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함’이 아닌 노동하기 ‘위한’ 시간들 [노동의 표정]
더스쿠프 텍스트 속 노동의 표정 22편 노동의 폭 이야기 노동 시간과 노동 준비 시간 시대 변하면서 의미 달라져 행위 자체의 개념 확대하면 새로운 것들 품을 수 있어
실제 노동을 하고 있진 않지만, 노동하기 위해 견디는 시간도 새로운 ‘노동’ 개념에 편입해 보면 어떨까. 그러면 노동하기 위해 애쓰는 청년 세대는 물론, 모든 세대가 품고 있는 미래를 향한 불안 요소를 좀 더 구체적으로 담아낼 수 있지 않을까.
‘노동’ 문학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문학이면 문학이지 문학 앞에 굳이 ‘노동’이라는 단어를 붙여 구별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무래도 ‘미래파’라는 용어처럼 특정한 시기에 힘 있는 담론이 새롭게 ‘발견(명)’되는 과정에서 힘의 크기를 계량화하기 위해 시도된 하나의 사건과 같은 것이 아닐까.
‘퀴어문학’이나 ‘페미니즘문학’ 또는 ‘장르문학’이라고 명명하는 것처럼, 문학의 세계관에선 ‘문학’ 앞에 두드러지는 성질에 이름을 붙여 시대를 고정하는 것이 아닐까.
올림픽에서 가장 빠른 선수에게만 금메달을 수여하듯, 문학 역시도 활발히 담론을 형성한 윤리적 행위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까 ‘문학’ 앞에 ‘노동’을 붙였던 것은 ‘노동’이라는 개념 자체가 그 당시에 가장 중요한 의미로 쓰였음을 뜻한다. 그렇다면 ‘노동’은 어느 시기에 가장 화려했을까.
문학에서 특정한 개념이 화려했다는 것은 잔혹한 통증과 연결된다는 점에서 ‘화려하다’라는 수식어는 반어적인 표현이 될 수밖에 없다. 현대 시사의 흐름 속에서 “1980년대의 노동시는 이전 시대의 민중시를 주체적으로 계승”하는 과정에서 본격적인 산업화 시대와 맞물려 “시단의 흐름을 주도(맹문재)”했다.
하지만 이념을 주창했던 사회주의 몰락과 함께 1990년대는 “후기자본주의 문화논리가 일상 속으로 깊숙이 침전해 있음을 고려해 볼 때 1990년대 이후 민중이 직면한 객관 현실이 이전보다 확연히” 달라졌다.
창작에서도 “이러한 계열의 시는 그 진보성을 날것 그대로 생경하게 드러내는 게 아니라 민중의 일상 속에 용해시킴으로써 농익은 민중적 서정성의 미학을 새롭게 모색(고명철)”했다. 노동 문학이 시대를 주도했던 감정과 표정이 1990년대에 들어오면서 확연히 바뀌고 있음을 문학사史는 표명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어느 시대든 먹고사는 일이 중요하다는 점에서 다양한 매체가 공존하는 현시대에 ‘노동’ 문제는 더는 문학의 전유물이 아니다. 박찬욱 감독의 신작 ‘어쩔수가없다(2025년)’에서는 이 문제를 그 누구보다도 감각적으로 풀어냈다.
젊은 여성 만화가 오시노 고가니의 단편 「소중한 일(2025년)」에서는 ‘노동’함을 빛의 형식으로 산뜻하게 재현했다. 이뿐만이 아니라 새로운 작가들은 이 개념과 관련된 작품을 쏟아낸다.
그렇다면 2020년대를 특징 짓는 문학만의 ‘노동’의 표정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2025년에 ‘노동’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형태로 호명해선 안 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시를 쓰는 창작자도, 사회구조도 계속해서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이 내용은 너무나 상식적이어서 강조하는 것 자체가 무색하다.
그럼에도 이런 고민을 적는 건 ‘노동’이라는 행위 자체의 개념을 확대해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노동‘함’의 영역을 노동현장에서 일하는 것에만 한정할 것이 아니라, 노동하기 ‘위해’ 꿈꾸는 미래 행위 역시 노동 문학의 한 형태로 읽어보는 것은 어떨까. 노동하고 있지 않지만, 노동하기 위해 견디는 시간의 흔적도 새로운 ‘노동’ 개념에 편입된다면 노동의 표정을 좀 더 구체적으로 움켜쥘 수 있지 않을까.
그럴 때 과거의 문법에서 벗어나 좀 더 포괄적인 노동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이런 행위는 노동하는 행위 자체에만 의미를 부여했던 과거의 방식에서 벗어나 노동하기 위해 애쓰는 청년 세대는 물론, 모든 세대가 품고 있는 미래를 향한 불안 요소를 담아낼 수 있게 한다. 살기 위해서는 일해야 하니까.
이러한 시도를 투박하게 ‘노동 문학’이 아닌, 노동‘하려고’ 애쓰는 문학이라고 명명해도 좋겠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작품이 있을까. 수많은 작품이 있겠지만, 문학동인 ‘공통점’에서 출간한 「우리는 같은 통점이 된다(2025년)」에 수록된 이기현 시인의 ‘쉬었음 청년’이 친절한 예가 되지 않을까. 여기서 ‘쉬었음’은 “구직이나 취업 준비 없이 단순히 쉬고 있는 상태”를 의미하는 단어다.
이 작품은 코로나19가 한창이던 때 퇴직한 후, 집에 틀어박혀 시만 쓰고 살았다는 화자의 고백으로부터 시작한다. 코로나 시기는 비대면 시대이니 외부에서 일하기보다는 재택 근무하거나, 마스크를 쓴 채 조심스럽게 노동하던 시기다.
그가 어떤 노동을 하며 살았는지 시에서는 확인할 수 없으나, 퇴직하면서 받은 퇴직금을 증권 계좌에 모두 넣어 둔 채, 일상을 보낸다. 그렇게 화자는 유기된 고양이 ‘하루’와 함께 좁은 방에서 살아간다. 그러나 이런 삶이 지속될수록 불안은 부풀어 오른다. “증권 계좌에 넣어 둔 퇴직금이/점점 줄어가듯이/시는 쓸수록 가난해”지는 일이니 그렇다.
고양이는 그것도 모르고
새벽마다 발정이 나 울기 시작하고
괴로운 건 일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쉴 틈 없이 시를 쓰고
고양이를 기르는 일
-‘쉬었음 청년’ 부분
여기서 ‘그것’은 통장의 잔액이 줄어든 것을 의미한다. 고양이는 본능에 충실하니 인간의 구체적인 삶에는 관심이 없다. 시인 역시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으니 새벽마다 우는 것에 어떠한 불의도 품지 않는다. 오히려 함께 살기로 마음먹은 이상, 돌봐야 하는 의무감만 커진다.
하지만 이런 삶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일하는 행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화자가 “일을 하지 않는 게” 괴로운 것이 아니라, “쉴 틈 없이 시를 쓰고/ 고양이를 기르는 일”이 괴롭다고 적은 것은 점점 좁아지는 방에서 고양이를 기르는 일과, 살아가는 일, 그리고 시인으로서 시를 쓰는 일, 사이에서 일어나는 모정의 흔들림으로 읽힌다. 이 시의 화자는 고양이 하루와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몸을 움츠린다.
이처럼 노동하기 이전의 시간 역시도 노동의 표정으로 끌어당겨 이야기하면 ‘노동의 표정’을 좀 더 구체적으로 응시할 수 있다. 그렇다면 최근에 읽은 여세실 시인의 “먹고는 살아야지, 입안으로 중얼거리다가/ 버스를 한 대 놓쳤다(「휴먼 계정」)”와 같은 목소리도 노동문학의 한 형태로 확장할 수 있지 않을까. 개념을 확장하면 새로운 것들을 품을 수 있다.
문종필 평론가 | 더스쿠프
ansanssunf@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