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갯속 세상, 우린 지금 어디로 가고 있나 [김용우의 미술思]
더스쿠프 아트 앤 컬처 김용우의 미술思 12편 윌리엄 터너의 전함 테메레르 퇴역 맞은 낡은 범선의 최후 새 시대의 도래 이야기해 “그림이 정황 묘사” 터너의 업적 불안, 우울, 위험 그리기 시작
봄도 무르익어 녹음이 짙다. 개나리와 진달래는 어느샌가 자취를 감추고 장미와 붓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마당 안 채마밭의 감자도 하얀 꽃을 피웠다. 6월 하지夏至엔 알 굵은 감자를 수확할 기대에 벌써 마음이 부푼다.
자연은 심고 가꿀 때 흘린 땀의 대가를 정직하게 돌려준다. 인간의 일들도 자연을 따라 흥망성쇠興亡盛衰를 거듭한다. 이런 자연의 섭리를 잘 보여주는 사례는 흥미롭게도 ‘배’다.
인류는 고래古來로 항해에 바람을 이용했다. 이른바 돛을 단 ‘범선’이다. 고대와 중세를 지나며 오랫동안 이용한 범선들이 하루아침에 퇴출당하는 일이 있었다. 분기점은 18세기 중반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이었다. 기술의 진화로 증기기관을 이용한 선박이 등장하면서 바람과 무관하게 항해가 가능해졌는데, 그 과정에서 ‘범선’이 위용을 잃었다.
이쯤에서 잠시 영국으로 눈을 돌려보자. 해양 대국이라 불리던 영국엔 유명한 배가 많았다. 세계 4대 해전으로 회자되는 트라팔가 해전에 참가했던 전함戰艦 테메레르가 대표적이다. 넬슨 제독이 이끄는 영국은 나폴레옹이 진두지휘한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와 싸워 큰 승리를 거두는 등 해군의 위상을 떨쳤다.
하지만 윌리엄 터너(1775~1851년)의 작품 속 ‘전함 테메레르’는 한낮 해체를 위해 작은 통통배에 끌려가는 퇴역선에 불과하다. 쓸쓸한 퇴역을 맞은 낡은 범선의 최후는 지는 석양 속으로 사라진다.
윌리엄 터너는 영국이 자랑하는 화가다. 존 컨스터블(1776~1836년)과 함께 영국 화단의 새로운 화풍을 일으킨 주인공인데, 당시 개발된 휴대용 튜브물감 덕에 야외에서 직접 보고 그리는 사생화寫生를 많이 그렸다. 그러고 보면 오랫동안 화실에서만 그리던 화가들은 ‘휴대용 튜브물감’ 덕분에 실재 풍경을 보며 그릴 수 있게 됐다. 이는 곧 다가올 인상주의 시대를 예고한다.
이처럼 윌리엄 터너의 작품 ‘전함 테메레르’는 석양으로 끌려 항구로 들어오는 역전 노장의 모습을 통해 한 시대가 저물고 새로운 시대가 도래함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렇게 열린 새 시대에서 과연 삶의 질이 좋아졌는지는 의문이다. 산업화로 인한 도시화, 거기서 비롯된 환경 문제, 이름도 모른 채 퍼져나간 각종 질병은 산업혁명 이후에 나타난 불편한 모습들이다.
윌리엄 터너도 이를 걱정했던 걸까. 터너의 또 다른 작품 ‘비와 증기 그리고 속도(1844년)’ 속 증기기관차는 어디서 출발해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미 출발한 기차는 쉬지 않고 앞으로만 달린다. 안개 속에선 모든 것이 흐릿하게 보인다. 선명하지 않은 미래로 내달리는 기차를 그리면서 윌리엄 터너는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 것인가”라고 묻는 것 같다.
아무것도 확실치 않은 상황을 그리는 화풍. 윌리엄 터너의 그림은 분명치 않은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어떤 때에는 사물이 어떻게 생겼는지 정확하게 묘사하지 않음으로써 더 많은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다. 우리는 시각적인 영상이나 그림보다 글로 쓴 책을 읽을 때 더 많은 상상력을 발휘한다. 짐작하고, 상상하고, 꿈꾸면서 발상의 전환을 모색하는 건 인간의 습성이다.
“그림이 정황 묘사를 시작했다.” 터너의 업적이다. 구체화된 사물이 아닌, 보이지 않는 정황, 이를테면 추상명사인 불안, 우울, 위험 같은 것을 그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우리의 세상살이도 어렵고 불확실하다. 그럴수록 “정신만 차리면 범에게 물려가도 살 수 있다”는 격언처럼 지혜를 발휘하고, 생각을 전환해야겠다. 전함 테메레르처럼 되기 전에 말이다. 어렵고 불확실한 시대에 살아갈 우리를 위해 미리 생각해 보라고 충고하는 화가, 그가 바로 윌리엄 터너다.
김용우 미술평론가 | 더스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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