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미투자금 연 200억 달러, ‘외화 운용수익’으로 충당할 수 있을까
더스쿠프 마켓분석 한미 팩트시트 속 외환 리스크 팩트시트, 실패 아닌 성과 거액 내고 안보 챙긴 정부 연 200억 달러 제한에도 외환 리스크 여전히 숙제
지난 14일 한미 공동 팩트시트가 공개됐습니다. 야당인 국민의힘은 정부와 여당의 성과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모양새지만, ‘현 정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외교’였다는 건 부인하기 힘듭니다. 양보만 한 게 아닌 데다 챙긴 것도 있기 때문이죠. 다만, 외환 리스크 등 예민하게 신경써야 할 이슈도 적지 않습니다. 더스쿠프가 팩트시트 속 ‘위험요인’을 분석했습니다.
“이번 팩트시트는 ‘국익시트’ 그 자체다.” “아니다. 원론적인 수준에 그친 ‘백지시트’다.” 14일 정부가 발표한 한미 ‘조인트 팩트시트(공동 설명자료)’를 두고 나온 여야의 엇갈린 평가입니다.
이 팩트시트는 지난 10월 경주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의 결과물로, 양국의 통상ㆍ안보 분야 합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의 결과물을 두고 여당인 더불어민주당과 야당인 국민의힘이 서로 다른 해석을 내놓고 있는 거죠.
물론 입장에 따라 시각은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 팩트시트는 ‘현 정부의 성과’라는 게 중론입니다. 관세폭탄을 앞세워 우리나라를 코너로 몰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상대로 무조건 내어주기만 한 게 아니라 얻어낸 것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 관점① 팩트시트에 뭐가 담겼나 = 팩트시트에 담긴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볼까요. 내용은 크게 경제 분야와 안보 분야로 나뉩니다. 우선 경제 분야를 보면 미국이 한국산 제품의 관세를 15%로 낮췄습니다. 사실 이걸 ‘낮췄다’라고 하는 게 좀 이상하긴 합니다. 원래는 무관세였던 걸 트럼프 대통령의 막무가내식 외교로 마지못해 올려주는 것이니까요.
다만 힘이 더 강한 쪽의 입김이 크게 작용하는 게 국제관계라는 점을 감안하면 ‘선방’한 건 분명합니다. 미국 시장에서 경쟁하는 다른 국가들(일본 자동차나 대만 반도체 등)의 관세율과 비교하면 최소한 같은 수준이기 때문이죠.
관세율을 이유 없이 낮춰주는 건 아닙니다. 한국은 그 대가로 3500억 달러(20일 기준 약 514조원) 규모의 대미對美 투자를 하기로 했습니다. 방식은 펀드와 현금입니다. 1500억 달러는 조선업 투자펀드를 통해, 나머지 2000억 달러는 현금으로 투자합니다.
대신 몇가지 조건을 달았습니다. 조선업 투자펀드에선 모든 수익이 한국에 귀속되도록 했습니다. 현금투자는 연간 200억 달러로 제한하고, 한국이 조달금액과 시점 조정을 요청할 수 있도록 했죠.
안보 분야에선 핵추진잠수함 건조를 미국으로부터 승인받고, 한국의 우라늄 농축과 사용 후 핵연료 재처리 권한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기존의 한미 원자력협정을 손보기로 사실상 합의한 게 성과로 꼽힙니다.
물론 팩트시트에 아쉬운 빈틈도 있습니다. 예컨대 우리의 안전장치라고 할 수 있는 내용들은 대부분 ‘미국과의 협의나 검토’가 필요합니다. 반면 대미 투자는 명확하게 명시돼 있습니다. 그래서 “굴욕적인 팩트시트 아니냐”는 지적도 나오는 거죠.
하지만 그런 빈틈들만으로 “얻은 게 전혀 없는 팩트시트”라고 주장하기엔 분명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이미 재계에서는 이번 팩트시트 도출로 “관세에 따른 불확실성이 확실히 제거됐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성과가 없다면 이런 반응이 나올 리 없죠.
특히 핵추진잠수함 건조 승인이나 한미 원자력협정 개정은 돈으로 따질 수 없는 가치가 있습니다. 안보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보수주의자들이 이번 팩트시트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그래서입니다.
■ 관점② 성과 뒤 민감한 이슈들 = 그렇다고 긍정적인 함의만 있는 건 아닙니다. 정부와 여당이 예민하게 다루지 않는 이슈도 있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건 외환 리스크입니다. 누군가는 ‘현금투자 금액을 연 200억 달러로 제한했으니 리스크도 해소된 것 아니냐’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현실을 모르는 소리입니다.
이재명 정부는 통화스와프 없이 200억 달러를 조달하겠다는 계획입니다. 통화스와프는 두 국가의 중앙은행이 서로의 통화를 미리 약정한 환율에 따라 맞교환하는 계약입니다. 협상 과정에서 우리 정부가 미국에 무제한 통화스와프를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럼 우리 정부는 왜 무제한 통화스와프를 맺으려 했을까요? 우리나라 원화는 국제 거래에 사용되는 기축통화가 아닙니다. 이 때문에 국제 거래에선 늘 달러를 사용하고, 일정 수준의 달러를 보유해 지불 능력을 확보하죠. 우리나라 외환보유액은 올해 10월말 기준 4288억 달러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미국에 투자하기로 한 금액이 3500억 달러로 총 외환보유액의 81.6%에 달합니다. 이 금액이 한꺼번에 빠져나가는 건 아니지만, 기존의 외환 보유 전략에 차질이 생기는 건 확실하다 보니 대안이 필요했을 겁니다. 그래서 무제한 통화스와프를 요청했고, 그게 생각대로 되지 않자 ‘연 200억 달러 한도 내 투자’라는 차선책을 내세운 것으로 보입니다.
정부는 이 금액을 외화자산 운용수익으로 확보하겠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불가능한 플랜은 아닙니다. 올해 9월말 기준 운용 가능한 유가증권 외화자산은 3784억2000만 달러였는데, 여기서 연간 5.3% 수익을 내면 200억 달러를 조달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한국투자공사(KIC)의 9월말 기준 운용자산은 2276억 달러였고, 연간 수익률은 11.73%였습니다. 정부는 운용수익이 모자란다면 정부보증채를 국제 금융시장에서 발행해서 국내 시장에 주는 충격을 최소화한다는 계획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외화자산 운용을 통해 10년간 200억 달러씩 마련한다는 게 생각처럼 쉬운 게 아닙니다. 정부가 외화자산 운용을 통해 수익을 얻는 방법은 크게 네가지입니다. ▲한은이 KIC에 위탁한 외화자산 운용, ▲기획재정부가 KIC에 위탁한 외국환평형기금(외평기금) 운용, ▲한은 외자운용원의 자체 외화자산 운용, ▲외화 표시 채권 발행 등입니다.
이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한은과 기재부가 KIC에 위탁한 외화자산입니다. 규모는 언급한 것처럼 올해 9월말 기준 2276억 달러입니다. 여기서 기재부 원금이 886억 달러, 한은 원금이 300억 달러입니다. 총 원금이 1186억 달러니까 1.9배의 누적 수익률을 거둔 셈이죠.
맹점은 KIC가 외화자산 운용으로 항상 수익을 내는 건 아니라는 겁니다. 차규근 조국혁신당 의원이 최근 KIC로부터 받아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KIC는 2023년부터 올해 9월까지 연평균 190억 달러의 운용실적을 냈습니다. 양호한 실적이란 평가를 받았지만, 200억 달러를 밑돕니다. 기간을 2006년으로 늘리면 더 심각한 결과가 나옵니다. 4~5년 주기로 마이너스 실적을 냈으니까요.
문제는 또 있습니다. 총외환보유액 대비 KIC 위탁 외화자산 비중은 2006년 0.4%에서 꾸준히 비중이 상승해 올해 53.9%를 기록했습니다(더스쿠프 분석). 전체 외환보유액의 절반 이상을 시장에 투자하고 있다는 겁니다. 유가증권 외환자산 전체로 보면 비중은 85.6%로 더 늘어납니다. 투자금이 많아야 수익도 늘겠지만, 그만큼 리스크도 커집니다.
지난 1997년 우리나라가 외환위기를 맞았을 때 충격이 컸던 이유 중엔 정부가 외화를 현금으로 쟁여놓지 않고 여기저기 투자해 즉시 현금화를 못한 탓도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외화자산 투자 비중을 무작정 늘리는 게 과연 적절한지 따져볼 문제입니다.
맹점은 이뿐만이 아닙니다. 우리나라의 총 외환보유액은 꾸준히 증가해왔는데, 그건 외화자산 운용수익을 다른 데 사용하지 않고 계속 재투자해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향후 최소 10년 이상은 외화자산 운용수익을 재투자할 수 없습니다. 연 200억 달러씩 2000억 달러를 미국에 투자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외환보유액에 신규 외화자산이 유입될 가능성도 낮습니다. 기업들이 밖에서 외화를 벌어와야 신규 유입이 될 텐데, 대부분의 수출 대기업들이 대미 투자에 나선 만큼 외화수입이 현지에 투자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죠. 이런 상황에서 KIC가 ‘규모의 투자’를 통해 운용수익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우리나라의 외환보유액은 수년째 국제통화기금(IMF)이 권고하는 수준(2024년 기준 5220억 달러)을 밑돌고 있습니다. 지금도 외환보유액이 모자란 상황에서 외환을 늘릴 수단이 사라진다는 건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재명 정부와 여당이 팩트시트의 성과에 매몰돼선 안 되는 이유입니다.
19일 원ㆍ달러 환율(하나은행 매매기준율 기준)은 1469.50원으로, 14일보다 14원 올랐습니다. 어쩌면 시장은 벌써 위험 신호를 보내고 있는지 모릅니다.
김정덕 더스쿠프 기자
juckys@thescoop.co.kr