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진영의 불행은 내 진영의 기쁨 [영화로 읽는 세상]
더스쿠프 이코노무비 영화로 읽는 세상 헤이트풀8(The Hateful Eight)⑪ 프레너미, 친한 척 하는 웬쑤들 사르트르의 출구 없는 방과 같아 타인이 곧 지옥이 되는 이유들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이 영화에서 설정한 무대장치인 ‘미니의 잡화점’은 평범하지만 특이하다. 영화의 90%가량을 이 좁은 잡화점에서 촬영한다. 얼핏 협소하고 폐쇄된 배심원실에서 모든 장면을 촬영한 헨리 폰다 주연의 클래식 영화 ‘12인의 분노한 사람들(12 Angry Menㆍ1957년)’을 떠올리게 하는 영화다.
70㎜ 영화라고 하면 대개 스펙터클한 영화를 기대하지만, 좁아터진 잡화점에서 일관하는 ‘헤이트풀 8’은 전혀 스펙터클하지 않다. 대신 70㎜ 필름 덕분에 좁은 잡화점의 구석구석까지 ‘원 샷’으로 잡으면서 디테일한 장치들이 현장감 있게 전달되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그 좁은 잡화점에서의 2시간이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와이오밍주州 허허벌판에 자리 잡은 미니의 잡화점에 살인적인 눈폭풍을 피하기 위해 서로 목적이 다른 ‘헤이트풀’한 악당들이 모여든다. 흑인과 백인, 멕시칸이 서로 혐오하고, 현상수배범과 현상금 사냥꾼이 서로를 죽일 기회만 엿본다. 당연히 누구도 원치 않지만 피할 수도 없는 딱한 상황이다.
눈폭풍이 지나갈 때까지는 불편한 동거를 감내하는 수밖에 없다. 최소한 상대방이 먼저 총을 뽑아들기 전까지는 적당히 자신의 본모습과 속마음을 감추고, 예의를 차리고 친한 척하고 동거 할 수밖에 없는 천적들이다.
서로 등 뒤에 칼을 감추고 웃으며 악수한다. 요즘 많이 쓰이는 영어 신조어인 ‘프레너미(FrenemyㆍFriend+Enemy)’가 된다. 친한 척하는 속칭 ‘웬쑤’들이다. 이들은 끊임없이 상대를 모욕하면서 상대가 고통을 느끼면 자신들은 희열을 느낀다.
이런 고약한 프레너미 상황이 불편하다고 문을 열고 살인적인 눈폭풍이 몰아치는 밖으로 나가는 순간 곧 죽음이다. 타란티노 감독은 아무도 그 방을 나갈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강조해서 보여준다.
루스의 심부름으로 눈폭풍을 뚫고 불과 몇걸음 떨어진 우물에 다녀온 마부가 방에 돌아오자마자 “한 번만 더 이런 일 시키면 다 죽여버리겠다”고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곰가죽 뒤집어쓰고 벽난로 불 속에 들어가듯 드러눕는다.
많은 회사원에게도 ‘회사는 지옥이지만 회사 밖은 죽음이다’. 로또 당첨되기 전까지는 회사 안에서 프레너미들과 지내는 것이 상책이다. 미니의 잡화점은 출구 없는 지옥이다. 결국 타란티노 감독은 ‘지옥’을 제대로 보여주기 위해 미니의 잡화점이라는 작은 공간 촬영에 70㎜ 필름을 아낌없이 동원한 모양이다.
타란티노 감독이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Jean Paul Sartre)의 희곡 ‘출구 없는 방(Huis Clos:No Exitㆍ1943년)’에서 영감을 얻어 미니의 잡화점을 설정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다양한 악당이 잠시 프레너미로 동거하는 미니의 잡화점은 사르트르의 ‘출구 없는 방’과 판박이로 닮았다.
사르트르의 출구 없는 방은 어느 호텔방이다. 어느 날 가르생(Garcin)이라는 남자가 이네스(Inez)라는 우체국 여자 직원, 에스텔(Estelle)이라는 허영심 덩어리 상류층 여자와 함께 지내게 된다. 서로 가면을 쓰고 상대에게 자신의 가면 쓴 모습만 보여주려고 한다. 가르생은 평화주의인 척하지만 탈영병이자 아내 가정폭력범이다.
이네스는 사촌의 아내를 유혹해서 사촌을 자살하게 만든 레즈비언이고, 고상한 척하는 에스텔은 사실은 불륜으로 낳은 아이를 호수에 버려서 불륜애인마저 자살하게 만든 패륜녀다. 헤이트풀8 속 출구 없는 미니의 잡화점에서 서로 정체를 숨기고 가장 선한 척하는 악당들과 똑같은 모습이다.
남들에게 감춰야 할 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타인의 시선은 지옥이다. 이네즈는 “우리가 계속 서로를 보며 살아야 한다는 것, 그것이 곧 지옥”이라고 출구 없는 방의 절망을 내뱉는다. 가르생이 그 말을 받는다.
“그러니까… 이런 게 지옥이구나. 정말 이럴 줄 몰랐는데… 당신들도 생각나지? 지옥에 유황불, 장작불 타는 화형대, 불에 달군 쇠꼬챙이… 그런 것들이 있다잖아? 정말 웃겨. 그런 거 다 필요 없어. 여기가 지옥이고, 지옥은 바로 타인들이야(L’enfer, c’est les autres).” 아마도 연극사에서 가장 유명한 대사 중의 하나일 듯한 ‘지옥은 타인이다(타인이 지옥이다)’의 탄생이다.
타인이 곧 지옥이 되는 이유는 니체가 쾌도난마처럼 밝혀준다. ‘샤덴프로이데(sch adenfreude)’라는 영어 같지 않은 괴상한 영어가 있다. ‘schaden(고통)’과 ‘freude(기쁨)’의 합성어로 ‘남/나의 고통은 나/남의 기쁨’이라는 뜻을 한 단어로 표현했다.
본래 독일어이지만 영어에서도 달리 표현할 길이 없어서 독일어 그대로 가져다 쓰는 영어가 됐다. 니체는 남의 고통이 나의 기쁨이 되고, 나의 기쁨이 남의 고통이 되는 한 타인은 지옥일 수밖에 없다고 개탄한다.
굳이 멀리 독일까지 갈 것도 없다. 일본에도 ‘다른 사람의 불행은 꿀맛(人の不幸は蜜の味)’이라는 너무 적나라해서 민망한 속담이 있고, 이미 3000년 전 쓰였다는 중국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도 공자가 ‘행재락화幸災樂禍’하는 인간들에게 혀를 찼다는 말이 기록돼 있다. 행재락화란 “남의 재난(災)에 행복(幸)해하고, 남이 당한 화(禍)를 즐긴다(樂)”는 말이다.
얼마 전 대통령이 일본 총리를 만나서 ‘앞마당을 함께 쓰는 이웃끼리 사이좋게 지내자’고 하고 중국 주석을 만나서도 ‘떼려야 뗄 수 없는 이웃끼리 협력하자’고 했다는데, 남의 불행에서 꿀맛을 느끼는 일본이나 ‘남의 고통이 곧 나의 기쁨’이라고 3000년 동안 격하게 공감하고 있는 중국과 정말 사이좋은 이웃이 된다는 게 가능한 일인지 모르겠다.
우리가 ‘남한’ 땅을 떼어다 북유럽 어디쯤이나 남태평양에 옮겨놓고 살 수도 없으니 지정학적으로 사르트르의 지옥과 같은 출구 없는 방에 살고 있는 듯하다. 서로 경쟁도 하고 국익이 상반되는 이웃 국가끼리 ‘샤덴프로이데’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고 섭섭해도 이해할 수 있지만, 한 나라 국민들이 같은 국익을 놓고도 샤덴프로이데 하는 것은 실로 난감하다.
이번 한미정상회담에서 어쩌면 수십년간 국가적 숙원사업이었던 핵추진잠수함 도입의 물꼬를 텄는데, 이웃국가 중국이나 일본이 샤덴프로이데 한 것은 이해하겠는데, 어느 ‘진영’에 속한 일부 한국인들도 고통스러워하고, 그 꿈이 실현되지 않기를 정화수 떠놓고 축수기원祝手祈願하는 듯하다.
‘우리가 남이가?’ 사르트르가 타인이 지옥이라고 했다면 우리는 ‘진영이 지옥’이다. 출구 없는 방에서 ‘타인’과 다름없는 ‘진영’과 서로 마주보고 살아가야 한다.
김상회 정치학 박사|더스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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