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PU 26만장 받았으니 단숨에 AI 강국? 참 허황된 이야기
더스쿠프 경제학카페 피지컬 AI 학습서 1편 청신호 켜진 한국 AI 엔비디아 GPU 26만장 공급 GPU는 왜 필요한 걸까 ‘피지컬 AI’는 또 무엇일까
# “피지컬 AI의 글로벌 리더로 우뚝 서겠다.” 엔비디아가 한국에 그래픽처리장치(GPU) 26만장을 공급하기로 약속하면서, 국내 AI 업계에 활기가 돌고 있습니다. 정부와 기업은 새로 공급받는 GPU로 산업 기반을 ‘피지컬 AI’로 전환하겠다는 계획을 내세웠습니다. 이를 통해 미국·중국에 이어 ‘AI 3대 강국’으로 우뚝 서겠다는 게 한국 정부의 미래 플랜입니다.
# GPU는 왜 갑자기 AI 시대에 필수품이 됐고, 피지컬 AI는 또 뭘까요? GPU가 늘어나면 한국은 정말 AI 강국이 될 수 있을까요? 더스쿠프가 이 복잡한 질문을 하나씩 풀어봤습니다. ‘피지컬 AI 학습서’ 1편입니다.
국내 인공지능(AI) 산업의 분위기가 확 달라졌습니다. 그래픽처리장치(GPU) 제조업체 엔비디아가 한국에 26만장의 GPU를 2030년까지 우선 공급하겠다는 계약을 맺으면서입니다. 미국과 중국을 제외하면 세계 최대 규모의 공급량으로, 현재 국내에 있는 GPU(4만5000개)보다 5.7배 많은 양입니다.
[※참고: 구체적으론 삼성전자와 SK그룹, 현대차그룹이 5만장, 네이버클라우드가 6만장을 받습니다. 공공분야 AI 연구를 이끄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도 5만장이 공급됩니다.]
그러자 국내 언론사들은 ‘한국이 AI 강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일제히 보도했습니다. 정부도 ‘의미 있는 진전’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하정우 대통령실 AI미래기회수석은 10월 31일 브리핑에서 “(GPU 확보량 기준으로) 한국이 미국과 중국에 이어 전세계 3등이 됐다”면서 “AI 모델을 만드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실제 산업현장이나 로봇사회, 새로운 모빌리티 등 핵심적인 원천기술이 될 AI를 만들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재명 정부가 밀고 있는 ‘AI 3대 강국’ 정책에 한발 가까워진 셈입니다.
그러면서 하 수석은 이런 말도 덧붙였습니다. “사실 오늘 (브리핑의) 메인테마는 GPU 26만장보다 ‘피지컬 AI’의 글로벌 리더가 되기 위해 어떤 것이 필요한지에 더 방점이 찍혀 있다. (GPU 26만장은) 피지컬 AI라는 기술 전체의 경쟁력을 키우는 데도 활용될 것이다.”
자,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시나요? 일반인이 알아듣기 쉽지 않은 영역입니다. 도대체 GPU가 뭐길래 AI 분야의 핵심이 됐고, ‘피지컬 AI’는 또 뭘까요? 줄곧 생성형 AI를 강조하던 정부가 갑자기 피지컬 AI를 밀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GPU(graphics processing unit)는 단어 뜻이 보여주듯 ‘그래픽을 처리하기 위해’ 개발된 반도체입니다. 장점은 ‘병렬 연산’입니다. GPU에 있는 수천개의 코어(연산 유닛)가 방대한 양의 데이터를 동시에 처리할 수 있습니다.
다만, GPU는 연산 성능이 뛰어나진 않습니다. 복잡하거나 어려운 계산을 하는 작업엔 적합하지 않죠. 그래서 2000년대만 해도 GPU는 주로 게임이나 영상 속 그래픽을 렌더링(처리)하는 등 ‘자잘한 일’에 사용됐습니다. GPU의 병렬 연산이 그래픽 속 수많은 픽셀(pixel)의 좌표와 색상을 계산하는데 적격이기 때문이었죠.
이랬던 GPU의 운명이 바뀐 건 AI를 학습시키는 도구로 GPU만 한 게 없단 걸 AI 연구자들이 깨달으면서입니다. AI가 고양이를 학습하는 상황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이를 위해선 수만장의 고양이 사진을 AI에 보여줘야 하는데, 한장씩 학습하다 보면 시간이 꽤 오래 걸립니다.
반면 GPU를 쓰면 학습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습니다. 그래픽 픽셀들을 계산하듯, GPU가 수천장의 사진을 동시 연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AI를 교육하는 핵심 역량으로 꼽히면서 GPU가 AI 시대의 필수 자원으로 거듭난 겁니다.
현재 AI 학습용 GPU 시장을 지배하는 건 엔비디아입니다. 2017년 AI 학습용 GPU ‘V100’을 세계 최초로 개발한 엔비디아는 시장 점유율(80%·트렌드포스·2024년 기준)과 시가총액에서 모두 1위를 질주하고 있습니다. AMD와 인텔 등 후발주자들이 잇달아 제품을 개발해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긴 하지만, 아직까진 엔비디아의 GPU가 성능 면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합니다.
GPU가 전세계적으로 품귀 현상을 빚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AI 모델이 학습을 통해 점점 커지고 복잡해질수록 더 많은 GPU가 필요한데, 엔비디아가 생산하는 GPU 개수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선 한국이 엔비디아로부터 26만장 GPU를 우선 공급받는 건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럼 하정우 수석이 여러번 언급한 피지컬 AI(physical AI)는 무엇일까요. 쉽게 설명하면, ‘기계의 두뇌 역할을 하는 AI’라고 보면 됩니다. 현실을 인식하고 반응하면서 기계의 성능을 강화하는 게 피지컬 AI의 역할입니다. 챗GPT나 제미나이 같은 생성형 AI가 기반이라 ‘생성형 피지컬 AI’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생성형 AI의 활동 영역이 온라인이라면, 피지컬 AI는 ‘현장’이 주무대인 셈입니다.
피지컬 AI가 수면 위로 부상한 건 최근 생성형 AI의 기술이 ‘현실 세계를 이해하고 명령을 내릴 수 있을 만큼’ 성숙해진 결과입니다. 로봇이나 자율주행차, 스마트팩토리 등 다양한 산업에 생성형 AI를 접목하는 시대가 열린 겁니다. 이를 통해 기계가 스스로 판단하고 대응함으로써 생산 효율성이나 제품의 성능을 비약적으로 끌어올릴 수 있습니다.
전망도 밝습니다. 시장조사업체 투워즈 헬스케어에 따르면, 피지컬 AI 시장은 2024년 41억2000만 달러(약 6조526억원)에서 연평균 31.2% 성장해 2034년 611억9000만 달러(약 89조8942억원)로 커질 것으로 보입니다.
엔비디아가 다른 나라가 아닌 한국에 우선적으로 GPU 26만장을 공급하는 배경도 여기에 있습니다. 한국은 제조업에 특화된 나라입니다. 2023년 기준 국내총생산(GDP) 대비 제조업 비중은 27.6%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 회원국 중 아일랜드(31.0%)에 이어 2번째로 높습니다. 피지컬 AI 산업이 성장하기에 최적인 산업 구조를 갖춘 셈입니다.
이런 엔비디아의 의도는 젠슨 황이 지난 10월 31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의 CEO 서밋 특별연설에서 주장한 내용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이 분야(피지컬 AI)는 한국에 특별한 기회가 될 수 있다. 한국은 풍부하고 깊은 기술적·과학적 역량과 소프트웨어·AI 역량, 그리고 제조 능력을 갖춘 세계에서 몇 안 되는 나라다.”
엔비디아로부터 GPU를 공급받는 기업들도 피지컬 AI로 업그레이드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삼성전자는 5만장의 GPU를 투입해 ‘반도체 AI 팩토리’를 구축합니다. 공정 전반을 디지털 트윈 기술로 혁신해 생산 효율을 높이는 게 목표입니다.
SK그룹 역시 반도체와 생산설비와 클라우드 인프라를 결합한 ‘제조 AI 플랫폼’을 설계합니다.[※참고: 디지털 트윈은 현실 세계의 물리법칙·제조공정 등을 고스란히 복제한 가상 모델입니다. 이를 통해 문제를 예측하고 해결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현대차그룹은 자율주행과 로봇, 스마트 팩토리용 대규모 AI 모델을 학습하고, 정부와 함께 30억 달러(약 4조3000억원)를 투자해 ‘피지컬 AI 연구소’를 세울 예정입니다. 네이버클라우드는 GPU로 인간의 언어를 이해하고 생성하는 대규모언어모델(LLM)을 학습시킬 예정입니다. 이를 통해 마찬가지로 산업용 피지컬 AI 플랫폼으로 확장할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그럼 GPU 26만장을 확보하는 것만으로 한국은 정말 ‘AI 강국’이 될 수 있을까요? 글쎄요. GPU가 AI 산업에 있어 필수요소인 건 분명합니다만, 정부의 궁극적 목표인 ‘피지컬 AI’가 실현하려면 GPU 말고도 준비해야 할 게 많습니다. 그게 무엇인지는 ‘피지컬 AI 학습서’ 2편에서 자세히 다루겠습니다.
이혁기 더스쿠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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