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게 산화해야 했던 소방관의 노동 [노동의 표정]

더스쿠프 텍스트 속 노동의 표정 12편 소방관직에 내재된 아픔 ‘대용품’으로 취급받는 소방관 소방관 노동자로 겪는 고충들 이유 증명해야 하는 소방관 턱없이 부족한 공상 지원 인력

2025-01-25     문종필 평론가

소방관은 아주 종종 타인의 ‘대용품’으로 취급받는다. 누군가를 대신해 위험한 불길 속으로 몸을 던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도 소방관의 공상公傷(공무로 입은 손상) 처리 문제는 풀지 못하고 있다. 소방관이 질병에 걸리면 여전히 직접 입증해야 한다. 2017년에 공상입증지원제도가 생겼지만, 질병과 업무의 연관성을 밝히는 데 필요한 비용을 지원해 주는 것에 머물러 있다. 우리가 소방관의 표정을 주목한 이유다.

많은 이들이 소방관의 노동을 쉽게 생각한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문경수 시인을 본 것은 2024년 봄 출판기념회 자리였다. 모임에 거의 나가지 않는 탓에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들과 서먹서먹해서 혼났던 날로 기억한다. 다행인 것은 그가 가방 속에서 따뜻한 신간을 듬뿍 담아와 아직 시집이 없는 사람에게 첫 시집을 건네줬다는 점이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어색한 출판기념회 자리는 첫 시집 이야기로 채워졌다. 그에게는 다소 힘든 자리였겠지만, 예전에 만났던 사람들을 오랜만에 만나는 나로서는 화제를 신간으로 돌릴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는 최근에 개봉한 곽경택 감독의 영화 ‘소방관(2024년)’의 주인공들처럼 현역 소방관이다. 이 직업이 특별하다고 볼 수 없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인생이 다치지 않게/ 대신 몸 쓰는 일(‘스턴트’)”을 하는 소방관은 정의로움이나 희생 또는 신성한 의무와 더불어 타인의 ‘대용품’으로 취급받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 무엇인가 복잡한 직업임은 분명해 보인다.

그래서 그의 첫 시집 「틀림없는 내가 될 때까지(2024년·걷는사람)」에는 소방관 노동자로서 겪어야만 하는 여러 고충이 담겨 있다. 앞서 살펴본 작품처럼 영화나 드라마에서 위험한 장면을 찍을 때 대신해 연기하는 사람인 ‘스턴트맨’을 자신의 작품 제목으로 삼은 것은 그래서 우연이 아니다. 스턴트맨처럼 소방관인 시인 역시도 매 순간 타인을 위해 몸을 던져야만 했기 때문에 자신과 비슷하지만 다른 직업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이처럼 시인은 자신의 직업을 향한 복잡한 심경을 작품 속에 숨기지 않았다. 화재 진압 당시 “휩싸인 연기 속에서/살길을 더듬어 가는 소방대원보다는/방송사 카메라 앞에 얼쩡거리는 얼뜨기에/내가 가까웠다는 사실을(‘화마火魔’)” 부끄럽게 응시한다. 화재 진압 과정에서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서, 뒤로 빠져, 그만하면 됐어”라고 읊조리는 비겁한 자신과도 마주한다.

이런 노동의 표정은 자신의 몸을 희생해야만 누군가를 구할 수 있는 독특한 직업의 정체성을 알려준다. 제주동부소방서 표선119안전센터 고故 임성철 소방장을 추모하는 시가 담긴 3부 첫 번째 작품인 ‘세화’에서 이러한 특성은 잘 드러난다. “일터에서 다치지 말자 죽지 말자 살아야지/시시로 안부를 묻는 우리”들이 바로 소방관인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다급한 현장만이 기다리는 것은 아니다. 작은 소동이 빈번히 일어난다. “6층 건물 난간에 걸터앉아 잠옷 바람으로 고심에 빠진 사람(‘골든타임’)”이 넋 놓고 있는 장면은 그에게 “모른 체할 만큼” 익숙한 광경이기도 하다. 하지만 소방관은 이런 순간마저도 자신을 내려놓아야만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시인 문경수의 이 시집은 노동자 소방관의 표정만을 담지 않는다. 오히려 소방관의 정체성을 드러내기보단 유년과 청년 시절 힘겹게 견뎌야 했던 가난하고 복잡한 시인의 표정과 자신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친구들의 이야기가 섞여 있다.


특히, 이 시집에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가족’이라는 복잡한 관계다. 가족은 참 복잡한 것이기도 한데, 그 이유는 가족의 형태가 정해져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온전한 가족의 지향점을 제시한다고 하더라도, 한 개인의 성격만큼 가족의 형태도 각양각색이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보수적이든 덜 보수적이든 가족은 각자의 방식으로 삶을 돌파해 나가는 것이다. 누군가가 옳은 가족의 형태를 제시할 순 있지만, 바꿀 수 없을뿐더러 변화시키기도 어렵다. 시인의 가족이 그렇고 우리의 가족이 그렇다. 이런 맥락에서 이 시집에 담겨 있는 가족의 표정(노동)은 독자들을 끌어당긴다.


어머니는 “아파트를 드나드는 게 일(‘아파트’)”이다. “사람들이 밖을 나가는 시각에 들어와/계단을 오르며 문 바깥으로/새어 나오는 웃음소리를 숨죽여 듣는다.” 한마디로 그녀는 아파트 계단과 통로를 청소하는 노동자다.

이 대목에서 타인의 가족이 거주하고 있는 아파트 내부에서 흘러나오는 ‘웃음소리’는 청소노동자의 삶을 힘겹게 한다. 무엇보다도 “엄마가 아빠에게/죽도록 얻어맞던(‘승희미용실’)” 날도 있었다는 점에서, 그녀는 가부장적인 가족 구성원의 피해자다. 그래서 이 노동의 결이 애틋하다.

그렇다고 시인의 아버지가 자신의 삶에서 노력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약봉지처럼 누워있는 그는 “새벽엔 별 보고 저녁엔 땅보다/집에 돌아오는 막노동 생활(‘알프라낙스’)”이 지겹다고 고백한다.

수년째 소식이 끊긴 여동생은 “학자금 대출 관련/우편물이 집으로 날아오면/죽지는 않았구나(‘때때’)”라는 작품 속 화자의 목소리에서 알 수 있듯이, 일찍이 독립해 힘겨운 삶을 견디는 청년 주체의 표정으로 담아낸다.

이처럼 이 가족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먹고살기 위해 애쓰는 특별하지도 유별나지도 않은 평범한 사람들이다. 유념해야 할 것은 이 시집이 이런 내용들을 담고 있다고 해서 2025년에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고 보면 안 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하루 웃고 하루 운다는 점에서 시집 속에 담긴 표정은 그때의 순간이다. 그러니 시집에 다급하게 동정을 보내는 건 조심할 필요가 있다. 그보다는 시인이 그려낸 작품 속 언어들을 온전히 느끼는 과정에서 한 개인이 아닌 내 옆에 있는 동료 노동자의 표정을 온전히 읽어내야 한다. 그럴 때 우리 주변의 노동은 조금은 견딜 수 있는 대상이 되기도 하겠다.

시인의 유년은 아픔이 가득하다. 아픔을 통과했다는 것은 아픔을 돌볼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그가 소방관을 직업으로 선택한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유년의 기억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가족을 지키지 못했던 죄책감으로 인해, 아버지의 폭력에 무기력하게 당하는 엄마‘들’을 지키기 위해, 학자금을 갚기 위해 애쓰는 여동생‘들’을 지키기 위해 이 길을 선택한 것인지 모른다.

한마디 덧붙이자. 2001년 홍제동 방화 사건을 토대로 제작한 영화 ‘소방관’은 소방관 노동을 외면하지 않는다. 좋은 장비를 지원해 줄 수 없거나 화상 피해를 개인이 감당해야 하는 구체적 현실을 카메라에 담아냈다. 영화의 이런 문제 제기는 지금도 유효하다. 공상公傷(공무로 입은 손상) 처리 문제는 여전히 풀지 못했다. 소방관의 노동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다.

문종필 평론가  | 더스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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