. 이 책에서 다룬 폴란드ㆍ그리스ㆍ유고슬라비아ㆍ인도네시아ㆍ베트남의 사례는 낯선 타자의 역사가 아니다. 

이정현 평론가  | 더스쿠프 
21cbach@naver.com

 

저작권자 © 더스쿠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