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외국인 노동자를 쳐다보는 표정 [노동의 표정]

더스쿠프 텍스트 속 노동의 표정 15편 조성래 시인 「천국어 사전」 현장에서 만난 외국인 노동자들 그들을 바라보는 한국인의 시선 다양한 노동의 흔적 시집에 담아

2025-03-25     문종필 평론가

조성래 시인의 첫 시집 「천국어 사전」에는 다양한 ‘노동의 흔적’이 묻어 있다. 그중 그가 노동 현장에서 만났던 외국인 노동자의 모습은 중요하다. 그들의 삶을 모질게 그리면서 우리가 외국인 노동자를 쳐다보는 ‘표정’을 알려주고 있어서다.

우리 중 상당수는 외국인 노동자에게 ‘차별적 시선’을 보내고 있을지 모른다.[사진 | 게티이미지뱅크]

조성래 시인의 첫 시집 「천국어 사전(2024ㆍ타이피스트)」은 진실한 언어로 채워져 있다. 여기서 진실하다는 것은 그의 언어가 동시대의 다른 시인보다 유달리 특별하거나 세련돼서 진실하다는 말이 아니다. 표현하는 언어도 세계관을 운영하는 방식도 시인마다 각양각색이니 하나의 표정만을 최고로 꼽기는 어렵다. 

세상에 소중하지 않은 목소리가 어디 있으며, 애달픈 사연이야 한 움큼씩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그런데도 그의 언어가 ‘진실한’ 언어로 채워졌다고 적은 것은 평이하지만 평이하지 않은 시적 언어로 자신의 삶을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이 직접 쓴 산문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주관적인 경험 내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가장 솔직한 문장(‘아름다운 글을 쓰고 싶었으나, 아름다운 사람이 아니었음을’)”을 찾아 돌아다녔기에 그의 진정성이 호소력 있게 전달되는 듯하다. 

그런데 이 솔직함을 시집에서 운영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솔직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삶에 정직해야 할 뿐만 아니라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 부끄러움이 있을 수 있지만, 그것과 대면해야 한다. 

솔직하게 풀어낼 사연이 없거나, 견딘 삶이 보잘것없다면 아무리 절절한 고백이라고 한들 개인의 일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삶이 의미 없다는 것이 아니라, 투명한 고백의 언어는 지독한 삶이 아니고서는 타인을 설득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지점에 연민이 무의식적으로 침입하게 되는데, 연민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다. 삶을 있는 그대로 쓴다는 것은 이렇게 어렵다. 

그렇다면 조성래의 첫 시집에서는 어떤 내용이 포진돼 있을까. 아무래도 그가 가장 힘들어했던 것은 자신의 가족과 얽힌 끊을 수 없는 인연의 애달픔이나 죄책감 또는 원망 같은 감정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감정의 기원은 어디에서 시작됐을까. 

아버지는 나주의 여자를 찾아 “우리를(‘행렬’)” 버리고 떠났다. 시인은 작은 방에 홀로 남겨진 채 여동생과 아픈 어머니를 곁에서 돌봐야 했다. 시인의 어머니는 회복될 수 없는 병으로 인해 몸이 점점 시들해졌고, 시한부 선고를 받기까지 가족들은 그녀를 정성껏 돌봐야 할 의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픈 존재를 돌봐 본 사람은 이 과정이 고단하다는 것을 안다. 작은 바람에도 쉽게 꺼지는 위태로운 존재를 돌보는 일은 혈육이든 타인이든 쉽지 않다. 시인이 “나는 살기 위하여 동생과 나를 줄다리기하는/그 나무를 포기하고 싶었다(‘낙원’)”라고 솔직하게 고백한 것은 이런 어려움을 비유적으로 담아낸 것이다.

노동의 현장 속에 박혀 있는 표정들은 과연 어떨까.[사진 | 게티이미지뱅크]

여기서 ‘나무’는 자신을 낳아준 엄마이고, 이런 비유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시집 속에서 변주된다. 그러니 시집을 통해 이런 삶을 간접적으로 접한 독자들은 이 가족이 어떻게 삶을 돌파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그에게는 뚜렷한 서사가 존재한다. 

하지만 이런 상상의 끝은 지독하게 현실적이다. 지친 엄마가 요양병원에서 돌아온 날 “나는 짐을 싸들고/세상 어디에도 없는 도시로 도망쳤다”고 고백하기 때문이다. 이런 쉽지 않은 선택으로 인해 이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감정은 완성된다. ‘가족’이라는 족쇄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은 죄책감을 완성했고, 그가 머물던 고향(공간)마저도 쉴 곳이 아닌 탈출할 장소로 명명해 버린다. 

이런 어쩔 수 없음은 시집을 관통하는 하나의 선이다. 당신은 사랑하는 누군가를 냉정히 끊어낸 적이 있는가. 이 선택이 그를 시인으로 이끌었다. 비극적인 이 이야기는 소설이 아닌, 시의 언어라는 점에서 이곳에 주어진 인간의 현실을 냉정하게 응시하게 만든다. 그만큼 사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천국어 사전」 속 화자는 독자들에게 알려준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이런 내용을 다루려는 것이 아니다. 그가 힘든 결심을 하고 나서 떠돌아다녔던 미래에 관해 이야기하기 위함이다. 물론, 이런 흔적이 시간 순서대로 정확히 들어맞지는 않겠지만, 어려운 환경 속에서 먹고살기 위해 노력했던 노동의 흔적을 확인해 보려고 한다. 

그는 “스물여덟에 대학가 피시방 아르바이트(‘Man of sorrows’)”를 했다. 한때는 “컨베이어 벨트 앞에 서서 분주한 손가락(‘공의 행방2’)”을 지휘했다. “고시원(‘환풍기’)”에 머물면서 미래를 설계했다. 하지만 밝지 않았다. “백지상태의 이력서(‘이제와 저희 죽을 때’)”는 그런 사실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이력서가 백지라고 해서 그를 불성실한 사람이라고 오해하면 안 된다. 사회가 요구하는 틀에 잘 들어맞지 않았을 뿐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다. 백지는 오히려 시인에게 훈장이다. 그러니 그가 일할 수 있는 노동의 장소는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몸을 굴리고 쓰는 일이 전부인 공장 노동이 대부분이었다. 이런 노동의 현장은 과거에도 현재도 문학의 언어로 재현되고 있으니 특별하지 않다. 

하지만 그가 노동 현장에서 만났던 외국인 노동자인 “용접공 필리핀 소녀 윤희(‘완싱’)”나 주물공장에서 만난 “캄보디아 동료(‘지상화’)”로 표상되는 외국인들의 모습은 중요하다. 특히, 시집 속에 그려진 어느 한 외국인 여성 노동자의 삶은 시인의 삶만큼 모질게 그려진다는 점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노동 현장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을 향한 차별은 흔하다.[사진 | 뉴시스]

이 여성 노동자는 한국인 남편과 결혼했으나 관계가 원활하지 않다. 이혼해 주지 않는다. 시아버지는 “저주받은 것(‘낙원’)”을 데려왔다고 치욕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 무례한 이 말속에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쳐다보는 우리의 표정이 숨어 있다. 겉으로는 친절할 수 있으나, 누군가에게는 이런 마음이 무섭게 꿈틀대는 것이다. 시인 조성래는 이런 순간을 시집에 담아 놓았다. 

시인은 노동 이후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마친 후, “구내식당에서 돌아오는 길, 무의미할 정도로 작고 많은 돌멩이, 우리의 발에 밟히는 한 걸음 한 걸음의 소리가 모두 달랐다 다 다르다는 걸 누가 알아줄까 그러나 바로 거기에 있다는 점에서 모든 돌은 유일한 존재다(‘돌멩이 유물론’)”라고 적는다. 우리 모두 소중한 존재다. 이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문종필 평론가  | 더스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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