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소수자, 낯선 언어의 곁에 오래 머무는 일 [노동의 표정]

더스쿠프 텍스트 속 노동의 표정 19편 유성원 작가의 ‘친구’ 사회 속 다른 길을 가는 사람 혐오의 눈빛 바꾸려는 예술 시대의 관성에 맞서려는 힘

2025-07-23     문종필 평론가

오랜 시간 유지돼온 ‘이분법적인’ 세계관을 깨려면 어느 정도의 희생을 담보로 걸어야 한다. 이주민, 난민, 고공에 올라 더위를 견디는 자, 찌그러진 자, 홀로 고독한 길을 선택한 자가 겪어야 했던 혐오의 눈빛을 바꾸기 위해 많은 이들이 애써온 것도 그런 이유일 테다. 이런 점에서 최근에 읽은 인상 깊은 텍스트가 있다. MSM 퀴어 활동가로 글을 쓰고 있는 유성원의 책이다.

동시대의 예술 작품들은 이분법적으로 성별을 나눌 수 없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사진은 서울퀴어퍼레이드.[사진 | 뉴시스]

2년 전, 마이아 코베이브(Maia Kobabe)의 그래픽 노블 「젠더퀴어(2023년)」 와 관련해 특정 매체에서 짧은 글을 쓴 적이 있다. 이 텍스트는 여성도 남성도 아닌 ‘논바이너리’의 실존적인 삶을 그린 텍스트로 13세의 어린아이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성정체성을 고민하고 용기 내어 커밍아웃하기까지의 시간을 담는다. 누군가는 동시대에 이런 서사가 자주 출현한다는 점에서 특별히 관심을 갖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은 서사의 세계에서만 통용되는 안일한 생각일 뿐, 현실은 그렇지 않다. 미국에서 출간된 「젠더퀴어」 역시 일부 도서관에선 ‘금서’로 지정했다. 이성애자 남성인 내가 한국에 번역된 이 책을 특정 언론사에 짧은 리뷰를 쓰자마자 악플이 달렸다.

문제적인 것은 이 댓글이 이성적인 판단이 아닌, 혐오 그 자체였다는 것이다. 여러 악플이 달렸지만 그나마 욕이 쓰이지 않은 댓글을 순화해서 예를 들면 이렇다. “제발 이런 거 혼자만의 취향으로 간직하세요. 생물학적으로 성별은 두 개입니다. 논바이너리 따위 메타버스에 가서 맘껏 하세요”

‘제발’이라는 부사를 사용하는 것으로 봐서 이 사람은 오랜 시간 성소수자들에게 혐오 감정을 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가상 세계와 현실 세계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는 현상을 언어로 표현한 코로나 시기의 유행어, ‘메타버스’를 운운하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동시대의 흐름을 놓치지 않는 사람으로도 파악된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남성과 여성만이 이 세계에 존재한다고 말한다. 정말로 그럴까. 우리가 사는 세상은 ‘남성’과 ‘여성’만이 존재하는 것일까.

이 글 서두에서 논한 작품도 그렇지만 동시대에 쏟아지는 무수히 많은 작품에서 이분법적으로 성정체성을 나눌 수 없다고 말한다. 유령의 간곡한 선율로 계속해서 세상을 떠돌고 있는 이 목소리를 외면할 사람은 이곳엔 이제 없다. 이 믿음은 이제 상식이 돼가고 있다.

하지만 이런 ‘상식’이 흔들리고 있는 것은 오랜 시간 유지됐던 이분법적인 세계관의 관성 때문일 것이다. 그 관성을 멈추는 것은 소수가 다수와 싸우는 것이니 어느 정도 희생을 담보로 한다. 이주민, 난민, 고공에 올라 더위를 견디는 자, 찌그러진 자, 홀로 고독한 길을 선택한 자가 겪어야 했던 혐오의 눈빛을 바꾸기 위해 오랜 시간 많은 예술가들이 애쓴 것은 그런 이유일 테다. 

[자료 | 갤럽, 참고  | 2023년 기준, 사진 | 뉴시스]

이것을 사회의 ‘진보’라고 이야기할 수 있지만, 이런 거창한 말보다는 우리 사회가 조금은 더 다양한 사람들을 이해하고 품어야 할 필요가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런 맥락에서 최근에 읽은 인상 깊은 텍스트가 있다. 그 책은 MSM 퀴어 활동가로 글을 쓰고 있는 유성원의 「토요일 외로움 없는 삼심대 모임(난다ㆍ2025년)」 「성원씨는 어디로 가세요?(난다ㆍ2025년)」다. 

이 두 텍스트는 기이하지만 기이하지 않다. 낯설지만 낯설지 않다. ‘기이하다’라는 것은 이성애자의 관점에서 기이하다고 표현한 것인데, 기이함은 책을 펼쳤을 때 느꼈던 낯섦의 영역에서 분출된 감정일 뿐이지 기이한 것은 아니다.

그의 서사를 읽어나가다 보면 낯선 감각의 언어로 느껴지다가 어느 순간에는 그의 언어에 닿게 되고, 끝내는 하나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는 낯선 시어를 오래 곁에 두다 보면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 경험과 유사하다.

그래픽 노블 작가 박인주의 「날개암」을 읽었을 때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기이하게 느껴지는 그림체와 어두운 언어가 처음에는 피부에 와닿지 않았지만, 천천히 느리게 읽어나가는 과정에서 내용에 적합한 형식이라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소설가 유성원의 산문과 소설 역시도 처음에는 낯설게 느껴졌지만, 그의 반복적인 호흡에서 흘러나오는 간절한 목소리의 변주를 듣는 순간, 그가 견딘 시간과 시절을 다 알 수는 없지만, 삶을 내려놓을 만큼 힘든 시간이었음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성적인 표현 역시 누군가에겐 문제적이라고 여겨질 수 있지만, 마땅히 이뤄져야 할 한 인간의 욕망을 표현한 낯선 감각이라고 생각된다. 이 감각 역시 우리 사회가 넘어야 할 벽 같지만, 이런 살결도 ‘당신’이 살아가는 하나의 방법일 테다. 

그가 살아가면서 느꼈던 모멸감이라든지, 회의, 수치심의 감정을 다 적을 수는 없지만, 성소수자 역시 다양한 사람과 함께 지내야 하는 사회의 일원이라는 점에서 2017년 3월에 쓰인 산문 ‘친구’는 독자들에게 여러 가지 생각할 것들을 제공한다. 그런데 이 순간을 노동의 표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에게는 노동의 고됨보다도 ‘관계’의 보편이 더 절실해 보인다.

아침에 대걸레 들고 복도 청소를 하는데 귀에 맴도는 소리. “주변에 친구가 없었다는 거잖아. 글이 얼마나 이상한지 그런 이야기를 하면 되는지 안 되는지 말해줄 사람이 없었다는 거지.” 회사에 도착한 건 여덟시 삼십분쯤이고 사십분쯤 노트북을 열어 지난 글을 읽는다. 마지막 수정했던 글을 확인하려 열었다가 자살하고 싶다는 문장이 거슬려 지우고 닫았다.  

편집자로 일하는 화자는 공간을 정돈하기 위해 잠시 복도를 청소한다. 그런데 어떤 한 무리의 사람들이 그가 청소하는 줄 모르고 뒷담화를 한다. 그가 쓰는 글(낯선 언어)이 너무나도 이상하다는 것이다. 이상할 것이 없지만, 글만 이상하면 그래도 괜찮다.

[사진 | 난다 제공]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곁에 친구가 없기 때문에 그렇다고 말한다. 글과 친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지만, 이 뒷담화를 듣고 화자는 ‘자살’이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그가 쓰는 글은 그의 몸이라는 점에서 삶을 잃어버리게 만든다. 

그는 어느 한 산문에서 “외로운 중년 호모만이 나의 친구(‘호의’)”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 말은 누군가가 곁에 있어도 자신의 표정을 함부로 보여줄 수 없다는 의미일 테다. 그의 신작 「성원씨는 어디로 가세요?」에서 어떻게 살 것인지를 향한 질문과 관계의 부딪힘과 회복이 반복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이런 시대의 벽을 맨몸으로 겨냥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는 시대의 관성에 맞서 긍지 있게 일어설 수 있을까. 그에게는 노동보다 관계가 더 고통스럽다. 

문종필 평론가 | 더스쿠프
ansanssunf@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