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감은 풍신수길 “조선서 철병하라”
다시 읽는 이순신공세가 119
풍신수길이 63세를 일기로 잠이 들었다. 그는 죽기 직전 “조선에서 철병할 것”이라는 유언을 남겼고, 부전수가(한산도), 가등청정(울산), 흑전장정(양산) 등은 진을 거둬 일본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소서행장은 달랐다. 수로는 이순신이, 육로는 명나라 장수 유정이 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1598년 봄 벚꽃이 필 때 온종일 잔치를 벌인 풍신수길은 그날 밤 사이에 병이 나서 복견궁伏見宮 도산전桃山殿에 누웠다. 그런데 병세가 점점 깊어갔다. 그해 8월 17일 풍신수길은 덕천가강, 전전리가를 병실로 불러들여 마지막 유언으로 어린 관백의 장래를 부탁했다. 아울러 조선의 원정군을 그만 불러들이라고 말하더니 그 이튿날 8월 18일 세상을 떴다. 나이 63세였다. 풍신수길이 죽은 뒤에 존호는 풍국대명신豊國大明神이라고 하였다.
풍신수길의 유언을 받든 5대로 3중로의 무리는 조선 출정군을 불러들였다. ‘철병하라’는 관백의 명령을 전달하러 조선으로 향한 이는 덕영수창德永壽昌, 궁본풍성宮本豊盛 두사람이었다. 이후 부산의 대장 금오수추가 진을 거뒀다. 부전수가(한산도), 가등청정(울산), 흑전장정(양산) 등도 진을 거둬 일본으로 들어갔다.
어쩔 수 없이 소서행장은 유정의 진에 사자를 보내 강화를 청했다. 이것은 유정의 가려운 곳을 긁어 주는 것과 같았다. 유정은 소서행장이 만든 성을 좀처럼 치지 못했다. 성이 험고하고 지형이 높은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풍신수길의 죽음, 그리고 철병
그래서 소서행장을 유인해 공격하려 했는데, 그가 강화를 요청해 온 거였다. 당연히 유정은 진린, 이순신과 연계해 소서행장의 무리를 격파할 게획을 세웠다. 이때는 1598년 9월 15일이었다. 이순신의 함대는 진린의 함대와 합하여 고금도를 떠났다.
소서행장의 군사를 순천의 유정과 합력하여 수륙으로 협공할 계획이었다. 이순신은 소서행장의 무리를 격파하고, 사천과 한산도를 회복한 뒤 부산, 울산의 적을 섬멸하여 남조선 일대를 회복할 심산이었다. 그리하여 이순신의 함대는 선봉이 되어 진린의 함대를 뒤에 달고 순천 소서행장의 왜교를 향하여 쳐들어갔다.
유정의 계획을 모르는 소서행장은 일본 보도 한쌍을 봉해서 군사 100기만 이끌고 진밖에 나왔다. 이전부터 안면이 있는 전라감사 황신이 유정의 부하 장수 왕지한王之翰과 함께 와서 소서행장을 맞았다.
소서행장은 황신의 일행을 따라 나서자 유정이 3000군을 거느리고 좌우익을 벌리고 몰아온다. 이를 본 소서행장은 회군을 하는데, 노변에서 비둘기 30여 마리가 튕겨 날아가며 좌우에서 복병이 일어났다. 유정의 군호였다. 소서행장은 급히 달려 성 안으로 들어가고 미처 들어가지 못한 군사는 유정의 군사에 도살당했다. 유정은 그런 뒤 성을 에워쌌다.
이순신은 군량미 수천석을 쌓아놓은 소서행장의 창고를 풍우처럼 들어와서 군량미는 탈취하고 창고에는 불을 질렀다. 이로부터 왜교의 적진에는 군량이 떨어졌다. 22일 싸움에는 이순신이 진린의 함대와 더불어 적의 병선을 30여척이나 격파하여 태워버렸다.
이 싸움 도중 명나라의 유격장군 복일승이 왼팔뚝에 총을 맞고 명병 11명이 전사하였다. 조선 측에도 지세포만호와 옥포만호가 총을 맞았으나 중상은 아니었다.
소서행장과의 마지막 일전
이러던 중 썰물 때가 됐다. 때문에 판옥대맹선들이 더 이상 접근할 수 없었다. 이순신 등 수군으로선 사리 때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이때 소서행장의 군사는 종의지, 모리민부 등의 군사와 합하여 이순신에게 대항하려 했다. 하지만 큰 손해만 입고 군사가 많이 죽었다. 썰물이기 때문에 이순신의 함대는 성의 북쪽까지 못 들어왔지만 유정의 육군은 달랐다. 오두거五頭炬라는 횃불을 가지고 쫓아와서 성을 치고 불을 끄고 물러가기를 밤새도록 하면서 소서행장의 군사를 괴롭혔다.
이튿날 새벽 조수 때 이순신의 병선이 성의 북쪽 개울로 들어가 소서행장의 군사와 싸우다가 조수가 빠질 때에는 물러갔다. 소서행장은 이순신의 병선이 또 밤을 타서 들어올까 염려하여 성북 개울 위로 토성을 쌓는 등 수군의 공략을 방비했다. <다음호에 계속>
정리 | 이남석 더스쿠프 발행인 겸 대표 cvo@thescoop.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