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쓸모를 입증하기 위한 강박 : 급식노동자의 눈물 [노동의 표정]
더스쿠프 텍스트 속 노동의 표정 제2편 조혜영 「그 길이 불편하다」 우리가 모르는 급식노동자의 애환 기계를 닮으려는 신종 직업병 노동자 문학상마저 오염된 현실
요령이 없으면 버티기 힘들다. 힘으로만 할 수 있는 노동도 아니다. 그래도 버텨야 한다. 어쩌면 노동은 강박이다. 조혜영 시인이 올해 출간한 「그 길이 불편하다」엔 우리가 잘 모르는 급식 노동자의 애환이 담겨 있다.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기 위해 쉬지 않고 움직여야 하는 현대인의 강박을 급식 노동자의 삶에 빗대 풀어낸 듯하다. 문제는 이런 노동자의 가치를 존중하지 않는 이들이 숱하단 거다.
며칠 전에 회의가 있어서 만화영상진흥원에 들렀다. 회의 시간보다 2시간 일찍 도착한 터라 몸 둘 곳을 찾았다. 카페에 가볼까, 밥을 먹을까, 고민하다가 야채 크로켓, 도토리묵 냉채, 제육볶음, 상추가 메뉴로 나오는 구내식당에 가기로 했다. 그 후, 표를 끊은 다음 배식판에 음식을 담아 먹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수백명이 먹는 이 식사를 누가 만드는지, 밥을 만드는 급식노동자들은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 궁금해졌다. 나로서는 알 길이 없기에 추측만을 남발하며 목구멍으로 밥을 넘겼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그런데 어느날 급식노동자의 삶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 몇주 전 「그 길이 불편하다(푸른사상· 2024년)」를 출간한 조혜영 시인의 시집을 접한 이후다. 이 시집은 30년 동안 급식노동자로 견뎠던, 노동자의 시간을 담고 있다.
그러니까 시인은 오랜 시간 급식노동자로 일하면서 느꼈던 복잡한 감정을 ‘시詩’라는 형식으로 재현한 것이다. 그러니 최근 그녀의 시집을 읽고 난 후, 급식을 먹을 때마다 식당 주방에서 일하는 “급식 선생님”들을 생각하게 됐다. 그렇다면 이 시집에서 그려지는 노동의 모습은 어떨까.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시를 직접 읽어보자.
요령이 없으면 가당치 않은 일이지
힘으로만 할 수 없는 중노동이지
눈치가 없으면 버틸 수 없지
눈치를 터득하기엔 여유가 없지
노동의 가치를 생각한다는 건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일이지
어떤 이는 하루 이틀 일하다 그만두고
어떤 이는 일주일 버티다 고참과 싸우고 그만두고
어떤 이는 모질게 3개월 버티다 사라지기도 하는
학교 급식실
‘급식 일지-급식 노동자’ 中 일부
이처럼 학교 급식 일을 하는 노동자들은 “아픈 몸뚱이(급식 일지-산재 판정·이하 시 제목)”를 달고 살아가야 한다. 요령과 눈치가 없으면 버틸 수 없다.
하지만 요령을 쌓을 시간도, 눈치를 볼 시간도 없다. 여유가 없으니 그렇다. 이들은 빨리 지치고 빨리 쓰러진다. 하지만 배식 시간이 다가오면 지친 몸을 일으켜 어린 친구들 앞에 서야 한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아이들 이름까지 불러주며/ 어르고 달래어 싫어하는 반찬까지 죄다(급식 일지-좋다)” 먹이기 위해서다.
시인은 자신이 일하는 이곳이 “급식 노동자 1명이 150명의 음식을 만드는 배치 기준”인데도 “공공기관이나 다른 기관에서는 70명이 기준인데/1000명의 밥을 6~7명이 만든다”고 고백한다. 수치가 모든 것을 설명해 주지는 않겠지만, 학교 급식실 노동자의 어깨가 닳고 닳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직감할 수 있다.
시인은 이런 고된 과정을 “절임 배추처럼 주저앉는다(급식 일지-산재 판정)”고 표현한다. 이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급식을 먹을 때마다 숟가락을 쉽게 들 수 없을 것 같다.
이 시집에서 눈길이 갔던 장면이 있다. 노동을 ‘불안’과 연결한 지점이다. 일하지 않으면 불안하다는 것이다. “병실에 누워 치료” 받을 때도 불안하고, “편하게 누워 밥을 먹는 것”조차 불안하다. 그래서 그녀는 이런 불안을 “신종 직업병”이라고 부른다. 몸이 “기계처럼 돌아가야 안심”하는 아이러니한 삶의 모습을 듣고 있으니, 이곳에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된다.
휴식을 “불안(급식 일지-신종 직업병)”으로 느끼며 살아가는 삶은 어떤 삶일까. 여기서 불안의 요소를 급식 노동자들에게만 한정할 필요는 없다.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기 위해 쉬지 않고 움직여야 하는 강박은 현시대 노동자의 모습과 다름없으니 그렇다.
최근에 읽은 레아 뭐라비에크의 「그랑 비드」에 등장하는 주인공처럼 자신을 처절하게 증명해야만 살 수 있는 세계가 이곳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불안을 달고 살아가는지 모른다. 글 쓰는 노동자도, 길바닥 장사꾼도, 사무원도, 지게꾼도, 편의점 점주도, 불안을 먹고 사는 파충류인 셈이다. 이처럼 조혜영 시인은 자신의 신작 시집을 통해 급식 노동자의 불안을 담는다. 이 경험은 자주 다뤄지지 않았던 노동의 표정이라는 점에서 소중하다.
이 시집에선 급식노동자가 아닌 또다른 표정도 나온다. ‘미투’를 다룬 시를 통해서다. 이 시에서는 “하룻밤만 자주면 문단에 데뷔시켜 주겠다”는 죽은 유령(시인)이 등장한다. 그는 “성 상납을 요구”하기도 했고, “유명한 문예지에 작품을 실어”준다고, “등단시켜 시인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시인을 조롱했다.
이런 조건의 대가로 “돈 200만원을 요구”했다. 그녀는 직접 겪은 이 사실을 넘어갈 수 없다. 나아가 그의 이름으로 만들어진 문학상의 신화‘화化’에도 문제를 제기한다.
유령은 이미 산 자도 죽은 자도 아니니 진위를 따져 물을 순 없고, 직접 사과를 받을 수 없다. 그러나 이 작품을 보면서 여러 생각이 든다. 순결하고 순정한 노동자 시인의 표정이 사후에 만들어진 포즈일 수도 있다는 것, 특정 문단에 끈이 있는 시인들은 어떤 방식이든지 갑질을 할 수 있다는 것, 죽은 유령의 이름으로 만들어진 ‘상象’을 통해 상징 놀이를 마음껏 즐길 수 있다는 것, 상의 선한 취지와는 무관하게 검증 없이 문학상을 주고받는 문단 풍경이 멋지지 않다는 것이다. 이처럼 이 작품은 개인적인 미투 사실과 함께 동시대의 ‘문학상’의 부조리를 고발한다.
시집이 출간되자마자 이 작품은 입소문을 타 이미 많은 문인에게 읽힌 것으로 알고 있다. 양심이 있다면 문학상 관련 관계자들은 어떤 방식이든지 목소리를 내리라 본다. 무엇보다도 죽은 유령은 사후 미투에 어떤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죽은 자는 말할 수 없는데, 그의 과오를 어떻게 따져 물어야 할까.
‘노동자’의 이름으로 만든 문학상마저 오염된 현실은 허무할 수밖에 없다. ‘노동’이라는 상징을 욕망해 순결한 ‘노동자’를 표방한 문학상마저 이렇게 오염됐다는 건 비판받아 마땅하다. 욕망한 대가로 스스로에게 침을 뱉고 얼굴을 씻어내야 한다. 식당에서든 문학계에서든 ‘노동자’를 농락하는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져선 곤란하다.
문종필 평론가
ansanssunf@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