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가트너 하이프사이클의 잠언

신新기술의 미래는 늘 거창하다. 그런데 막상 쓰면 기대만큼의 놀라움은 없다. 관심은 급격히 식고 투자는 시들해진다. 수많은 신기술이 꽃을 피우지 못하고 사라지는 이유다. 인공지능(AI), 사물인터넷(IoT), 블록체인 등 4차 산업혁명 기술들은 어떤 과정을 밟을까. 더스쿠프(The SCOOP)가 신기술의 생애주기를 그려낸 ‘가트너 2018 하이프사이클’ 보고서를 분석했다. 4차 산업혁명 신기술의 민낯이 보였다.

가트너의 하이프사이클은 기술의 기대와 발전 속도를 잘 보여주는 그래프다.[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가트너의 하이프사이클은 기술의 기대와 발전 속도를 잘 보여주는 그래프다.[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 2000년대 중반, 디스플레이 업계의 화두는 ‘전자종이(Electronic paper)’였다. 수백만개의 초소형 캡슐로 된 전자잉크에 전기가 가해지면 흰색과 검은색으로 변하는 신통한 기술이었다. 소재 자체가 종이처럼 얇아 둘둘 말아서 갖고 다닐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원하는 대로 쓰고 지우기를 반복할 수 있었다. 삼성전자, LG전자 등 국내 IT기업도 이 시장에 뛰어들었다. 때마침 전자책 시장이 태동하던 시점. 종이책에서 느낄 수 있던 잉크의 정겨움이 있는 이 기술을 두고 미디어는 “종이의 훌륭한 대체품”이 될 거라 전망했다.

# 2000년 마이크로소프트(MS)가 태블릿PC를 처음 시장에 내놨을 때 사람들은 열광했다. 뛰어난 이동성과 범용성을 갖췄기 때문이다. 빌 게이츠는 “5년 내 태블릿PC가 북미에서 팔리는 가장 흔한 형태일 것”이라고 장담했다. 곧 노트북을 대체할 거란 미디어의 장밋빛 전망도 함께 쏟아졌다.

두 제품의 현재 위상은 기대치를 한참 밑돈다. 전자종이는 색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휘어지는 디스플레이의 대체재 OLED가 준비되고 있다는 이유로 관심이 시들하다. 태블릿PC는 노트북보다 성능이, 스마트폰보다 휴대성이 떨어지는 점 때문에 폭발적인 인기를 끌지 못했다. 지금은 혁신제품이 아닌 노트북의 보완품으로만 여겨진다.

전자종이와 태블릿PC에서 보듯, 유망 신기술은 ‘비슷한 흥망성쇠’를 그린다. 먼저 세상을 뜨겁게 달군다. 2013년 구글 딥마인드의 인공지능(AI) 알파고가 세계 바둑 챔피언 이세돌 9단에게 이겼을 때, 블록체인 기술을 도입한 비트코인의 가격이 2600만원을 넘어섰을 때 등이 대표적 예다. 하지만 뜨거운 열기는 금세 싸늘해진다. 대중들의 높아진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경우가 숱해서다. 실제로 전지전능함으로 포장됐던 AI는 스마트폰ㆍ에어컨 등 가전기기의 특정 영역에서만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비트코인은 700만원대로 뚝 떨어졌다.

전자종이와 태블릿PC의 몰락

신기술에 몰린 관심이 꾸준하지 못한 이유는 뭘까. 김상욱 충북대(경영정보학) 교수의 설명이다. “신기술이 그리는 청사진은 늘 밝다. 가능성도 풍부하다. 미디어가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쓰면, 대중의 관심도 몰린다. 하지만 기술의 성숙과 이를 기대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의 시점은 다르다. 대중들은 기대만큼의 성과가 없다면 금세 죽은 시장 취급을 한다.”

이를 잘 표현한 그래프가 있다. 바로 가트너의 ‘하이프사이클 그래프(이하 하이프사이클)’이다. 가트너가 2000여개의 기술 중 유망기술 30여개를 추려 만든 이 그래프는 관심도와 발전 전망을 한눈에 보여준다. 가로축은 ‘시간’이고, 세로축은 ‘시장의 기대’다. 

하이프사이클은 첨단기술을 총 5단계로 분류한다. 1단계는 ‘기술 방아쇠(Techno logy trigger)’다. 여기에 속한 기술들은 여전히 연구개발 단계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 2단계는 ‘기대의 정점(Peak of inflated expectations)’이다. 각종 미디어로부터 하늘 높은 기대치를 받는 시기다. 

한껏 부상한 만큼 추락할 때는 후유증이 크다. 3단계는 ‘환멸의 계곡(Trough of disillusionment)’이다. 여기에 도달한 기술은 출시 제품이 많지 않은 탓에 대중의 관심이 급격하게 식는다. 꽤 많은 기업들이 이 단계에서 투자를 받지 못해 시장에서 나가떨어진다.

간신히 환멸의 계곡을 넘은 기술은 4단계인 ‘계몽의 언덕(Slope of enlightenment)’에 다다른다. 이때 기업들은 향상된 기술로 2ㆍ3세대 제품을 내놓는다. 마지막 5단계는 ‘생산 안정기(Plateau of productivity)’다. 기술이 대중적으로 쓰이는 단계다.

자! 이제 실제 사례를 대입해보자. 가트너가 지난 8월 공개한 ‘2018 하이프사이클 보고서’에 따르면 ‘4차 산업혁명의 총아’라면서 미디어가 주목했던 수많은 기술 대부분은 3단계인 환멸의 계곡을 넘지 못했다. 블록체인, 스마트섬유, 증강현실(AR) 등이 대표적 사례다. 심지어 AI 분야의 혁명 ‘딥러닝’은 2단계(기대의 정점)에 머물러 있었다. 기업들이 “딥러닝 기반 기술을 개발했다”는 보도자료를 쏟아내고 있는데도 말이다. 실제로 “딥러닝은 아직 시장을 재편할 정도로 인기를 누리는 서비스인 ‘킬러 애플리케이션’이 없다”는 게 업계의 공통 주장이다. 

최근 아파트 분양 광고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스마트홈’ 역시 환멸의 계곡을 넘지 못했다. AI 스피커의 보급으로 “스마트홈 시대가 열렸다”는 기사가 쏟아지지만, 실상은 다른 셈이다. 통신사의 한 관계자의 말을 들어보자. “진정한 스마트홈은 단일제품이 아니라 다양한 가전제품이 서로 연결돼야 한다. 필수 생활가전제품 전반에 걸쳐 사물인터넷(IoT) 솔루션이 필요하다. 하지만 아직 이 시스템을 제대로 구축할 수 있는 기업은 없다. 건설사, AI 스피커 제조사, 가전제품 제조사가 제각각의 기준을 내세우고 있는 게 현실이다.” 

버블 속 기술은 허상 

이런 한계에도 기업들은 ‘4차 산업혁명’이라는 신통한 마케팅 용어를 가만 놔두지 않을 게 분명하다. 신기술엔 온갖 과장이 붙을 거고, 미디어는 그 기대를 한껏 부풀릴 것이다. 가깝게는 닷컴버블 때 그랬다. 인터넷이 세상의 모든 것을 변화시킬 것이란 전망이 어느 정도 적중했음에도 닷컴 신화엔 ‘버블’이란 오명이 붙었다. 기업들의 과장과 투자자들의 지나친 기대가 만들어낸 괴물이었다.

신기술의 성장 과정은 비슷하다. 일단 추앙을 받고, 그 추앙은 버블을 만들어낸다. 이 버블은 허상이다. 신기술이 일상생활에 적용될지는 버블이 꺼져 민낯이 드러나는 ‘환멸의 계곡’을 넘어서야 알 수 있다. “AI, 블록체인, VR 등 신기술에 냉정하라.” 가트너의 하이프사이클 보고서가 제시하는 잠언箴言이다. 
김다린 더스쿠프 기자 quill@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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