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의 흔적 보면서… 스스로 ‘부끄러움’ 느끼는 사람들

더스쿠프 텍스트 속 노동의 표정 17편 신경현 시인 대구 성서공단에서 마주친 고된 노동 후 맞는 바람 노동하는 나 자신 대면하기

2025-05-29     문종필 평론가

어느 공사 현장의 외국인 노동자, 꼭두새벽에 잡일하는 어느 골목의 노동자, 어느 밥집에서 일하는 아주머니 노동자…. 노동이 무엇이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세상에 어떤 노동이든 힘들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에 노동 이후의 표정은 언제나 값지다. 그럼에도 그들의 힘겨운 노동을 바라보는 사람들 중 몇몇은 미안함에 ‘부끄러움’을 느끼기도 한다. 그중엔 과연 높으신 양반들도 있을까.

신경현 시인은 노동자로서 현장에서 자기 자신과 타인을 마주했다. [사진 | 뉴시스]

신경현 시인은 오랜 시간 대구 성서공단 노동자로 살았다. 그의 일터가 오로지 공단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이곳에 머물면서 다양한 노동의 풍경을 응시했고, 이 경험은 자신의 첫 시집 「그 노래를 들어라(풀무질ㆍ2008년)」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의 두번째와 세번째 시집 「따뜻한 밥(갈무리ㆍ2010년)」과 「당부(한티재ㆍ2014년)」가 직접적인 노동의 풍경을 덜 가져다 놓았다면 그의 첫번째 시집은 노동 현장과 밀착해야만 만질 수 있는 생생한 목소리를 그의 젊은 감각으로 받아낸 의미 있는 시집이라고 평할 수 있다. 

특히, 그의 첫 시집 마지막 부에 무게감 있게 묶여 있는 이주노동자의 현실은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적지 않은 외국인 노동자를 수용할 수밖에 없는 국내의 현실을 고려했을 때 많은 사람이 꼭 읽어야 할 텍스트로 판단된다.

시대가 지나감에 따라 대우도 처지도 점점 나아진다고 말할 수 있더라도 과거에 우리가 겪어야만 했고, 외국인 노동자들이 경험해야 했던 부조리를 기억하는 것은 중요하다는 점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노동의 흔적이다. 

2001년 1월에 그가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해방글터’ 첫 시집 「땅끝에서 부르는 해방노래」에 다섯편을 발표하기도 했으니 첫 시집에 담겨 있는 노동의 풍경은 1990년대 끝자락과 2000년대 초ㆍ중반의 흔적임을 추측할 수 있다. 

그래서 그의 첫 시집은 2025년인 지금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연재글 16화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낮은 자리에 놓여 있는 노동자들의 소외는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이라는 점에서 첫 시집의 표정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렇다면 그 유효함을 한 편의 시를 통해 확인해보자

늦은 퇴근길 
와룡산으로 열려있는 산책로의 바람이, 
가만히 나를 멈추게 한다
껑충한 집 앞 목련나무를 흔들기도 하고 
수업 마치고 돌아가는 아이들의 머리를 쓸어 넘기기도 하던, 
그 바람이 슬며시 내 발길을 잡아끈다 
물끄러미 서 있다가 
한순간 바람으로 피는 와룡산이 나를 멈추게 한다
벌써 수백 수천 번은 만나고 헤어졌을 
하지만 단 한 번도 제대로 본 적 없는 바람을 
그때서야 만난다 
나는 서늘해 진다 
‘바람을 만나다’ 전문

이 시는 어느 한 젊은 노동자의 퇴근길을 노래하고 있다. 그가 하는 노동이 무엇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세상에 어떤 노동이든 힘들지 않은 것이 없다는 점에서 열심히 일하는 과정에서 소진된 노동 이후의 표정이 더 값지다. 그렇게 읽는다면 이 작품은 일정 부분 시대를 초월한 동시대의 작품으로 돌변한다.

[사진 | 게티이미지뱅크, 자료 | 국가인권위원회]

화자는 늦은 퇴근길에 바람을 ‘발견’한다. 고된 일상 속에서 주변의 풍경을 보지도 느끼지도 못했던 시인이었지만, 오늘만은 그 바람을 만질 수 있다. “한순간 바람으로 피는 와룡산이 나를 멈추게 한다”라고 했을 때, ‘피는’ 행위에 무게를 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를테면 노동자들에게 풍경은 손쉽게 움켜잡을 수 있는 게 아닌 것이다. 이들에게는 정말 아주 가끔 기적 같은 풍경이 눈앞에서 펼쳐질 뿐이다. 특별하지 않은 우리의 삶이 그렇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 작품의 화자는 시간이 지나 두번째 시집에서는 어떤 상황을 그려 놓았을까. 여전히 바람을 느끼지 못한 채 분주한 노동의 일상을 보내고 있을까. 아니면 조금은 여유를 지닌 채 풍경을 너그럽게 수용하고 있을까. 

아마도 신경현 시인의 시집에서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소중한 감정은 ‘부끄러움’일 것이다. 이 감정은 동료 노동자의 처지를 쳐다보는 과정에서도 확인되고, 주저앉아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는 이주노동자들의 안타까운 상황을 바라보는 과정에서도 확인된다. 궁극적으로는 노동하는 자신을 당당하게 자랑하지 못해 움츠리는 과정에서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이 감정은 그 어떤 감정보다도 혁명적이라는 점에서 시인은 가장 큰 무기를 품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자신을 앞세우기보다는 스스로를 반성하는 삶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성하는 행위를 통해 화자는 과거의 ‘나’를 전혀 다른 시간 속에 가져다 놓는다. 

그러니 그가 노동 투쟁 현장이나 동료들의 사연을 응시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부끄러움은 자신을 계속해서 긴장 위에 올려놓는 행위나 다름없다. 시인에게 있어서 긴장(사이)의 사유를 품는 것 만큼 값진 몸 상태는 없다. 그래서 그의 두번째 시집 「따뜻한 밥」에 수록된 마지막 시 ‘쪽팔린다’는 의미하는 바가 크다. 

고향 생각만 하면 눈물부터 나고 어린 동생들과 부모님을 생각하면서 기계를 잡고 잔업철야에 매달린다던 저 메마른 손을 나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대해왔나 부끄러운 밤들과 부끄러운 날들이었다 그런 밤엔 나도 모르게 사무실 벽면에 걸려 있는 그이의 사진을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쪽팔린다’ 부분

그가 똑바로 볼 수 없다고 말했을 때, 이 행위에 숨은 부끄러움은 노동자들의 힘겨운 노동 현장과 긴밀하게 만난다. 그 역시, “서른 살/ 공장에서 쫓겨(‘서른 살’)”나 희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시간을 홀로 고독하게 통과해야 했기 때문에 노동자의 아픔은 더 이상 타인의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의 부끄러움은 부끄러움이 아니다.

[사진 | 한티재 제공]

젊은 노동자의 우여곡절이 첫 시집을 채웠다면, 두번째 시집은 관성의 영역에서 지난날의 통증을 온전히 견디는 시인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세번째 시집에서는 이런 모습이 줄어든다.

비 그친 지렁이를 쳐다보며 “저 느려터진 걸음으로/기어코 가야 할 곳은/어디인가/ 네게로 향하고 있는/내 마음에 묻는다(‘연애 시(詩)’)”라는 목소리처럼 과거와는 다른 길에 시선을 보낸다. 그 길 역시, 평생 노동자 시인으로 살아온 삶과 어긋나지는 않겠지만, 그가 닿고자 하는 그곳은 조금은 더 서정적이고 실존적인 공간의 풍경일 테다. 아마도 그 ‘장소’에서 그의 시는 새롭게 피어날 듯하다. 

문종필 평론가 | 더스쿠프
ansanssunf@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