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품귀현상에 애먹는 車업계
팹리스는 늘고 파운드리는 한정돼
점점 복잡해지는 반도체 제조공정

반도체 업계는 설계기업과 제조기업이 구분돼 있다. 설계기업은 공장이 없다는 뜻에서 ‘팹리스(fabless)’, 제조기업은 뭔가를 주조鑄造한다는 의미에서 ‘파운드리(foundry)’라고 부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설계는 브레인으로 통했고, 제조는 하청업체처럼 여겨졌다.

최근 분위기는 다르다. 파운드리 업계에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지고 있다. 설계를 하려는 기업은 많은 반면 제조를 할 수 있는 기업은 한정적이어서다. ‘10억분의 1m(1나노미터)’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주조업체를 단기간에 만들 수 없다는 점에서 파운드리의 위상은 더 강해질 가능성이 높다. 각종 미디어에서 파운드리 업계의 양대산맥인 TSMC와 삼성전자를 심도 있게 다루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더스쿠프가 1㎚의 미학, 파운드리의 세계를 들여다봤다.

 

차량용 반도체 품귀현상으로 글로벌 반도체 제조사들이 생산 일정에 차질을 빚고 있다.[사진=뉴시스]
차량용 반도체 품귀현상으로 글로벌 반도체 제조사들이 생산 일정에 차질을 빚고 있다.[사진=뉴시스]

내연기관차를 만드는 데 필요한 부품은 3만여개다. 반도체는 200~400개가 들어간다. 이처럼 자동차 부품 중 반도체가 차지하는 비율은 생각만큼 높지 않다. 하지만 글로벌 자동차 업계는 최근 반도체 때문에 애를 먹고 있다. 폭스바겐ㆍ포드ㆍ도요타ㆍ테슬라ㆍ제너럴모터스(GM) 등 내로라하는 글로벌 제조사들도 반도체 수급 문제로 생산에 제동이 걸렸다. 

이유는 별다른 게 아니다. 차량용 반도체 품귀현상 탓이다. 지난해 코로나19로 자동차 판매량이 부진하자 제조사들이 반도체 주문량을 대폭 줄였는데, 최근 수요가 되살아나면서 차량용 반도체가 귀해진 것이다.

이런 반도체 품귀현상은 자동차 업계로선 달갑지 않다. 반대로 반도체 업계엔 이보다 반가운 일이 없다. 특히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ㆍfoundry) 업계는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다. [※참고 : 파운드리는 설계전문 기업(팹리스ㆍfabless)으로부터 반도체 설계도를 받아서 대신 생산을 해주는 걸 말한다.]

파운드리 업계에 일감이 쏟아지는 이유는 간단하다. 차량용 반도체는 마이크로 컨트롤 유닛(MCU), 센서, 구동IC, 전원IC 등 종류가 다양하고, 이를 설계하는 기업들도 숱하다. 하지만 이런 반도체를 도맡아 생산할 수 있는 파운드리 업체는 대만의 TSMC와 UMC, 중국 SMIC, 삼성전자, DB하이텍 등으로 한정적이다. 

더구나 파운드리 업체가 필요한 건 자동차 업계만이 아니다. 파운드리 업계 관계자는 “코로나 특수, 5G 시장 확대 등 호재성 이슈가 맞물리면서 서버ㆍ스마트폰ㆍPC용 반도체 주문이 쏟아지고 있다”면서 “차량용 반도체를 비롯한 일부 품목은 공장을 100% 가동해도 주문량을 모두 소화하지 못할 정도”라고 설명했다. 


 

중요한 건 파운드리 업계에 찾아온 호황이 단기에 그칠 가능성이 적다는 점이다. 시장조사기관 옴디아는 2021~2024년 세계 파운드리 시장이 연간 8~9%씩 성장할 것으로 내다봤는데,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다. 인공지능(AI), 5G, 미래차 등 차세대 산업으로 넘어갈수록 반도체의 종류가 다양해지고, 쓰임새가 커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업계 관계자는 “현재는 자동차에 200~500개의 반도체가 탑재되고 있지만 앞으로 나올 자율주행차에는 최소 1000개 이상의 반도체가 필요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파운드리 업계가 호황을 누릴 거란 근거는 이뿐만이 아니다. 마이크로소프트(MS), 애플, 구글, 아마존 등 글로벌 IT공룡들이 꾀하고 있는 변화도 주목해야 한다. 이들 기업은 그동안 전문 반도체기업이 설계ㆍ생산한 제품을 사용해왔다. 하지만 최근 들어 반도체를 자체 설계하겠다는 곳이 부쩍 늘어났다. 이는 반도체 설계를 전문으로 하는 팹리스에는 악재일 수 있지만 파운드리 업체엔 되레 호재로 작용할 공산이 크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특정 기능에 특화된 반도체 수요가 늘어날 거란 시그널”이라면서 이렇게 설명했다. “시스템 반도체의 기능이 점차 다양해지고 있다. 그만큼 불필요한 기능도 많다. 통상 팹리스나 종합반도체기업들은 채산성 때문에 특화된 반도체보단 표준화된 반도체를 만든다. 하지만 점차 특정 서비스나 제품에 최적화된 반도체를 필요로 하는 곳이 늘고 있고, 그 과정에서 반도체를 자체적으로 설계하는 기업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 기업이 반도체를 설계할 순 있어도 생산할 능력은 없다. 결국 파운드리 시장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반도체가 갈수록 작아지고 복잡해진 것도 파운드리 업계엔 유리한 환경이다. 예컨대 현재 파운드리 업체들이 다루는 단위는 ‘나노미터(㎚)’다. 1㎚를 미터(m)로 환산하면 10억분의 1m다. 반도체 회로를 1㎚라도 더 미세하게 그릴 수 있느냐에 따라 파운드리의 경쟁력이 갈린다. 실제로 현재 5㎚ 공정을 개발하는 데 성공한 파운드리 업체는 TSMC와 삼성전자뿐이다. 

업계 한 관계자는 “제조공정이 복잡하고 미세할수록 생산 능력을 갖추거나 투자 여력이 있는 파운드리 기업이 한정적”이라면서 “갈수록 신규 업체는 나오기 힘들고, 기존 파운드리 업체의 경쟁력은 높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1월 세계 1위 종합반도체기업(IDM) 인텔이 오랜 고민 끝에 반도체 위탁생산을 결정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제조역량이 떨어졌는데도 자체 생산을 고집하다가 수개월간 신제품을 출시하지 못하는 우를 범했기 때문이다. 시장조사기관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인텔은 전체 반도체 생산량 중 15~20%에 해당하는 물량을 우선적으로 위탁했다. 이런 위탁생산물량은 갈수록 늘어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파운드리 시장으로 유입되는 인텔의 생산물량이 늘어날 공산이 크다는 건 파운드리 업체들로선 호재 중의 호재다. 

김양팽 연구위원의 말을 들어보자. “더 이상 팹리스의 하청업체 취급받던 파운드리가 아니다. 이젠 파운드리의 능력에 따라 반도체 성능이 좌우된다. 반도체 시장은 더 커지고 파운드리 업체엔 더 많은 일이 몰릴 거다. 더구나 파운드리는 수급리스크가 적다는 강점도 있다. 선주문을 받아 생산하기 때문이다. 포트폴리오가 다양해 전방산업의 시황 변화에도 쉽게 휘둘리지 않는다. 가령, 통신칩 수요가 줄어도 CPU나 GPU 수요가 대체할 수 있다. 메모리반도체나 팹리스에 비해 안정성이 높고 리스크 관리가 뛰어나다는 얘기다.” 

메모리반도체 절대 강자 삼성전자가 파운드리 시장에 새로운 도전장을 낸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바야흐로 파운드리 전성시대가 열렸다.

고준영 더스쿠프 기자
shamandn2@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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