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땀 한땀 그린 금의 미학 “아름다움 초월하다” [김용우의 미술思]
더스쿠프 아트 앤 컬처 김용우의 미술思 16편 구스타프 클림트 작가의 아델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1 금박 한땀 한땀 그려 넣어 붓질 하나에 정성 묻어나 나치 퇴폐예술 낙인에도 살아남은 아름다운 작품
금으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 그 비싼 금을 화면 전체에 바른 화가. 오스트리아 빈의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년)는 그림에 금을 사용했다. 우리가 잘 아는 그림 ‘키스’의 작가다.
‘키스’는 세계적으로 사랑을 받는 작품이어서 지금 전시돼 있는 빈의 벨베데레 궁을 떠날 수가 없다고 한다. 어지간한 작품들도 누리는 ‘해외 전시’를 못 하는 이유가 ‘키스’를 보려고 빈을 찾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라니, 가히 인기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이렇게 우리가 아는 작품을 막상 전시장에서 마주하면 감동이 줄어들 수 있다. 아마도 매일 프린트되고, 굿즈로 만들어져 가까이서 많이 봐왔기 때문이리라. 클림트의 ‘키스’가 그렇고, 고흐의 ‘꽃피는 아몬드나무’도 그렇고, 다빈치의 ‘모나리자’ 또한 그렇다. 너무 친근해서 ‘매일 만나는 그림이 여기 또 있네’ 하는 정도일지 모른다.
그런데도 내겐 꼭 한번 진품을 보고 싶은 그림들이 있다. 그중 하나가 클림트의 작품 ‘아델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1’이다. 클림트의 ‘키스’가 금칠을 했다고 하지만 ‘아델 블러허 바우어의 초상1’은 그냥 뿌린 정도가 아니다. 금박을 듬성듬성 붙이지도 않았다. 그야말로 한땀 한땀 그려 넣었다. 아무리 꼼꼼하고 섬세한 작가라도 이렇게는 못 할 것 같다. 붓질 하나마다 진심과 애정이 묻어난다.
그래서 “사랑 없이 이런 그림을 그릴 수는 없다”는 게 내 주장이다. 어느 한구석 정성스럽지 않은 터치가 없고, 함부로 그린 문양도 없다. 100년이 흐른 지금도 사랑으로 가득찬 작품에선 아름다움을 넘어 아련한 내면의 욕망이 뿜어져 나온다. ‘마음에 딱 맞는 명화를 보면 아찔한 현기증을 느낀다’는 스탕달 신드롬(Stendhal syndrome)을 체험하는 듯하다.
공교롭게도 클림트의 그림은 뉴욕, 거기서도 널리 알려지지 않은 노이에 미술관(Neue Gallery)에 가야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영화 ‘우먼 인 골드(Woman in Gold)’에 잘 묘사돼 있다.
유대인 딸 아델 블로흐 바우허(이하 아델)는 10대 후반인 1889년에 클림트를 만나 자신의 초상화를 맡겼는데, 클림트는 7년 동안 스케치만 했다. 그러는 동안 클림트는 1901년 아델을 모델로 ‘유디트l’이란 작품을 먼저 제작했다.
유디트는 적장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고 나라를 구한 성경 속 여인으로 우리의 논개(진주 촉석루에서 적장을 안고 물로 든 의기義妓)와 견줄 만한 이다. 이런 스토리라인 덕분에 유디트 이야기는 그림 소재로 종종 등장한다.
그래서 클림트의 작품 속 유디트는 굳은 의지보단 에로틱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로부터 6년 후인 1907년 클림트는 드디어 ‘아델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1’을 완성한다. 이 그림은 많은 사연을 갖고 있다. 1918년 쉰여섯에 클림트가 먼저 죽고, 아델도 1925년 마흔네 살로 사망했다. 그림은 그렇게 나치의 손에 들어가 우여곡절 끝에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오스트리아 정부에 반환된다.
이 그림은 ‘나치의 퇴폐예술’이란 낙인에도 살아남아 벨베데레 궁전에서 전시되다가 아델 남편의 유언대로 2006년 조카 알트만의 손에 들어갔다. 그후 화장품회사 에스터 로더 창업자의 손자 로널드 로더에게 1500억원에 매각됐다.
로더는 뉴욕에 갤러리를 마련하고 ‘아델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1’을 전시했는데, 그곳이 바로 ‘노이에 미술관’이다. 그림을 팔면서 알트만은 “작품을 대중에게 공개해야 한다”는 걸 조건으로 내걸었다. 덕분에 이 아름다운 작품은 모두의 사랑을 받고 있다. 사랑의 힘으로 만든 아델의 초상화는 시간과 장소를 넘어 뉴욕에서 만날 수 있고, 인류가 공유하는 보물이 됐다.
김용우 미술평론가 | 더스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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