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첫걸음 떼는 순간 “아! 기적이여” [김용우의 미술思]

더스쿠프 아트 앤 컬처 김용우의 미술思 8편 빈센트 반 고흐의 첫걸음 부모에게 최고의 순간 아이가 첫걸음 내딛을 때 거장이 건네는 말 없는 위안

2025-05-04     김용우 평론가
빈센트 반 고흐 ‘첫걸음’ 74.5×91㎝, 1890년, 캔버스에 유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 미국 [그림 | 위키미디어]

오월이다. 꽃들이 아름다움을 뽐내는 참 좋은 계절이다. 이맘때면 학교에서도 소풍을 갔었다. 다 함께 줄 서서 야외로 나가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어쩌다 보물찾기 게임에서 연필·공책·필통과 같은 글씨가 쓰여 있는 쪽지라도 한장 찾으면 세상 다 얻은 기분이었다.

집에서도 가족들과 가끔 남산이나 창경궁에 갔는데, 전날 밤을 설치고 설레며 기다렸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오월을 ‘가정의 달’이라 부른다.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이 있어서 그리 부르는 것이리라.

내게도 어린이날이 있었다. 오래된 기억이지만 지금까지 노란 병아리색과 연두색·분홍색·하늘색이 떠오르고, 꽃향기가 코끝에 맴돌 정도로 부족함이 없는 날이었다. 우리 집은 나무판자로 된 담장 아래 화단이 있었는데, 막 피어나는 꽃들을 살피며 내게 눈을 맞추시던 어머니의 웃음 띤 얼굴이 떠오른다.

그러면 내 기억의 저편에서 아장아장 걸어오는 첫아이와 둘째 아이가 오버랩되고, 다시 손녀가 웃으며 달려온다. 참 행복하고 따스한 봄날이다.

그림 중에도 오월이면 한번씩 떠오르는 그림이 있다. 고흐의 작품 ‘첫걸음(1890년)’이 그렇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아이가 첫걸음을 내딛는 순간은 부모에게 ‘세상에 이런 기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감동적이었을 것이다. 

고흐도 이 그림을 그리면서 행복한 순간을 떠올렸으리라. 자신의 어린 시절과 다섯명이나 되는 동생들의 모습, 무엇보다 새로 태어난 조카를 생각했을 것이다. 이 작품을 제작한 시기가 1890년이니까, 자신의 이름을 물려받아 더욱 사랑스러웠을 조카를 떠올렸을 게 분명하다. 고흐가 조카의 탄생을 축하해 선물로 그린 ‘꽃피는 아몬드나무(1890년)’의 제작 시기와 같기 때문에 그렇게 짐작하고도 남는다. 

우리의 어린 시절 또는 젊은 오월의 행복을 떠올리기에 이보다 걸맞은 그림이 또 있을까. 고흐가 조카를 생각하며 그린 두 작품 중 ‘꽃피는 아몬드나무’가 참으로 편안하고 걱정 없이 순수하며 아름답다면, ‘첫걸음’은 빙그레 지어지는 미소를 금할 수가 없다. 

말없이 위안을 받고 싶을 때 나는 이 그림을 종종 본다. 그럴 때마다 힘들고 복잡한 현실을 잠시 잊게 해주고 다시 용기를 북돋워준다. 모든 부모가 삶이 아무리 힘들어도 자식 생각에 다시 힘을 내는 것처럼 이 그림은 신비한 힘을 가진 듯하다. 

그림 ‘첫걸음’의 주인공인 조카는 훗날 성장해서 어머니 요안나를 도와 ‘빈센트 반 고흐 재단’과 ‘고흐 미술관’ 설립에 참여하는 등 ‘빈센트’란 이름값을 톡톡히 해낸다. 공교롭게도 이 그림을 그리던 1890년 사망한 고흐는 그렇게 역사에 남았다. 

장 프랑수아 밀레 ‘첫걸음’ [그림 | 위키미디어]

그림 ‘첫걸음’의 원작자는 사실 장 프랑수아 밀레(1814~1875년)다. 밀레는 우리나라에서도 널리 알려진 ‘만종’ ‘이삭줍기’ ‘양치기 소녀’ 등을 그린 작가다. 계몽주의 작가답게 그의 작품은 사람을 위로하고 안식을 주며 인간답게 살아가는 방법을 다독여 주는 내용을 담고 있다. 대륙으로 빠르게 퍼져나간 ‘산업혁명’의 혼란스러움에 지친 프랑스 시민을 위로함과 동시에 건전한 노동, 종교적 신념으로 삶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고흐의 그림에도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사랑과 연민, 위로가 담겨 있다. 고흐는 이 작품 외에도 ‘씨 뿌리는 사람’ ‘낮잠’ 등 여러 점의 밀레 작품을 오마주(존경의 뜻을 담은 모작)하는데, 가만히 보고 있으면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비슷한 정서가 엿보인다.

그림으로 이어지는 대가들의 시공을 초월한 만남을 통해 우린 더 행복한 오월을 맞이한다. 사랑 가득한 오월, 웃음꽃 피는 가정이 되시길…. 

김용우 미술평론가 | 더스쿠프
cla0305@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