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든 잃어야 소중함 깨닫는 사람들 [노동의 표정]

더스쿠프 텍스트 속 노동의 표정 10편 김명남 시인의 고백 고향 강원도와 지금 사는 도시 사이 흔들리는 화자의 그리움 담겨 있어 강원도에서 노동하는 농부 모습 고백의 언어로 그린 부모님 노동 잃은 후에야 소중함 깨닫는 사람들

2024-12-20     문종필 평론가

든 자리보다 난 자리가 더 크게 느껴지는 게 인생이다. 무엇이든 잃은 후에야 소중함을 깨닫는 것도 삶의 일면이다. 가까이 있으면 잘 보이지 않으니까, 그럴 법도 하겠다. 김명남 시인이 2011년 출간한 「시간이 일렁이는 소리를 듣다(2011년ㆍ시평사)」는 강원도에서 농사를 짓는 부모님의 노동과 거기서 비롯되는 힘겨움을 고백한다. 지금은 인천에 사는 시인의 거리 때문인지 이 시집은 강원도의 노동을 진실하게 담아내고 있다.

농부의 생활은 절대 한가하지 않다.[사진 | 게티이미지뱅크]

그리워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 감정의 모든 걸 알 수 없지만, 닿을 수 없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니 이 감정을 품은 존재들은 무엇인가를 간절히 원한다고 해도 특정한 대상에 가까이 갈 수 없는 사람들일 것이다. 이미 이런 감정을 품는다는 것 자체가 상실이나 부재가 진행 중이라는 말도 된다.

상실의 형태는 사랑하는 애인의 부재일 수 있고, 반려동물과의 이별일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먹고살기 위해 떠나야만 했던 익숙한 고향이기도 하겠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 ‘변산(2019년)’의 주인공 학수나, 유약영 감독의 영화 ‘먼 훗날 우리(2018)’의 주인공들처럼 성공하기 위해 떠나야 했던 낡은 공간 자체이기도 하겠다.

최근에 행사 진행을 목적으로 읽은 김명남 시인의 「시간이 일렁이는 소리를 듣다(2011년ㆍ시평사)」도 같은 계열에 속한다. 이 시집에는 고향인 강원도를 등지고 인천에서 살아가는 한 화자의 그리움이 담겨 있다. 시집 속 화자는 고향 강원도와 지금 사는 도시(인천) ‘사이’에서 흔들린다. 그는 자신의 고향을 손쉽게 놓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런 ‘그리움’의 표정을 2024년 지금 무슨 이유로 다시 이야기해야 하는가. 여러 이유를 생각할 수 있으나, 이 텍스트가 향하는 ‘그리움’의 기원이 문제적인 현실을 소환한다는 점에서 관심을 가져야 한다.

다시 말해, 이 텍스트는 지역 강원도에서 노동하는 농부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그런데 이 농부들은 다름 아닌 시인의 부모님이라는 점에서 더욱더 애절한 사연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우리는 시집을 출간한 13년 전 ‘농부로 살아간다는 게’ 무엇인지 이 텍스트를 통해서 알게 되는 것이다.

독자들에겐 이 체험이 간접적이라 할지라도 도시에 갇혀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농촌의 풍경으로 다가올 수 있다. 매스컴에서 본 사연이 조금은 형식적이라면 고백의 언어로 그린 부모님의 노동은 개인의 삶으로 확장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직업이 초등학교 선생님인 시인의 눈으로 바라본 농촌의 풍경은 어떨까. 그곳은 폭우가 쏟아지면 두려움부터 생기는 곳이다. 하늘이 마을을 흠뻑 적신 날 다시 햇살이 비치기를 간절히 기다리며 농부들은 새벽같이 일을 시작한다.

하지만 또다시 폭우는 찾아오고 희망은 손쉽게 불행이 된다. 그러니 아버지는 시름시름 앓아야 했고, “집과 논밭이 떠내려가지 않은 것만으로 위안을 삼을 수밖에(‘하루를 삼키다’)” 없었다.

일러스트 | 게티이미지뱅크

농부들에게 추석은 쉬는 날이라기보다는 단기간에 돈을 바짝 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해서 부모님은 추석 전날에 밭에 들어가 쉬지 않고 “번개시장에 내다 팔 장거리를 하신다(‘추석은 없다’)”. 1997년 IMF 구제금융 사태로 인해 사료공장이 문을 닫았을 때는 소를 키우기 힘들어 “아버지는 고개를 떨군(‘IMF 시대의 소’)” 채 얼굴을 들지 못했다.

이처럼 지역 강원도 농촌에서 농사하며 살아가는 농부의 삶은 만만치 않은 것이었다. 도시에 살면서 노동을 하든, 농촌에서 노동하든 힘들지 않은 일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시인의 어머니는 강도 높은 노동으로 인해 “정강이가 으깨지고/ 어깨가 부서지고/ 손에는 볏이 돋은 듯/ 이젠 관절염과 골병으로 늙음마저 저당잡혀/ 팔이 떨어져나갈 듯한 통증에/ 냉장고 문도 못 여시는/ 부들 같은 당신(‘어머니2’)”이 됐다.

아버지도 크게 다르지 않다. 힘든 농사일로는 더는 돈을 벌 수 없다는 마음에 막노동판에서 품을 팔기 시작했다. 자식들의 공부를 가르치기 위해 농부 일을 멈춘 것이다. 공사장에서 일하기로 굳게 마음먹은 후, 시간이 한참 흘러 아버지는 ‘농부’라는 이름을 잃어버리고 ‘구정방수’라는 직함을 얻었다.

구정방수는 집이나 건물에 물 새지 않게 방수 일을 하는 것이다. 이런 아버지의 삶을 지켜보며 그리워하던 시인은 “그 숱한 세월 동안/ 아버지는 얼마나 많은 집을 가슴속에서 지으며 살아 오셨을까(‘농부의 명함’)”라고 말한다.

시인은 자신의 아버지와 고향 강원도가 그리워서, 어머니의 노동이 안쓰럽고 안타까워서, 이 시집을 실존적인 맥락에서 자연스럽게 꾸렸겠지만, 궁극적으로 한명의 개인이 아닌, 우리 ‘농부’들의 표정을 시집에 담아 놓았다는 점에서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러니 이 시집이 담고 있는 노동의 표정은 애틋하면서도 소중하다.

이 텍스트에서 노동을 다룬 흥미로운 작품도 찾을 수 있다. 시집을 꾸린 시인의 직업은 초등학교 선생님이니 학생들에게 숙제를 내주는 것은 일상이겠다. 아마도 선생님이 숙제를 내주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숙제가 고향에서 농사일하며 지내는 친구들에게 특별하게 다가온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 대목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제발 애들한테 숙제 낼 때 부모 숙제 좀 내지 마라. 밤늦게 집구석에 오면 피곤해 죽겠는데 애는 숙제 같이 해야 된다고 알림장 들이밀면 머리 돈다 돌아. 애들 혼자 할 수 있는 숙제만 내지 말이야. 꼭 부모가 손봐줘야 되는 환장한다 환장해(‘추석 전날’).”

아이들에게 숙제 내는 것은 좋지만 부모와 함께하는 숙제는 내지 말라고 직업이 선생님인 시인에게 부탁하는 친구들의 이 표정은 고향 강원도에서 먹고사는 노동의 한 풍경을 담아낸다는 점에서 눈여겨볼 부분이다.

물론, 강원도에 있는 시인의 친구들이 모두 농부는 아닐 테지만, 지역 강원도에서 확인할 수 있는 이런 노동의 풍경은 현재진행형인 노동 자체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보여주니 노동의 보편을 생각하게 한다.

시인의 첫 시집에 ‘추석’이라는 시 제목이 등장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과거에는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공간이 강원도였다면 이제는 새로운 가정을 꾸렸으니, 시인은 그곳이 아닌 이곳(인천)에서 발을 붙이며 살아가야 한다.

그러니 고향은 이제 조금은 낯선 그리움의 공간일 수 있겠다. 그러나 이런 거리 감각으로 인해 시인은 사후적인 측면에서 강원도의 노동을 진실하게 잘 담아낼 수 있었다. 가까이 있으면 잘 보이지 않는다. 무엇이든지 잃고 나서야 소중한 것을 깨닫는다. ‘공간’과 ‘장소’도 그렇다.

문종필 평론가  | 더스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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